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2월 5일 월요일

룻기 성경공부(1) - 1:1~6

삼덕교회 신혼부부모임 성경공부(18.01.28)

성경: 룻기 1장 1-6절
1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 2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의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의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더라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살더니 3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의 두 아들이 남았으며 4 그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그들의 아내를 맞이하였는데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요 하나의 이름은 룻이더라 그들이 거기에 거주한 지 십 년쯤에 5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 6 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이에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1. 룻기 서론

1) 다윗 왕조의 배경
룻기 4장 끝부분에 보면 룻과 보아스가 낳은 아들 오벳이 곧, 다윗의 할아버지라는 사실을 두 번씩이나 반복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는 룻기 이야기가 단지 하나의 작은 일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윗 왕조의 정체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그는 바벨론 포로기와 같은 크나큰 민족의 위기에 특별히 그 누구보다 그리워했던 왕입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그런 다윗은 메시아의 조상이자 예표 하는 인물로 여겨졌다는 사실입니다. 

2) 구약 신앙의 개방성
많은 사람들이 구약성경을 폐쇄적이고 편협한 책으로 오해합니다. 물론 구약 성경 안에서, 그런 오해를 불러일으킬만한 내용이 담겨 있는 것은 분명 사실입니다(율법서의 일부, 느 13:23~25). 하지만 구약에는 이와 대비되는 개방적인 내용이 담겨 있고 룻기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이 책의 제목인 <룻기>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룻기의 초점과 관심이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전통적 유대신앙에 의하면 짐승과 같은 모압 출신의 가난하고 어린 과부 룻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람들과 제도에 의해 돌봄 받고 메시아의 조상이 되었는지를 알려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광대하며 신실한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2. 본문이해

1) 죄 없는 모압 이주(1,2절)
1,2절 말씀은 룻기의 시, 공간 배경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 아직 왕이 세워지지 않고 사사들이 다스리던 때였습니다. 유다 베들레헴에 살던 한 사람, 엘리멜렉은 자신의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을 데리고 모압 지방으로 이사를 가서 기약없이 거기 머물러 살 것을 결심합니다. 이 때, “거류”하다로 옮긴 히브리 단어는 “외국인으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모압 지방 본토인들과 동등한 권리와 대우를 받지 못한 채 그들이 허락한 권한과 신분 안에 만족하며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이스라엘 땅에 흉년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가족이 굶주림으로 괴로워하는 것을 엘리멜렉은 가장으로서 도저히 두고만 볼 수 없었습니다. 때문에 그는 고심 끝에 모압 이주를 결심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룻기 이야기는 출발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대한 해석에서 룻기 전체에 대한 이해가 갈립니다. 

전통적으로 엘리멜렉이 “빵의 집”이란 뜻을 가지고 훗날 예수님께서 태어나시는, 고향 베들레헴을 떠나 이방 지역으로 이사한 것을 두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 타락한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물론 충분히 그렇게 볼 여지가 있습니다. 구약의 고전적 신앙은 하나님의 임재를 언약궤가 모셔진 지성소를 중심으로 한, 예루살렘과 이스라엘 땅으로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약속의 땅인 이스라엘을 벗어나 이방신을 섬기는 외국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는 것은 전통적인 유대교신앙 관점에서 보면 죄악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구약성경 전체의 숲과 흐름을 놓친 아쉬운 해석입니다. 2절에서 구체적으로 묘사되듯이, 엘리멜렉의 출신을 ‘유다 베들레헴’이라고 한 이유는 ‘장소’에 목적이 있는 게 아닙니다. 그가 유다지파 안에서 작은 족속 중 하나인 ‘에브랏’사람임을 소개하고자 함입니다. 이는 자연스럽게 룻기를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출신 중 가장 유명한 “이새”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며 이를 통해 결말에 등장하는 다윗과의 관계를 암시하려는 의도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다윗의 일화 중 우리가 기억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다윗이 사울을 피해 도망 다닐 때 자신의 부모를 ‘모압 왕’에게 맡긴 일입니다(삼상 22:3-5). 여기에 더해 모압과 싸우지 말라는, 신명기 2장 8-9, 28-29절 말씀을 살펴볼 때, 이스라엘 왕국 초기와 본문의 배경이 되는 사사시대에 이스라엘과 모압이 가까운 사이였음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룻기는 엘리멜렉 가족이 고향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으로 이사 간 것을 결코 부정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있음을 유념하셔야 합니다. 그제야 우리는 하나님을 편협하게 이해하지 않고 우리 삶의 눈물을 돌아보시는 분임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삶의 어려움으로 부득이 율법에서 벗어날 때 그것을 질책하지 않으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가정의 힘겨운 상황으로 눈물 흘릴 때 창백한 신앙의 저울을 내밀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절둑거리며 삶의 걸음을 내딛을 때 낡은 신앙의 질서를 스스로 무너뜨리며 지친 어깨를 일으켜 세우시는 분이심을 반드시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장 잘 아시기에 결코 무심한 다른 이들처럼 함부로 판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2) 비극의 한 복판에서 새롭게 된 정체성(3~5절)
엘리멜렉 가족은 기대와 불안 속에 모압지방으로 이사했지만 그곳에서의 삶은 아픔과 눈물의 연속이었습니다. 먼저 든든한 가장인 엘리멜렉이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두 아들 말론과 기룐 역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지금 우리보다 훨씬 일찍 결혼하는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두 아들의 자녀가 언급되지 않은 것을 보면 아직 많이 젊은 나이에 숨을 거둔 것이 분명합니다.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취급하며 공공연히 차별과 학대를 자행했던 고대 중동사회에서 과부로 살아간다는 것은 극한의 어려움을 의미합니다. 일반적으로 룻기를 읽을 때 나오미에게 비극이 찾아온 까닭은 원인이 두 아들이 모압 여인과 결혼하는 것을 허용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 가족의 모압 이주를 비난하는 것처럼 룻기는 물론 구약의 커다란 흐름에서 보면 적절하지 못한 해석입니다. 

나오미의 아들이 모압 여인과 결혼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일이라면 룻기 자체가 기록될 의미가 없는 감추어야할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허나 도리어 룻기는 다윗의 증조할머니가 모압 여인임을 명백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본문 속, 남겨진 여인들의 비극을 접하며 해야 할 올바른 마음가짐은 함부로 그들을 판단하거나 가르쳐드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아파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동시에 이 비극의 상황 속에서 빛을 발하는 나오미를 향한 시선의 변화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 2절에 보면 주인공 가족을 가장인 엘리멜렉을 중심으로 하여 이렇게 소개합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의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의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 남성 중심사회에서의 지극히 일반적인 서술방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인 3절은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의 두 아들이 남았으며’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3절 말씀을 ‘엘리멜렉이 죽고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이 남았으며’라고 적어도 내용 전달에 전혀 무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 때부터 나오미는 룻기에서 더 이상 ‘엘리멜렉의 아내’로 소개되지 않습니다. 이로써 나오미는 가부장적인 사회의 낡은 가치관을 뒤 엎는 생의 주체로 룻기에 당당히 등장하게 됩니다.

3) 자기백성을 돌보시는 하나님(6절)
절망에 빠져 있던 룻에게 마침내 희망어린 소식이 들려옵니다. 그것은 모압 이주의 원인이 된 베들레헴의 기근이 그치고 풍년이 찾아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를 룻기 저자는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라는 문학적인 필체로 묘사합니다. 나오미는 이러한 기쁨 소식에 반응했습니다. 그는 이 소식이 남의 일인양 무관심하며 절망의 자리에 그냥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살리는 그 복된 소식이 과감히 그늘진 삶의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그녀가 자신이 하나님께서 돌보시는 하나님의 백성임을 잊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습니다. 때때로 우리에게 흉년이 찾아올 때, 저마다의 엘리멜렉과 말론과 기룐을 떠나보낼 때, 억울하게 비난 당할 때, 하나님께서 언제나 우리를 돌보십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건 무얼 하건, 하나님의 율법을 철두철미하게 지키는 것과 관계없이 하나님께서는 항상 당신의 백성들을 사랑하시며 돌보신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3. 묵상 질문
1) 생계 때문에 부득이 신앙에 타협을 했던 적은? 신앙의 원칙과 현실의 적용 사이에 갖추어야할 균형은?

2) 고난 받는 다른 사람의 신앙을 함부로 의심 했던 경우를 반성해 봅시다. 그리고 그런 정죄가 왜 위험한지를 나누어 봅시다.

3) 나오미에게 주어진 정체성의 변화처럼 고난 중에 자신의 정체성을 건강하게 회복했던 경험을 나누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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