2018년 2월 3일 토요일

예레미야 15장 1~9절 "징벌 안에 담긴 사랑"

2017년 10월 16일, 삼덕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예레미야 15장 1~9절 "징벌 안에 담긴 사랑"

1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세와 사무엘이 내 앞에 섰다 할지라도 내 마음은 이 백성을 향할 수 없나니 그들을 내 앞에서 쫓아 내보내라 2 그들이 만일 네게 말하기를 우리가 어
디로 나아가리요 하거든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죽을 자는 죽음으로 나아가고 칼을 받을 자는 칼로 나아가고 기근을 당할 자는 기근으로 나아가고 포로 될 자는 포로 됨으로 나아갈지니라 하셨다 하라 3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그들을 네 가지로 벌하리니 곧 죽이는 칼과 찢는 개와 삼켜 멸하는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으로 할 것이며 4 유다 왕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가 예루살렘에 행한 것으로 말미암아 내가 그들을 세계 여러 민족 가운데에 흩으리라 5 예루살렘아 너를 불쌍히 여길 자 누구며 너를 위해 울 자 누구며 돌이켜 네 평안을 물을 자 누구냐 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나를 버렸고 내게서 물러갔으므로 네게로 내 손을 펴서 너를 멸하였노니 이는 내가 뜻을 돌이키기에 지쳤음이로다 7 내가 그들을 그 땅의 여러 성문에서 키로 까불러 그 자식을 끊어서 내 백성을 멸하였나니 이는 그들이 자기들의 길에서 돌이키지 아니하였음이라 8 그들의 과부가 내 앞에 바다 모래보다 더 많아졌느니라 내가 대낮에 파멸시킬 자를 그들에게로 데려다가 그들과 청년들의 어미를 쳐서 놀람과 두려움을 그들에게 갑자기 닥치게 하였으며 9 일곱을 낳은 여인에게는 쇠약하여 기절하게 하며 아직도 대낮에 그의 해가 떨어져서 그에게 수치와 근심을 당하게 하였느니라 그 남은 자는 그들의 대적의 칼에 붙이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간혹 구약성경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신약에 담긴 하나님은 사랑이 많고 자비로우시지만 구약이 묘사하는 하나님은 정반대로 무섭고 잔인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오늘날뿐만 아니라 교회의 역사 속에 끊임없이 이어져 내려왔고 심지어 초기교회의 대표적인 이단 중 하나인 마르시온은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은 전혀 다르다는 “두 하나님”이론을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러한 논리가 마냥 억지는 아닙니다. 실제로 구약 안에는 엄중하고 단호한 심판에 대한 말씀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역시 그 중 하나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 지난날 이스라엘을 향해 선포하신 심판의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보고 그것을 지금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려 합니다.

먼저 본문 1절 제가 읽겠습니다.
1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세와 사무엘이 내 앞에 섰다 할지라도 내 마음은 이 백성을 향할 수 없나니 그들을 내 앞에서 쫓아 내보내라 


주님께서는 예언자 예레미야에게 “모세와 사무엘이 내 앞에 섰다 할지라도” 이스라엘 백성을 당신의 마음에서 떠나보내겠다는 단호하고도 매서운 말씀을 본문 시작부터 하셨습니다. 이 때, ‘주님 앞에 서다.’라는 표현은 예언자가 다른 사람을 위해 주님께 기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1절에 언급된 모세는 시내산 기슭에서 금송아지를 만든 이스라엘을 향해 진노한 하나님께 백성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또한 사무엘 역시 여러 번 백성들을 위해 기도하며 곤경에서 건져낸 중보기도자의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러한 모세와 사무엘이 당신을 향해 간구한다 할지라도 그 기도에 응답하지 않겠다고 엄중히 선포하셨습니다.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그 결과 유다가 겪을 심판의 내용입니다. 먼저 2절에는 그것을 죽음, 칼, 기근, 포로 됨으로 정리합니다. 이것은 명백히 전쟁으로 말미암은 고난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비극은 3절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묘사되는데 바로 “죽이는 칼과 찢는 개와 삼켜 멸하는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으로 인한 벌입니다.

이 넷은 유다 백성이 겪게 될 일련의 고통을 묘사합니다. 곧 그들이 전쟁터에서 죽으면 그 시체를 개가 찢고 새와 짐승이 뜯어먹으리라는 이야기입니다. 죽이는 칼이 전쟁을 뜻한다면, 나머지 셋은 죽은 뒤에 시체가 짐승과 새에게 훼손됨을 말합니다. 전쟁에 목숨을 잃는 것만 해도 끔찍한데, 죽은 뒤에 더 처참한 꼴을 겪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심판은 9절에서 그 절정을 드러냅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9 일곱을 낳은 여인에게는 쇠약하여 기절하게 하며 아직도 대낮에 그의 해가 떨어져서 그에게 수치와 근심을 당하게 하였느니라 그 남은 자는 그들의 대적의 칼에 붙이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 구절은 출산이 가지는 고대 중동의 의미를 이해할 때 그 뜻을 더욱 분명히 깨닫게 됩니다. 성경의 여러 장면들을 통해 분명히 확인할 수 있듯이 이 시대 아기를 못 갖는 것은 흔히 신의 저주로 여겨졌습니다. 반대로 많은 자녀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생각되었습니다. 따라서 9절에 등장하는 가상의 여인은 완전수인 일곱 명의 자녀를 낳고 무척 기고만장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소중한 아들, 딸들을 전쟁으로 잃고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이것은 곧 이 때 유다가 짊어져야할 수난을 상징합니다. 게다가 예언자는 이러한 모든 심판이 분명 주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거듭 밝히며 본문을 끝맺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실제로 바벨론 제국에 의한 남유다의 멸망으로 실현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다시 묻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토록 잔인한 심판을 당신의 백성들에게 내리시는 걸까요? 그 이유를 4절과 6절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4 유다 왕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가 예루살렘에 행한 것으로 말미암아 내가 그들을 세계 여러 민족 가운데에 흩으리라

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나를 버렸고 내게서 물러갔으므로 네게로 내 손을 펴서 너를 멸하였노니 이는 내가 뜻을 돌이키기에 지쳤음이로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심판이 즉흥적인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 이면에는 이미 수없이 거절당했던 주님의 사랑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은 정확히는 므낫세 왕으로 대표되는 유다의 심각한 타락을 가리킵니다. 열왕기하 19장 1~9절에 따르면 므낫세는 아버지 히스기야와는 달리 우상숭배를 나라 안에 끌어들였고 심지어 성전 마당에 우상을 위한 제단을 쌓았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다른 종교를 선택한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와 공평 대신의 우상의 탐욕과 폭력을 따랐음을 의미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끊임없이 주님의 뜻을 거부하고 이 시대의 또 다른 우상들인 욕망과 성공을 숭배한다면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 아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스스로를 날마다 진리로 일깨워야 합니다. 내가 진정 섬기고 따르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을 통해 점검하며 복음으로 자신을 바르게 세워야 합니다.

이렇듯 죄에 대한 하나님의 단호한 질책은 성경에 분명히 담긴 진리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역시 주님의 또 다른 사랑의 표현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즉, 비록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잠시 벌하시지만 결코 그들을 버리지 않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7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7 내가 그들을 그 땅의 여러 성문에서 키로 까불러 그 자식을 끊어서 내 백성을 멸하였나니 이는 그들이 자기들의 길에서 돌이키지 아니하였음이라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유다를 가리키는 하나님의 호칭입니다. 바로 “내 백성”입니다. 그들이 아무리 역겨운 죄를 주님께 저질렀어도, 그리하여 마침내 심판을 선언하심에도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과의 끈끈한 사랑의 관계 안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심판 자체가 목적이 아니며 오히려 엄중한 경고의 말씀을 통해 죄에서 돌이켜 그 징벌이 일어나지 않길 바라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재앙의 선언들은 얼핏,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보이신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는 어울리지 않아 보입니다. 그리하여 구약의 하나님은 신약의 하나님과 마치 다른 분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구약 전체에 담긴 주님의 위대한 뜻을 곱씹어 보면 그러한 심판역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또 다른 사랑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를 분명히 명심하며 죄의 길에서 돌이켜 생명의 진리로 더욱 담대히 나아가는 모두가 되길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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