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2월 2일 금요일

디모데 전서 6장 11~16절 “너, 하나님의 사람아”

2017년 7월 26일, 삼덕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디모데 전서 6장 11~16절 “너, 하나님의 사람아”

11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 13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언을 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내가 너를 명하노니 1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15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16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 


다시 한 번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저는 중남교구 담당 목사로 새로 부임한 정대진입니다. 이 귀한 자리에 저를 세워주신 삼위일체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저는 부산에서 태어나 대전에서 자란 후 서울에서 살다가 다시 부산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대구에 오게 되었습니다. “서울-대전-대구-부산”, 어느 트로트 노래 가사와 같은 “경부선 인생”의 정점을 삼덕교회에서 찍게 되어 무척 영광스럽습니다. 저에게 주시는 과분한 사랑에 보답하며 맡은바 사명에 더욱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해 봅니다.


여러분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어떻게 규정하십니까? 설교 준비를 위해 오늘 본문 말씀을 묵상하면서 불쑥 제 어린 시절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제 어머니는 거제도 시골에서 태어나 가난하고 어렵게 자라셨습니다. 그리고 그 시대 기준으로도 매우 이른 나이인 21살에 시집을 가셔서 곧 바로 제 누나를 낳으셨습니다.

그러다가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갑자기 낯선 대전으로 거처를 옮겨서 힘들게 생활을 이어가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인 저에게 많은 기대를 걸으셨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께서는 어린 저에게 이렇게 반복적으로 물어보셨습니다. “아들! 누구 아들이야?”였습니다. 그 때 저는 아직 초등학교에도 가지 않은 무척 어린 나이였음에도 그 질문의 정확한 의도와 정답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매번 이렇게 답을 드렸습니다. “누구 아들이긴? 엄마 아들이지?” 그럴 때 마다 제 어머니는 함박웃음을 지으셨고 저는 그 미소를 지켜드리기 위해 매번 같은 질문에 같은 대답을 하곤 하였습니다.

그렇게 제 기억 속에 자리 잡은 첫 번째 정체성은 “엄마 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를 실망시키지 않는 착한 아들이 되고자 무의식중에 노력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첫 번째 정체성은 자연스럽게 두 번째 정체성으로 이어졌습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 좋은 소년”이었습니다. 강단에서 적절치 않은 말을 해서 죄송합니다. 제 고등학교 친구들의 표현을 빌리면 “교회에 미친 놈”이었습니다. 

저는 어머니를 따라 또래 그 누구보다 열심히 교회에 다녔습니다. 중학교 때부터 주일 예배는 물론이고 수요기도회, 금요기도회 그리고 주일 저녁예배까지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누구보다 크고 열심히 기도했고 성경을 정말 많이 읽었습니다. 그래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제 신앙의 열정만큼은 주위사람들에게 인정받으며 중고등학교 시기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두 번째 정체성은 역시 자연스럽게 세 번째 정체성으로 이어졌습니다. 바로 “신학생”입니다.

저는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어느 수요기도회에서 기도를 드리며 말씀을 전하는 자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과에 수시합격을 하여 20살부터 신학을 공부하였습니다. 따라서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을 “신학생”으로 소개하고, 또 신학생으로 불리며 살아갔습니다. 하지만 앞 선 두 개의 정체성, 즉 “엄마 아들”, 그리고 “신앙 좋은 소년”과 마찬가지로 이 역시 저 자신을 속 시원하게 이해하는 명쾌한 해답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소중한 깨달음을 안겨 준, 다음과 같은 시 한 편을 읽게 되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 디트리히 본 회퍼

나는 누구인가?
남들은 종종 내게 말하기를
감방에서 나오는 나의 모습이
어찌나 침착하고 명랑하고 확고한지
마치 성에서 나오는 영주 같다는데

나는 누구인가?
남들은 종종 내게 말하기를
간수들과 대화하는 내 모습이
어찌나 자유롭고 사근사근하고 밝은지
마치 내가 명령하는 것 같다는데
 
나는 누구인가?
남들은 종종 내게 말하기를
불행한 나날을 견디는 내 모습이
어찌나 한결같고 벙글거리고 당당한지
늘 승리하는 사람 같다는데
 
남들이 말하는 내가 참 나인가?
나 스스로 아는 내가 참 나인가?
새장에 갇힌 새처럼 불안하고 그립고 병약한 나
목 졸린 사람처럼 숨을 쉬려고 버둥거리는 나

빛깔과 꽃, 새소리에 주리고
따스한 말과 인정에 목말라하는 나
방자함과 사소한 모욕에도 치를 떠는 나
좋은 일을 학수고대하며 서성거리는 나
멀리 있는 벗의 신변을 무력하게 걱정하는 나
기도에도, 생각에도, 일에도 지쳐 멍한 나
풀이 죽어 작별을 준비하는 나인데
 
나는 누구인가?
이것이 나인가? 저것이 나인가?
둘 다인가?
사람들 앞에서 허세를 부리고,
자신 앞에선 천박하게 우는소리 잘하는 겁쟁이인가?
내 속에 남아있는 것은
이미 거둔 승리 앞에서 꽁무니를 빼는 패잔병 같은가?
 
나는 누구인가?
으스스한 물음이 나를 조롱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당신은 아시오니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오, 하나님!

이 시는 나치 정권에 저항하며 히틀러 암살 작전에 참가했던 독일의 디트리히 본 회퍼 목사님이 사형 당하기 불과 몇 달 전 감옥에서 쓴 시입니다. 그의 숭고한 삶과 겹치며 더욱 깊은 울림을 주는 이 시는 우리의 올바른 정체성은 다른 사람이 바라보는 나, 혹은 내가 생각하는 나가 아닌 “하나님의 소유”임을 새삼 절절히 깨닫게 해 줍니다.

우리는 평생 “나는 누구인가?” 라는 무거운 질문을 등에 짊어지고 살아갑니다. 인생의 항해를 저마다 “나”라는 이름의 배를 타고 나아가지만 정작 “나”라는, 그 배의 뚜렷한 실체를 잘 모른 채 막막함과 불안함을 가지고 삶을 이어 나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느 노래 가사처럼 “내 안 숨거나 나에게 속으며” 살아갈 때가 참 많이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나는 지금 어디로 가는가?”를 묻는 것 못지않게 “내가 누구인지?”를 쉬지 않고 질문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입니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을 깨닫고 내면 깊이 항상 소중히 간직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따라서 온전히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여기에 진정한 정체성이 있습니다. 존재의 근원이 주님께 있음을 온전히 믿고 고백하는 것, 그리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임을 늘 명심하는 것, 바로 거기에 나 자신을 올바로 이해하는 가장 본질적인 길이 담겨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아들처럼 아끼고 사랑하는 디모데에게 편지를 쓰며 그 끝 무렵에 그를 가리켜 “너, 하나님의 사람아!”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서 유념해야할 점은 이러한 호칭을 듣는 대상인 디모데가 주님을 모르는 불신자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그는 바울의 뒤를 이어 에베소 교회를 섬겼던 젊은 목회자입니다. 따라서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디모데 스스로가 이미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바울이 엄숙하게 이를 강조했던 까닭은 이것이 분명 “거듭 들어야할”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진리를 항상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너무나 뻔하고 식상하게 들릴지라도 이 복음 안에 담긴 놀라운 은혜를 끊임없이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소유가 되도록 자신의 생명을 모두 내던진 예수님의 사랑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사람인 내가 지금 처한 상황과 여건과는 전혀 관계없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존재인지를 날마다 변함없이 고백하시길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이 귀중한 정체성에 담긴 막중한 소명을 깨달아 아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이기에, 온 우주 가운데 유일하게 찬양 받으실 진정한 왕이자 영광의 주님께 속한 사람들이기에 결코 다른 힘과 권력을 숭배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절대로 “성공과 풍요의 사람”이 아닙니다. “인기와 명예의 사람”도 아닙니다. 온 세상을 구하시려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 십자가의 처절한 실패와 절망을 부활의 생명과 희망으로 바꾸신 하나님. 당신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어 가시는 바로 그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바울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사람인 디모데를 향해 다시 오실 예수님의 이름을 걸고 단호한 명령을 내렸습니다. 11~12절 말씀 다함께 읽겠습니다.

11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

이러한 말씀은 “피하라” 그리고 “취하라”, 이 두 개의 동사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먼저 “피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때, 피해야할 대상인 “이것들”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 본문 바로 앞에 기록된 3~10절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 10절 말씀을 새번역 성경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10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좇다가, 믿음에서 떠나 헤매기도 하고, 많은 고통을 겪기도 한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들이 지켜야할 첫 번째 부르심을 명확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돈을 사랑하는 것을 피하는 것”입니다. 오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저는 여러분이 가난하게 사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가난 자체는 결코 미화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현실입니다. 따라서 정당한 방법으로 열심히 노력해서 경제적으로 여유롭게 삶을 누리는 것은 분명 귀하고 선한 일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돈을 사랑하고 추종하는 것” 엄중하게 경계해야 합니다. 설령 아무리 많은 헌금과 기부를 한다 할지라도 삶의 결정적인 순간마다 하나님 대신 돈을 선택한다면 그것은 그 누구보다 돈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필요이상 많은 돈을 움켜쥐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짓밟고 이용하며 심지어 신앙마저도 도구로 사용하려 한다면 그것은 그 무엇보다 돈을 따르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소유에 연연하지 않고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나누는 일에 인색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연약한 우리는 돈을 자기 손에 들고 있으면서도 그 돈에 이끌리지 않고 살아가기가 너무나 어렵습니다. 본문 12절에 기록된 바와 같이 그것은 “믿음의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간혹 저에게 “결혼 하셨냐?”고 물어보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저 스스로 놀랍게도 결혼했습니다. 남들보다 비교적 일찍 평생의 짝을 만나서 7년 넘게 잘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도 제 아내를 향한 사랑이 식지 않는 기적을 날마다 체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간혹 피곤하고 지칠 때마다 불연 듯 철없는 소원 하나가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오곤 합니다. 그것은 아내 없이 혼자 마음껏 쉬는 시간을 가지는 것입니다. 

고독을 즐기는 편이고 또 혼자 잘 노는 성격 탓에 만약에 아내가 원한 다면 얼마든지 돈을 줘서 여행 보내고 싶을 때도 종종 있습니다. 실제로 얼마 전에는 저에게 불쑥 “친정에 며칠 가서 조카도 보고 쉬고 올까?”라고 말하기에 표정관리가 안될 정도로 무척 좋아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에이 귀찮아 그냥 안 갈래”라고 자문자답하는 것을 보고 금세 이루 말할 수 없는 실망감에 사로잡혀 역시나 표정 관리가 안 되기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러다 정말로 뜻하지 않게 작년 추석 연휴에 처가댁에 일이 생겨서 저 혼자 며칠을 집에서 쉬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전부터 꿈꾸었던 대로 영화 대부(The godfather) 3부작을 한꺼번에 연달아 보았습니다. 그 중 대부 3편에서 매우 인상적인 장면이 있었습니다. 진솔하고 훌륭한 성품과 신앙을 가진 람베르토 신부가 주인공인 마이클 꼴레오네와 대화를 나누는 중에 작은 분수로 이동했습니다. 그러더니 그 안에 잠겨 있던 돌멩이 하나를 집어 들고 이렇게 말합니다.

“이 돌을 보십시오. 아주 오랜 시간 물속에 있었지만 물이 전혀 그 안에 스며들지 않았습니다.”
Look at this stone. It has been lying in the water for a very long time, but the water has not penetrated it.

이어서 돌을 깨뜨린 후 이렇게 말합니다.

“보십시오. (이 안이) 완전히 말라있습니다. 같은 일이 유럽 사람들에게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수세기 동안 그들은 기독교에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파고들어 그들 안에 호흡하지 않았습니다.”
Look. Perfectly dry. The same thing has happened to men in Europe. For centuries they have been surrounded by Christianity, but Christ has not penetrated. Christ doesn't breathe within them.

영화를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대부”시리즈에서 가톨릭 성례전이 매우 중요한 배경으로 등장합니다. 주인공이 속한 이탈리아계 마피아는 적어도 공식적이고 외부적으로는 독실한 기독교 신앙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그들은 살인을 비롯한 온갖 범죄를 서슴지 않고 저질렀습니다. 비록 그들은 기독교에 둘러싸여 살긴 했지만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여, 정작 생명의 복음을 자신들 안에 깊숙이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조금 극단적인 예이지만, 이 영화를 보며 오늘날 한국 그리스도인들, 아니 저 자신의 모습을 가슴 아프게 돌이켜 보았습니다. 아주 어릴 때부터 교회에서 뛰놀며 기독교 문화에 젖어 자라 왔고 마침내 목사가 되어 온갖 거룩한 척은 다 하지만 부끄럽게도, 주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생명으로 호흡하며 살아가고, 또 그것을 삶으로 전하는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감히 자신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오늘 본문에 기록된 사도 바울의 위대한 가르침과 달리 여전히 교만하여 자족하지 않고, 돈을 더 사랑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탐욕이 내면을 견고하게 휘감는 담벼락이 되어 하나님 나라의 생명수가 스며드는 것을 가로 막아, 때때로 그 분수 속의 돌멩이처럼 어리석은 완고함에 사로잡혀 살아가곤 하였음을 겸허히 인정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비단, 저만의 이야기가 아닐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행해야할 두 번째 명령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영생을 취하는 것”입니다. 이 때, 성경에서 “생명”을 뜻하는 헬라어 단어가 여럿 있음을 유념해야 합니다. 대표적으로 <프쉬케>와 <조에>입니다. 

먼저 <프쉬케>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육체적 생명”을 가리킵니다. 반면에 한글 성경에서 흔히 “영생”으로 번역되는 <조에>는 쉽게 오해하듯이 막연히 오랫동안 영원히 사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예수님을 죽음에서 다시 일으키신 “진정한 부활 생명” 혹은 “참 생명”이라는 의미에 더 가깝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영생을 취한다.”는 것은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은 진정한 생명을 붙잡고 살아감을 뜻합니다. 더 구체적으로는 우리 안에 살아계신 생명의 영이신 성령님과 함께 호흡하며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이 세상과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을 지켜나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바로 이것을 위해 우리는 구원을 받고 그리스도인으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주님께서는 단순히 교회 안에 많은 사람들을 끌어 모으고, 기독교라는 종교의 힘을 늘려서 권력을 휘두르게 하려고 우리를 살리지 않으셨습니다. 참된 왕이신 하나님의 다스림을 믿고 그 분의 능력과 영광을 바라보며, 비록 소박하지만 의연한 일상의 헌신을 통해 주님의 나라를 이 땅 가운데 넓혀 가도록 당신의 자녀들을 일으켜 세워주셨습니다.


그러한 신앙의 훌륭한 모범이 되는 한 사람을 여러분께 소개하고 싶습니다. 바로 앞서 설교를 시작하며 인용한 시의 저자인 “디트리히 본 회퍼” 목사입니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4년 만에, 우리나라 나이로 22살이라는 매우 젊은 나이에 박사 학위를 받고 무려 24살에 교수 자격 취득한 천재적인 인물입니다. 그래서 그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탁월한 신학자로서 편안하고 여유로운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독일 교회가 광기에 휩싸여 히틀러의 죄악에 동참하고 그를 메시아처럼 숭배할 때, 본 회퍼는 라디오 연설을 통해 나치와 교회를 서슴없이 비판했습니다. 또한 명문 신학대가 아닌, 히틀러를 반대하는 소수의 기독교인들이 세운 “고백교회” 산하의 작은 신학교를 맡아 섬겼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히틀러가 전쟁을 일으키자 독일을 떠나 미국에서 신학교수로 지내며 안전하게 피해 있으라는 제안을 받고 뉴욕으로 건너갔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찾아올 위험을 충분히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민 끝에 다시 독일로 건너갔습니다.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가 다른 그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보여주는 참된 생명의 진리를 온 마음 다해 붙잡았기 때문입니다.

그 후 그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보다 온전히 실현하기 위해 히틀러 암살 계획에 동참하다 나치 정부에 발각되어 독일군이 항복하기 불과 3주전에, 40살의 젊은 나이에 처형당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희생과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독일교회는 전쟁 후, 지난날의 잘못을 처절히 회개하며 자신들의 정체성을 히틀러에 저항했던 “고백교회”에 두었습니다. 

그리고 그 어두운 시대, 담대히 십자가 본연의 길을 걸었던 본 회퍼를 진심으로 추모하며 그의 위대한 뜻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그는 단지 독일 교회만의 위대한 순교자로 기억되지 않고 맹목적인 탐욕과 폭력의 함성에 위협 당했던 참 생명의 복음을 지킨, 20세기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전 세계의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에 대해 많이 아는 사람, 혹은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를 열심히 하는 사람이기 보다는 오늘날, 주님께서 찾으시는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 위대한 소유격의 사랑 안에 온 마음 다해 안기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정체성 아래서 온전한 믿음을 지켜나가는 참된 헌신과 굳건한 다짐을 계속 이어나가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동시에 절대로 잊지 마시길 원합니다. 그 선한 싸움에 주님께서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고 끝내 승리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져 우리를 이미 소유하셨습니다. 그렇게 우리를 붙잡으시며 생명 깊숙이 찾아오신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진정한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모두가 되길 진심으로 소망하며 축복합니다.


설교 후 기도
능력과 영광의 하나님
오직 주님만이 우리가 섬기고 따를 진정한 왕이심을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오랜 시간 복음의 분수 안에 잠겨 살았지만 정작 그 물결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어리석은 욕망을 회개합니다. 불쌍히 여기시고 참된 부활생명으로 호흡하며 교만하지 않고 탐욕을 멀리하여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를 온전히 소유하시려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생명을 기꺼이 내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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