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2월 3일 토요일

마가복음 9장 2~9절 “산 위에서 산 아래로”

2018년 2월 2일, 삼덕교회 금요기도회 설교,  정대진 목사
마가복음 9장 2~9절 “산 위에서 산 아래로”

2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3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 4 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 예수와 더불어 말하거늘 5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6 이는 그들이 몹시 무서워하므로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함이더라 7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8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뿐이었더라 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경고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혹시 야구 좋아하십니까? 야구 경기에서 1,2점차의 긴박한 승부를 매듭짓는 투수를 가리며 “마무리 투수”라고 부릅니다. 현재 활동 중인 우리나라 마무리 투수 중에 삼성 라이온즈 출신의 오승환 선수를 저를 비롯한 많은 분들이 최고로 인정합니다.

그런 오승환 선수가 지난 2013년 5월에 했던 인상적인 인터뷰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 때 그는 가벼운 부상으로 이례적으로 이틀간 휴식을 가졌습니다. 그를 대신해 그 해 데뷔한 신인인 심창민 선수가 등판해서 첫 날은 아쉽게도 승리를 놓쳤지만 이튿날에는 무사히 세이브에 성공했습니다.

마침 심창민 선수는 오승환 선수의 룸메이트이기도 한데, 이미 전설이 된 선배인 그는 까마득한 후배를 이렇게 다독였다고 합니다. “마운드에서 다른 생각을 할 줄 알아야한다.” 경험이 없는 어린 투수가 긴박한 마무리 상황에서 마운드에 올라 상대편의 노련한 타자와 수 싸움을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대부분은 포수의 글러브만을 보고 공 던지기에만 바쁩니다.

하지만 오승환 선수는 반대로 가야한다며 이렇게 말합니다. “전날 실패 했다면 그것이라도 떠올릴 줄 알아야한다. 다른 생각을 한다는 것은 여유가 있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터뷰 기사의 마지막 단락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오승환도 마운드에 오르면 알게 모르게 ‘딴 짓’을 한다. 오승환의 습관은 이따금 먼 곳을 바라보는 것이다. 오승환은 ‘공을 받아들고 한번쯤 경기장 밖을 쳐다보곤 한다. 먼 곳을 바라보면 포수가 가까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고 했다. 오승환이 ‘최고의 직구’를 던지는 비결 중 하나다.”

이러한 기사를 읽으며 야구 외적으로도 여러모로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삶의 치열한 문제에만 골몰해서는 결코 그것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따금씩 여유를 가지고 먼 곳을 바라보는 것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더욱 정확히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영광에 눈길을 옮길 때, 이 땅에서의 숱한 갈등을 이겨낼 용기와 힘을 얻게 됩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 속 제자들의 상황이 이와 매우 흡사합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12제자들 중 당신과 특별히 더 가깝게 지냈던 세 명의 제자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본문이 그들의 이름을 기록한 방식입니다. 우리말 번역에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신약 원문을 보면 제자들 각각의 이름 앞에, “정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헬라어 정관사는 뒤에 수식하는 명사와 함께 문법적인 형태가 변화되는 특징을 가집니다. 그래서 그 대상의 상태를 보다 명확히 드러내는 역할을 합니다. 따라서 2절 앞부분을 좀 더 원문에 가깝게 직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엿새 후에 예수께서 “그를” “베드로를”, 그리고, “그를” “야고보를”, 그리고 “그를” “요한을” 데리시고 높은 산으로 가셨다.

그렇다면 마가복음의 저자는 왜 본문에서 다른 장면들과는 달리 이런 독특한 방법으로 제자들의 이름을 굳이 명확히 강조해서 언급했을까요? 그것은 바로 앞에 기록된, 6일 전에 있었던 매우 중요한 사건과 본문 말씀이 매우 긴밀하게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 질문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당신이 고난을 겪으시고 죽임 당하신 후에 다시 살아나신다는,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비로소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이 대화는 복음서 전체에서 무척 중요한 장면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주님의 말씀은 제자들에게 굉장한 충격을 안겨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셔서 왕좌에 오르시면 자신들은 그 곁에서 호의호식하리라 기대했던 부푼 꿈을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발언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그때 얼마나 놀랐고 또 불쾌했던지 불과 조금 전에 주님은 그리스도시라는 위대한 고백을 했던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잡고 따질 정도였습니다.


마가복음 9장 2절은 예수님께서 바로 “그” 베드로는 물론이고 곁에서 동조한 “그” 야고보와 “그” 요한을 데리고 산에 오르셨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6일 전의 그 긴장과 갈등이 여전히 본문 말씀 아래에 도도히 흐르고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한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어색함과 서운함 가운데 높은 산 위에 오르시고 어떤 모습을 보이셨을까요? 3절 말씀 다함께 읽겠습니다.

3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

산 위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주님의 변화를 3절에서 구체적으로 묘사하며 아무리 깨끗이 빨래해도 나올 수 없는 찬란한 빛이 예수님으로부터 뿜어져 나왔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여기서 “광채”로 옮겨진 헬라어 <스틸본타>는 신약성경에서 단 한 번, 본문 말씀에만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정리 하자면, 예수님께서는 그 모습이 제자들 앞에서 완전히 변하셨는데 그 때 주님으로부터 발하는 빛은 흔히 볼 수 있는 일반적인 광선이 아니라 신약성경의 다른 그 어떤 단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너무나 신비롭고 아름다운 광채였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변화된 예수님 곁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습니다. 4절 말씀 다함께 읽겠습니다.

4 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 예수와 더불어 말하거늘

이 때, 구약의 수많은 위대한 인물들 가운데 굳이 “모세”와 “엘리야” 이 두 사람이 함께 나타났다는 사실이 굉장히 의미심장합니다. 왜냐하면 둘 다 구약에서 진정한 메시아를 드러내는 결정적인 증인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신명기 18장에 따르면 모세는 하나님께서 훗날 자신과 같은 예언자를 이스라엘 가운데 세우실거라고 예고했습니다. 실제로 이 말씀에 따라 하나님께서 수많은 예언자들을 백성들 가운데로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와 같은 참된 예언자가 자신들 사이에 나타날 것을 여전히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세가 다시 나타나 하나님의 풍성하고 온전한 뜻을 명확하게 드러내 보여줄 것을 간절히 기대 하였습니다.

엘리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말라기 4장 5절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훗날 그들에게 “엘리야”를 보내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와 마찬가지로 엘리야 역시 언젠가 그들 곁에 다시 오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엘리야가 메시아의 오심을 바르게 알려줄 거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주님 오실 길을 예비한 세례자 요한을 가리켜서 “엘리야”라고 기록했습니다.

이렇게 “모세와 엘리야”는 참된 메시아가 누군지 똑똑히 알려주기 위해 언젠가 다시 나타나리라고 오랫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간절히 기다리고 기다렸던 예언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마침내 제자들 앞에, 그것도 이 세상에 다시없을 화려하고 찬란한 광채를 비추시는 예수님 곁에서 분명히 나타났습니다.

이것이 과연 그들에게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수님께서는 왜 당신의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도리어 화를 내고 원망을 쏟아 놓은 그 어리석은 제자들, 그 베드로와 그 야고보와 그 요한을 데리고 산으로 가셔서 이 놀라운 관경을 보여주셨을까요? 그것은 그들의 의심과 실망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분명히 예언자들이 수 천 년 간 외쳤던 바로 그 메시아임을,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영광 가운데 드러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의 연약한 믿음을 다시 일으켜 세워 경배를 받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믿고 알아갈 때, 늘 기쁘고 즐거울 수만은 없습니다. 만약 그렇다고 말한다면 그건 거짓말입니다. 복음의 핵심인 십자가는 사람들의 욕망과 정면으로 부딪히며 언제나 모든 이들을 불편하게 하고 당황시키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고난과 죽음을 말씀하시는 예수님께 거칠게 따져 물었던 베드로의 모습은 우리 모두의 솔직한 마음을 대신한 행동이라고 해도 과히 틀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바로 “그 제자들”에게 당신의 참되고 찬란한 영광을 드러내신 주님을 따라 우리역시 산 위로 올라가야 합니다.

산 밑에서는 결코 넓고 멀리, 제대로 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서 있는 곳의 정확한 위치와 풍경을 온전히 알기 위해서는 더 높은 산 위로 올라가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저마다의 문제들을 마냥 끌어안고만 있고 여러 혼란들 속에 가만히 앉아만 있어서는 절대로 그 모든 어려움과 갈등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일상의 자리에서 잠시 벗어나, 아름답게 빛나는 주님의 영광을 묵묵히 바라보아야 합니다.

바로 이것을 위해 우리는 매 주일마다 신명으로 신명나게 예배의 자리에 모입니다. 물론 예배한다고 해서 당장 눈앞에 신비로운 일들이 화려하게 펼쳐지지 않습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이 예배당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배는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신비로 말미암아 2천년 위대한 역사를 통해 다듬어진 소중한 은총의 도구입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말씀과 기도와 찬양으로 고백하며 우리의 삶을 초월하시는 주님의 사랑과 뜻을 믿음의 공동체 가운데 함께 바라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므로 예배를 더욱 소중히 여기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이 예배를 통해 다른 곳에서는 결코 마주할 수 없는, 복음의 생명을 온전히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꼭 주일이 아니더라도 매일 저마다의 영광의 산 위에 오르시길 바랍니다. 비록 저마다의 분주한 삶 때문에 분명 쉽지 않겠지만 지금 이 순간 그러하시듯이 매주 금요기도회에 함께 모여 부르짖는 뜨거운 기도와 찬양의 시간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또한 바쁜 일상 속에 어렵더라도 수요기도회는 물론이고 새벽기도회를 사모하며 참석하시길 권하고 싶습니다. 우리 각자는 너무나 연약하지만 교회 공동체를 통해 함께 모여 주님을 바라볼 때 거기에 놀라운 은혜의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또한 반드시 교회가 아니더라도, 주님의 구원을 묵상할 수 있는 자신 만의 안식의 장소를 갖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합니다. 제 경우, 혼자 여유롭게 도보여행 하는 것을 참 좋아합니다. 경치 좋은 자연 속을 한참 걷다보면 복잡한 생각들이 어느 정도 정리되고 하나님의 섭리와 창조질서를 충분히 묵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교회 “도시의 광야”처럼 예쁜 카페에 앉아 좋은 커피나 차를 마시며 성경을 읽는 것도 우리의 영혼에 정말 유익한 일입니다. 그마저 어렵다면 매일 단 1분이라도 핸드폰을 잠시 꺼두고, 방에 들어가 혼자 조용히 주님의 영광을 묵상하시길 권합니다. 단언하건데, 그러한 저마다의 영적 산 위의 시간들이 여러분들의 내면을 참으로 건강하고 풍요롭게 할 줄 믿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산 위를 향해야” 한다는 진리와 동시에 반드시 명심해야 할 점은 주님께서는 우리가 “산 위에만” 머물러 있는 걸 원치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5-6절 말씀 다함께 읽겠습니다.

5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6 이는 그들이 몹시 무서워하므로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함이더라

예수님의 놀라운 광채와 그 곁에 선 모세와 엘리야를 바라본 베드로는 도저히 흥분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영광스런 산 위에 함께 있는 것이 좋다고 하면서 주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위해 각각 천막을 치고 거기에 계속 머물러 사는 게 어떠냐고 예수님께 건의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 하나님께서 구름 가운데 나타나시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순간, 제자들의 눈앞에 펼쳐졌던 신기한 관경들이 사라졌습니다. 이어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마음 깊이 진정 담아 두어야할 진리를 당신의 행동으로 보여주시고 말씀으로 일러주셨습니다. 9절 말씀 다함께 읽겠습니다.

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경고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산 위에 계시지 않으시고 제자들을 데리고 산 아래로 내려오셨습니다. 그러시면서 당신이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기 전까지 그들이 그곳에서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경고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예수님의 행동이 쉽게 이해되십니까? 한 번 상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그 모습 그대로 영광스런 찬란한 광채에 둘러 싸여 산 위만 줄곧 계신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렇다면 예수님은 더 이상 가난하고 힘들게 살 필요 없이 사람들의 찬양과 경배만을 받으며 얼마든지 편하고 여유롭게 살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님께 전혀 손해가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굳이 산 아래로 내려 가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본문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사건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가복음 9장 17~18절 말씀 제가 읽겠습니다.

17 무리 중의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말 못하게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 18 귀신이 어디서든지 그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해지는지라 내가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달라 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산 아래로 내려갔을 때 마주한 사람은 바로 귀신들려 극심한 고통에 시달려야 했던 한 아이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소년으로부터 귀신을 내쫓으셨습니다. 바로 여기에 예수님께서 산 위에서, 산 아래로 내려가신 이유가 있습니다. 산 아래로 가야만 그 곳에 있는 귀신들린 어린 아이처럼 주님이 필요한 힘들고 지친 사람들 곁에 함께할 수 있고, 산 아래로 가야만 십자가를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그림 하나를 여러분께 소개하고 싶습니다. 이 그림은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인 라파엘로 산치오의 유작 “그리스도의 변모”(Transfiguration, 1518-20) 입니다. 


이 작품은 오늘 본문에 묘사된 주님의 찬란한 변화를 웅장한 화법으로 묘사하였습니다. 여기서 눈여겨 볼 점은 그가 단지 예수님의 영광만을 그리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아래쪽 우편을 자세히 보시길 바랍니다. 확대한 그림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라파엘로는 변화산 사건의 본질을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산 위에서 보이신 주님의 광채와 산 아래, 귀신들린 소년의 고통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명확히 이해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두 사건을 한 화폭에 동시에 담았습니다. 두 장면이 하나로 합쳐질 때에만 본문에 담긴 진리의 양면이 가지는 조화와 균형의 의미를 비로소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거듭 바라며 당부합니다. 주님의 찬란한 영광을 소망하며 금요기도회와 주일 예배를 비롯한 저마다의 영적 산 위에 올라 하나님의 신비를 경험하는 것을 소중히 여기시길 바랍니다. 바로 거기에 우리의 영혼을 살리는 참된 생명의 길이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주님께서는 우리가 산 위에만 머물러 있는 것을 결코 원치 않으심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렇다면 절대로 예수님과 더불어 십자가를 질 수 없고,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 세상 가운데 실현하고자 하시는 하나님 나라를 온전히 넓힐 수 없는 까닭입니다.

반드시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예배를 사모하며 교회 안에 모이는 이유는 더욱 당당히 교회 밖을 향해 흩어지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사람들을 향해 참된 사랑의 말을 나누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성경을 묵상해야 하는 이유는 그 말씀을 저마다 삶의 언어로 바르게 번역하기 위함입니다. 

숨 가쁘게 흘러온 승부를 매듭짓기 위해 마운드 위에 서 있는 투수가 좀 더 좋은 공을 던지기 위해서 때때로 멀리 하늘 위에 눈길을 둘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아서는 안 됩니다. 좀 더 먼 곳에 시선을 둔 궁극적인 목적은 또 다시 포수의 글러브를 응시하고 그 곳을 향해 전력투구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우리는 산에서 내려가기 위해 올라가는 사람들입니다. 만약 이 소중한 진리를 잊어버린 채 산 아래에만 주저앉아 있거나 산 위에만 멈춰 있다면 그것은 마치 십자가 없는 부활, 혹은 부활 없는 십자가처럼 철저히 뒤틀리고 그을린 병든 신앙에 사로잡혀 있음을 뜻합니다.


사랑하는 삼덕교회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크고 넓은 뜻을 더욱 알아감으로 당황해하고 힘겨워하는 우리를 산 위로 이끄시어 놀랍고도 위대한 영광을 보여주는 분이심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따라서 온 우주 가운데 유일한, 주님만의 찬란한 빛이 머무는 예배의 자리를 향해 눈길을 두시길 바랍니다. 

동시에 그 빛을 가슴 깊이 품고 산 아래, 가난하고 연약한 이들을 향해 나아가시길 소망합니다.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 위에 오르신 후, 부활하신 몸으로 산 아래 제자들을 향해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보내신 성령님이 그런 우리의 모든 걸음 가운데 언제나 함께하시고 날마다 선한 길로 이끌어 주실 줄 믿습니다.


마무리 기도
영광의 하나님
예수님만의 유일한 광채를 사모하고 주님만을 바라보며 저마다 드리는 예배의 산 위에 오르기 원합니다. 동시에 산 위에만 머무르고자 하는 우리의 어리석음을 바로 잡아주시고 산 아래, 주님의 사랑이 필요한 이들을 향해 기꺼이 내려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산 아래로 내려가기 위해, 산 위로 오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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