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2월 5일 월요일

스가랴 6장 1~15절 "먼 데 사람들이 와서"

2017년 12월 7일, 목, 삼덕교회 새벽기도회, 목사 정대진
스가랴 6장 1~15절 "먼 데 사람들이 와서"

1 내가 또 눈을 들어 본즉 네 병거가 두 산 사이에서 나오는데 그 산은 구리 산이더라 2 첫째 병거는 붉은 말들이, 둘째 병거는 검은 말들이, 3 셋째 병거는 흰 말들이, 넷째 병거는
어룽지고 건장한 말들이 메었는지라 4 내가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물어 이르되 내 주여 이것들이 무엇이니이까 하니 5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는 하늘의 네 바람인데 온 세상의 주 앞에 서 있다가 나가는 것이라 하더라 6 검은 말은 북쪽 땅으로 나가고 흰 말은 그 뒤를 따르고 어룽진 말은 남쪽 땅으로 나가고 7 건장한 말은 나가서 땅에 두루 다니고자 하니 그가 이르되 너희는 여기서 나가서 땅에 두루 다니라 하매 곧 땅에 두루 다니더라 8 그가 내게 외쳐 말하여 이르되 북쪽으로 나간 자들이 북쪽에서 내 영을 쉬게 하였느니라 하더라 9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10 사로잡힌 자 가운데 바벨론에서부터 돌아온 헬대와 도비야와 여다야가 스바냐의 아들 요시아의 집에 들어갔나니 너는 이 날에 그 집에 들어가서 그들에게서 받되 11 은과 금을 받아 면류관을 만들어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머리에 씌우고 12 말하여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싹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 13 그가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고 영광도 얻고 그 자리에 앉아서 다스릴 것이요 또 제사장이 자기 자리에 있으리니 이 둘 사이에 평화의 의논이 있으리라 하셨다 하고 14 그 면류관은 헬렘과 도비야와 여다야와 스바냐의 아들 헨을 기념하기 위하여 여호와의 전 안에 두라 하시니라 15 먼 데 사람들이 와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너희가 알리라 너희가 만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진대 이같이 되리라


지난 화요일에도 말씀 드렸듯이 전체 14장으로 이루어진 스가랴서는 크게 1~8장과 9~14장으로 전반부와 후반부를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 중 앞부분에는 여덟 개의 환상을 담고 있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6장 1~8절은 그 중 마지막인 여덟 번째 환상입니다. 여기에는 각각 다른 색의 말들이 이끄는 네 개의 병거가 등장합니다.

중요한 점은 첫 번째 환상 역시 말들이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스가랴에 등장하는 환상들이 시작과 끝이 연결되는 수미상관을 이루고 있음을 알려줍니다. 게다가 첫 번째 환상의 내용이 “위로”와 “회복”이라는 점을 유념한다면 마지막인, 여덟 째 환상 역시도 이와 동일한 주제의식을 가지고 있음을 충분히 짐작하게 합니다. 

이를 염두에 두고, 본문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1절을 보면 예언자 스가랴가 눈을 들어 보니 네 대의 병거가 구리로 만든 산 사이에서 나왔습니다. 고대 중동의 세계관에서 이러한 구리 산은 “하늘 문”을 가리켰습니다. 따라서 이 네 병거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상의 존재들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병거들에 달린 말들의 색깔은 저마다 달랐는데 첫째 병거는 붉은 말들, 둘째 병거는 검은 말들, 셋 째 병거는 흰 말들, 넷째 병거는 어룽지고 건장한 말들이었습니다.

5절은 이러한 말들에 대해 천사의 설명을 기록하였습니다. 천사에 따르면 이 네 병거들은 네 개의 바람들입니다. 이것은 네 병거들이 바람들처럼 온 땅 곳곳을 자유롭게 오가는 활동성을 의미합니다. 6절과 7절은 이러한 역동성대로 병거들이 다양한 방향으로 나아갔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8절은 그 중대한 결과를 보여줍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8 그가 내게 외쳐 말하여 이르되 북쪽으로 나간 자들이 북쪽에서 내 영을 쉬게 하였느니라 하더라 

마지막 환상을 마치며 천사를 통해 주님이 말씀 하신 결론은 북쪽으로 나아간 병거들이 북쪽에서 당신의 영을 쉬게 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이 때, “쉬게 한다.”로 옮긴 원문은 “머물러서 활동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물어야할 것은 왜 다른 곳이 아닌 북쪽에서 들려온 소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기쁘게 쉬셨을까? 하는 질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북쪽에, 지난 날 유다를 멸망시킨 바벨론이 위치해 있었고, 그 바벨론을 뒤엎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귀환시킨 페르시아가 자리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페르시아가 예언자 스가랴가 활동하던 당시 매우 불안정한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따라서 유다백성들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예루살렘 귀환이 실패로 돌아갈 것을 크게 우려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곳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영을 보내시어 백성들을 향한 위대한 계획을 끝내 이루실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는 스가랴서의 마지막 환상을 통해 유다를 위로 하시며 회복시키실 약속입니다.

이것은 또한 우리에게도 분명한 희망을 안겨줍니다. 그것은 이러한 말씀은 오직 주님만이 모든 역사의 주관자이심을 스스로 분명히 밝히신 자기 선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결코 역사 건너편에 숨어 계신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은 절대로 역사에서 이탈한 맹신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철저한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바람과 소망이 어두운 현실에 가로막혀 때때로 험난한 고통을 겪는다 할지라도 함부로 좌절하거나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그 모든 시련의 벽을 넘어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향한 위대한 구원과 승리를 끝내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9~15절은 지금까지 이어온 환상을 마무리 하며 예언자 스가랴가 해야 할 상징적인 행동과 백성들에게 전해야 할 말씀을 담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할 점은 10절에 등장하는 세 사람입니다. 그들은 바벨론에서 돌아왔습니다. 이는 방금 살펴본 바로 앞 단락에 기록된, 하나님의 영이 북쪽에 머물며 활동하신 증거입니다. 스가랴는 주님의 명령에 따라 그들로부터 은과 금을 받아 면류관을 만들어서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머리에 씌웠습니다.

그런 다음 스가랴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을 전합니다. 12절에 보면, 그는 우선 “싹”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주님의 성전을 건축할 것을 예고하였습니다. 이 때, “싹”으로 옮긴 원어는 시편과 다른 예언서에서는 “다윗 왕조”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이 사람은 다윗 혈통을 가진, 유다 1차 포로 귀환을 이끈 지도자인 “스룹바벨”로 이해하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게다가 “스룹바벨”은 고대 중동의 언어 중 하나인 아카드어로는 “바벨론의 싹”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런 판단은 더욱 신빙성을 가집니다.

그런데 13절에 보면 그런 스룹바벨과 지금 스가랴가 면류관을 씌우고 있는 제사장 여호수아가 각기 자기 자리에 앉아 평화의 의논을 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정치 지도자인 스룹바벨과 신앙 지도자인 여호수아의 협력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현실과 이상의 만남을 드러내는 장면입니다. 

유다 사람들이 험난한 바벨론 포로기를 마치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와 성전을 짓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부담을 가진 중대한 역사적 소명이었습니다. 이것은 현실만을 지나치게 의식하거나 순진무구하게 이상만을 좇는다 해서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치열한 현실인식과 올곧은 이상추구가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가능한 민족적 과업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내용을 바탕으로 할 때 15절의 결과가 일어날 것을 약속 하셨습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15 먼 데 사람들이 와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너희가 알리라 너희가 만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진대 이같이 되리라

이러한 약속은 결코 공허한 거짓으로 그치지 않고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이끌었던 제 2, 3차 포로 귀환을 통해 마침내 이루어졌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총독 스룹바벨과 제사장 여호수아의 결합과 마찬가지로, 그 때 역시 총독 느헤미야와 학사 겸 제사장 에스라의 연합과 일치를 통해 주님의 계획이 성취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땅 위에 발을 굳게 디디면서도 하늘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신앙과 현실, 둘 중 한쪽을 배제하거나 소홀히 여기는 것은 절대로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중요한 순간마다 신앙의 지도자와 정치 지도자를 함께 세우셨고 그 둘 사이에 평화의 의논이 있게 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러한 본문 말씀을 마음 깊이 새기며 오늘 우리의 삶 속에 구체적으로 실현해 나가시는 주님의 손길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모두가 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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