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2월 5일 월요일

사도행전 9장 10~19절 "아나니아가 그 집에 들어가서"

2018년 1월 22일, 월, 삼덕교회 새벽기도회, 목사 정대진
사도행전 9장 10~19절 "아나니아가 그 집에 들어가서"

10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11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
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12 그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13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14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 하거늘 15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19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우리는 매일성경의 읽기표를 따라 새해를 맞아 1월 1일부터 사도행전을 읽어가고 있습니다. 조금 거칠게 정리하자면 이 책의 주인공은 베드로와 바울입니다. 전반부는 베드로를 중심으로, 후반부는 바울을 중심으로 사도행전의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다는 점을 쉽게 이해하실 겁니다. 따라서 사도행전 전체에서 가장 극적인 사건은 바로 바울의 회심입니다. 

바울은 지중해 항구도시 다소 출신으로서 날 때부터 로마 시민권까지 획득할 정도로 국제적인 분위기에서 자랐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철저한 정통 랍비교육을 받았습니다. 때문에 그 당시 유대교의 차세대 지도자로서 많은 촉망을 받고 있습니다. 그는 그런 기대에 부응하며 정통 유대교의 입장에서 혐오스런 이단이었던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데 앞장섰습니다. 그런데 그러던 그가 주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완벽한 변화를 겪었습니다. 

이와 같은 바울의 회심 사건에는 그 이전과 이후에는 볼 수 없었던 중요한 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바로 “아나니아”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다 풍성히 이해하는 길은 주인공 못지않게 조연들을 주목하는 것입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나니아를 중심으로 바울의 회심을 바라볼 때, 그를 통한 하나님의 풍성한 뜻과 계획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됩니다.


사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눈이 멀기 전, 본래 가려고 했던 도시인 다메섹에 방금 말씀드린 “아나니아”라는 이름을 가진 제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주님께서 환상 중에 아나니아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이때 주목해야할 것은 바로 그의 반응입니다. 10절 후반부를 보면 그는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이것은 신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반응하는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가령 창세기 22장 1절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려고 부르셨을 때 그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사무엘 역시 어린 시절 성전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엘리 제사장에게로 가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또한 예언자 이사야는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고 하고 한숨짓는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말했습니다.

반면 사울은 교회를 핍박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예수님으로부터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라는 질문을 들었을 때, “주여 누구시니이까?”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렇듯 주님의 부르심 앞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답하는 것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간극이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그리스도의 제자와 박해자의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 각자의 이름을 부르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부름에 대한 태도를 통해 이 순간 저마다의 믿음을 점검할 수 있습니다. 부디 오늘 하루도 주님의 부르심 앞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순종의 답을 드리는 모두가 되길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이렇듯 아나니아가 하나님의 음성 앞에 즉시 응답하였지만 그런 그를 향한 주님의 명령은 도무지 상상조차 못했던 두렵고 떨리는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바로 “직가”, 즉 “곧은 길”이라는 이름을 가진 동네로 가면 다소 사람 사울이 눈이 먼 체 기도하고 있는데 그런 그에게 안수해서 눈을 다시 뜨게 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본문에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이 때 아나니아는 끊임없이 되물었을지 모릅니다. “사울이요? 정말 그 사울 말씀하시는 것 맞습니까?” 왜냐하면 13, 14절에 적힌 아나니아의 말처럼 그동안 사울은 수없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가두었을 뿐만 아니라 대제사장의 승인까지 얻어서 더욱 기세등등하게 눈에 불을 켜고 교회를 추적하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다 생생하게 이해하는 중요한 방법은 바로 상상력을 가지고 읽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눈앞에 묘사된 아나니아의 상황은 단지 몇 줄의 문장에 지나지 않지만 그 행간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그의 당황스러움과 공포가 담겨 있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극히 소수에 불과했던 그 시대 교인들 중에 사울이 감옥에 넣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죽음에 이르게 한 사람 중에 아나니아가 알던 사람이 없었겠습니까? 너무나 당연하게도, 그와 가까운 수많은 사람들이 사울로 말미암아 크나큰 어려움을 겪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아나니아에게 있어 사울은 도무지 용서할 수 없는 원수였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비록 지금 사울이 눈이 먼 상태로 숨죽어 있다고는 하지만 좀 더 교활한 방법으로 교회를 핍박하기 위한 속임수로 볼 수 도 있는 상황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런 그에게로 가는 것은 아나니아로서는 자기 스스로 사자의 입에 머리를 들이미는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끝내 아나니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사울에게로 향했고 안수하여 그의 눈을 뜨게 하였습니다. 그라고 해서 주저함이 없었겠습니까? 그에게도 번민과 갈등이 없었겠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가 그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며 담대히 주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전할 그릇인 바울이 본격적으로 자신의 사명을 시작하였습니다.


반드시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이 시대에 주님의 뜻을 이루며 산다는 것은 이와 같은 희생과 손해를 감수하는 일입니다. 내 감정을 다 지킨 채로는 결코 복음을 전할 수 없습니다. 때때로 이루 말할 수 없는 답답함과 억울함을 견뎌낼 때, 당연히 내 손 안에 쥘 수 있는 권리들을 기꺼이 포기할 때 그제야 비로소 하나님 나라 복음이 우리를 통해 찬란히 뻗어나가기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몸소 십자가 위에서 그 부르심을 철저히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복음은 그렇게 저마다의 십자가를 묵묵히 지고 인내와 순종의 길을 걷는 이들로 말미암아 회복되고 전파됩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행전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진리의 핵심입니다.

교회 역사에 길이 남는 위대한 목회자이자 신학자이자 선교사인 사도 바울의 극적인 회심은 아나니아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그가 그 이전에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이 후에 어떤 행적을 남겼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는 그저 주어진 자신의 삶의 자리를 잠잠히 지키며 하나님의 뜻에 집중하였을 뿐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런 그를 사용하셔서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그림을 그러가셨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또한 지금 이 자리에서 이 시대의 아나니아를 찾고 계십니다. 모든 사람들이 바울로 살 수 없습니다. 모두가 바울과 같은 비중과 유명세를 가지고 복음을 전할 수 없습니다. 아나니아와 같은 조연이 있어야 바울과 같은 주연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아나니아와 같은 이름 없는 일꾼들이 있을 때에만 예수님의 복음은 십자가의 길을 통해 온 세상에 뻗어나갈 수 있습니다. 이러한 복음의 생명 앞에 오늘 하루도 순종과 섬김의 삶을 살아가는 모두가 되시기를 간절히 바라며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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