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2월 5일 월요일

스가랴 4장 1~14절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

2017년 12월 5일, 화, 삼덕교회 새벽기도회, 목사 정대진
스가랴 4장 1~14절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

1 내게 말하던 천사가 다시 와서 나를 깨우니 마치 자는 사람이 잠에서 깨어난 것 같더라 2 그가 내게 묻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내가 보니 순금 등잔대가 있는데 그 위
에는 기름 그릇이 있고 또 그 기름 그릇 위에 일곱 등잔이 있으며 그 기름 그릇 위에 있는 등잔을 위해서 일곱 관이 있고 3 그 등잔대 곁에 두 감람나무가 있는데 하나는 그 기름 그릇 오른쪽에 있고 하나는 그 왼쪽에 있나이다 하고 4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물어 이르되 내 주여 이것들이 무엇이니이까 하니 5 내게 말하는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이것들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느냐 하므로 내가 대답하되 내 주여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 6 그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7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지어다 하리라 하셨고 8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9 스룹바벨의 손이 이 성전의 기초를 놓았은즉 그의 손이 또한 그 일을 마치리라 하셨나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네가 알리라 하셨느니라 10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사람들이 스룹바벨의 손에 다림줄이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다니는 여호와의 눈이라 하니라 11 내가 그에게 물어 이르되 등잔대 좌우의 두 감람나무는 무슨 뜻이니이까 하고 12 다시 그에게 물어 이르되 금 기름을 흘리는 두 금관 옆에 있는 이 감람나무 두 가지는 무슨 뜻이니이까 하니 13 그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이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느냐 하는지라 내가 대답하되 내 주여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 14 이르되 이는 기름 부음 받은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 앞에 서 있는 자니라 하더라


총 14장으로 이루어진 스가랴서는 1~8장과 9~14장의 두 내용이 나뉩니다. 그 중 전반부인 8장까지는 예언자 스가랴가 바라본 여덟 개의 환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오늘 우리가 읽은 4장은 다섯 번째 환상입니다. 

그런데 여덟 개의 환상 중, 어제 읽은 3장에 기록된 대제사장 여호수아에 대한 내용을 환상으로 볼지 말지를 두고 논란이 있습니다. 그래서 만약 3장의 환상을 제외한다면 총 일곱 개의 환상 중, 오늘 본문은 그 중심에 위치한 네 번째가 됩니다. 그리고 순서를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그 내용자체가 스가랴서가 포로귀환 공동체를 향해 외치고자 하는 말씀의 핵심이라고 과언이 아닙니다.

문제는 이러한 본문 말씀의 구조가 복잡하다는 사실입니다. 방금 같이 읽으면서 한 번에 내용파악하기가 어려우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야기의 짜임새가 균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유념하셔야 하실 점은 거의 대부분의 성경은 한 사람이 한 자리에서 일필휘지로 순식간에 기계적으로 쓰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치열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여러 복잡한 과정을 거쳐 지금 우리 손에 들린, 최종 형태를 갖추었습니다. 따라서 그 안에는 각각 다른 말씀의 층이 있습니다.

본문인 4장의 경우 자세히 보시면 1~5절에는 등잔대과 두 감람나무에 대해 스가랴와 천사가 대화를 나누다가 6절 부터는 갑자기 스룹바벨에 대해 언급하며 어색하게 흐름이 진행됩니다. 그리고 10절 후반부부터 다시 등잔대와 두 감람나무에 대해 말씀합니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본문 5절은 10절 후반부와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해당 구절을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5 내게 말하는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이것들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느냐 하므로 내가 대답하되 내 주여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
10b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다니는 여호와의 눈이라 하니라 

그러므로 이 두 단락 사이에 도드라져 있는 6~10a절은 기존 내용의 보다 분명한 의미를 확실히 강조하기 위해 나중에 추가된 내용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바꿔 말하자면, 굳이 말을 자르면서까지 “꼭 해야 할 말”, “반드시 들려주어야할 말씀”, 스가랴서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약속으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토록 중요한 이 단락은 결국 한 인물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것을 금방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로 “스룹바벨”입니다. 이 사람은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 위대한 섭리가운데 경험한 “제 1차 포로귀환”의 지도자였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그에게 주어진 중요한 사명이 마침내 이루어질 것을 분명히 약속 하셨습니다. 7절 제가 다함께 읽겠습니다.

7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지어다 하리라 하셨고 

그에게 주어진 가장 막중한 책임은 9절을 통해 분명히 확인할 수 있듯이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7절에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될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큰 산”은 곧 주전 586년, 바벨론의 침략으로 무너진 성전의 폐허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뒤이어 곧바로 등장하는 “머릿돌”에 대한 언급을 통해 확실해 집니다. 고대 중동에서 신전을 새로 지을 때 제사장뿐만 아니라 왕이 반드시 참석해야 했고 그 때 옛 성전의 머릿돌을 가져와 새 성전의 터에 놓는 것이 매우 중요한 순서였습니다.

결론적으로 7절 말씀은 산처럼 쌓인 예전 성전의 황량한 잔해를 깨끗이 정리하고 솔로몬 성전의 머릿돌을 내놓아 바벨론의 침략으로 무너졌던 이스라엘 신앙의 중심을 스룹바벨이 다시금 회복시킬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약속의 내용은 당시 국제 정세를 비춰보면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단지 그 시대 흔하디흔한 신전 하나를 재건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바벨론 제국과 그들의 우상에 의해 짓밟힌 이스라엘의 신앙을 다시금 일으키는 과정입니다. 동시에 무너진 나라를 다시 세워 중동의 정치 지형에 지각변동을 가져 오는 사건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명을 진행하는 과정 하나하나를 주변국들이 예의주시하였고 험난한 저항과 방해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중대한 과업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고도의 정치 감각과 탁월한 외교력이 필요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 막중한 책임을 맡은 지도자는 제국의 권력자들과 줄이 닿아있는 인맥을 동원하는 것과 부유층을 설득해 통치 자금을 조달하는 등 지극히 현실적인 방안을 모색하는데 많은 고민의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스룹바벨 역시 분명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민족 전체가 또다시 커다란 위기에 빠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런 그에게 엄중한 경고이자 동시에 위대한 희망의 선언을 6절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다함께 읽겠습니다.

6 그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스룹바벨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힘도 능력도 아닌 오직 당신의 영, 즉 성령님만이 그의 온 몸에 짊어질 중요한 사명을 완성시킬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에게 필요한 현실적인 도움 자체를 부정하신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이 아닌 다른 힘과 능력을 더욱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오판인지를 경고하십니다. 

그리고 이처럼 준엄한 선언은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비록 스룹바벨과 같지는 않더라도 우리는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초석을 놓이며 저마다의 성전을 평생에 걸쳐 완성하는 험난한 사명에 순종하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가정과 학교와 직장에서 다양한 힘과 능력을 바라보고 추앙합니다. 그래서 학벌에 목숨을 걸기도 하고 높은 지위를 얻고 많은 재산을 모으는 일에 열을 올리기도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 모든 힘과 능력들이 때때로 정말 도움이 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분명 잠깐 반짝일 뿐입니다.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진정한 복음과 진리를 바라보지 못하게 눈을 가립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새벽에 기도하며 더욱 구해야 할 것은 오직 주님의 영이신 성령님입니다. 이것은 결코 특별한 은사를 구한다거나 신비로운 체험을 갈망하는 것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단언하건데 그렇게 겉으로 눈에 띄는 화려한 모습들은 성경전체가 전해주는 성령님의 속성에서 지극히 곁가지에 불과합니다.

오히려 오직 성령님만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심을 믿으며 산다는 것은 주님의 최종 구원과 승리를 믿으며 실패와 좌절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것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용기입니다. 그 분명한 예가 바로 스룹바벨입니다. 놀랍게도 6절 말씀의 직접적인 당사자인 스룹바벨의 이후 행적은 성경에서 보이지 않습니다. 그가 성전의 기초를 놓은 것은 사실이지만 에스라 6장 13~22절에 기록된 성전 봉헌식에서 그의 이름은 빠져있습니다.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스룹바벨 개인에 의한 성전 건축은 미완성인 채로,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 속, 하나님의 단호한 약속은 거짓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님의 계획은 한 지도자의 좌절을 넘어 시대를 초월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총 8개의 환상으로 이루어진 스가랴 1~8장을 지나 나머지 9~14장은 마지막 날에 장차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에 대한 묵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중 14장 10절은 온 땅이 “아라바” 같이 된다고 예고 하였는데, 이 때 아라바는 곧 “평지”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폐허로 남은 성전 잔해로부터 이스라엘이 완전히 회복되었음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그러므로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저마다의 성전을 세우며 살아간다는 것은 실패 너머 생생히 살아 숨 쉬는 진정한 승리를 바라보는 것을 뜻합니다. 절망을 지나 비로소 마주하는 희망을 가슴에 품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리하여 삶의 좌절 가운데 쉽게 무릎 꿇지 않고 그 모든 결핍과 한계를 겸손히 인정하고 잠잠히 주님만을 의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로 그러한 선택과 다짐이 성령님과 더불어 십자가에 오르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의 삶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따라서 진정한 성령 충만을 골고다 언덕위에서 우리에게 보이신 주님을 본받으며 힘과 능력을 자랑하며 휘두르는 이 세상의 악한 정신에서 벗어나 포기와 희생의 길을 걸으시길 바랍니다.

비록 그 여정이 순탄하지 않더라도, 때때로 넘어지고 길을 헤맨다 할지라도, 마침내 하나님께서 그 모든 시련의 큰 산을 평지가 되게 하시고 그 위에 당신의 위대한 뜻을 이루어 가시기 때문입니다. 그 놀라운 주님의 손길을 바라보며 오늘 하루도 성령님과 동행하는 모두가 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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