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덕교회 신혼부부모임 성경공부(18.02.02): 룻 1:7~19a
1. 들어가며
룻기의 첫 장면(1:1~6)은 ‘남편과 아들의 죽음’이라는 극한의 절망을 보여줍니다. 이어지는 두 번째 장면을 그러한 비극 속에서 각 인물의 결단을 드러냅니다. 이를 통해 첨예한 긴장 속에서 더욱 드러나는 숭고한 희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2. 나오미의 첫 번째 권유와 며느리들의 대답(7~10절)
7 나오미가 살던 곳을 떠날 때에, 두 며느리도 함께 떠났다. 그들은 유다 땅으로 돌아가려고 길을 나섰다. 8 길을 가다가,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제각기 친정으로 돌아가거라. 너희가, 죽은 너희의 남편들과 나를 한결같이 사랑하여 주었으니, 주님께서도 너희에게 그렇게 해주시기를 빈다. 9 너희가 각각 새 남편을 만나 행복한 가정을 이루도록, 주님께서 돌보아 주시기를 바란다." 나오미가 작별하려고 그들에게 입을 맞추니, 며느리들이 큰소리로 울면서 10 말하였다. "아닙니다. 우리도 어머님과 함께 어머님의 겨레에게로 돌아가겠습니다."(새번역 성경)
나오미가 모압에서의 신산辛酸한 삶을 정리하고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가자 며느리들도 자연스럽게 함께 따라 나섰습니다. 그 여정 중 나오미는 이러한 걸음이 두 여인에게 미칠 커다란 손해와 고난을 자각하였습니다. 따라서 그는 그들이 친정으로 돌아가 새로운 가정을 이루어 행복하게 살길 축복합니다. 이 때 분명히 드러나는 것은 시어머니와 남편을 향한 두 여인의 한결같은 사랑(8절)입니다. 나오미는 그 사랑을 당연히 여기지 않았고 자신의 편의가 아닌 며느리들의 앞날을 우선으로 여기며 작별하였습니다. 그들 역시 이러한 진심에 진심으로 응답합니다. 그들은 큰 소리로 울며 “어머님과 함께 어머니의 겨레”로 돌아가 나오미를 도우며 함께 어려움을 이겨내는 고난의 길을 말합니다.
3. 나오미의 두 번째 권유(11~13절)
11 그러나 나오미는 말렸다. "돌아가 다오, 내 딸들아. 어찌하여 나와 함께 가려고 하느냐? 아직, 내 뱃속에 아들들이 들어 있어서, 그것들이 너희 남편이라도 될 수 있다는 말이냐? 12 돌아가 다오, 내 딸들아. 제발 돌아가거라. 재혼을 하기에는, 내가 너무 늙었다. 설령, 나에게 어떤 희망이 있다거나, 오늘 밤 내가 남편을 맞아들여 아들들을 낳게 된다거나 하더라도, 13 너희가, 그것들이 클 때까지 기다릴 셈이냐? 그 때까지 재혼도 하지 않고, 홀로들 지내겠다는 말이냐? 아서라, 내 딸들아. 너희들 처지를 생각하니, 내 마음이 너무나 괴롭구나. 주님께서 손으로 나를 치신 것이 분명하다."
나오미는 며느리들의 반응에 더욱 강한 어조로 돌아갈 것을 말합니다. 이는 첫 번째 권유가 결코 빈말이 아니었음을 뜻합니다. 이를 위해 그녀는 현실적인 상황을 더욱 강조합니다. 그것은 바로 그가 이제 늙어 그들의 남편을 낳을 생식능력이 더 이상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중동의 일반적인 문화였을 뿐만 아니라 오경에서도 중요하게 등장하는 “형사취수혼”(兄死取嫂婚)을 전제한 말입니다. 이 제도에 따르면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거두어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데 실제로 룻기 후반부에 보아스가 이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이러한 나오미의 설득은 얼핏 우스꽝스럽게 들립니다. 굳이 늙은 그가 언급하지 않더라도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말이 가지는 무게감은 그 시대 “과부”의 삶이 가진 곤궁함과 연결 지어 보면 굉장한 육중함으로 다가옵니다. ‘어떻게든 남자와 결혼하여 종속적인 아내로 살아가는 것’이 그 시대 여성들의 생존에 필수적인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런 그들의 처지를 두고 나오미는 몹시 마음 아파하며 주님의 손이 자신을 치셨다고 토로합니다. 그는 자기 자신이 처한 고통에 처절히 괴로워하는 것은 물론이고 곁에 있는 이의 아픔에 공감하였습니다. 억지로 괜찮은 척 하지 않았고 다른 이의 괴로움에 무감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럴듯한 신앙적인 수사로 자신의 고난을 포장하지도 않은 채, 고통을 원인을 하나님께 돌리는 도발적인 태도를 보여줍니다. 이는 가식적 신앙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게 많은 깨우침을 안겨주는 중요한 모습입니다.
4. 오르바의 작별과 나오미의 타이름(14~15절)
14 그들은 다시 한 번 큰소리로 울었다. 마침내 오르바는 시어머니에게 입맞추면서 작별 인사를 드리고 떠났다. 그러나 룻은 오히려 시어머니 곁에 더 달라붙었다. 15 그러자 나오미가 다시 타일렀다. "보아라, 네 동서는 저의 겨레와 신에게로 돌아갔다. 너도 네 동서의 뒤를 따라 돌아가거라."
나오미의 계속된 권유에 그들은 또다시 소리 높여 울었습니다. 이 때 “다시 한 번”으로 옮긴 히브리 단어는 “계속”을 강조합니다. 즉, 일시적인 감정의 분출이나 체면치례가 아니라 진심으로 서글퍼 하며 한 참을 계속 흐느꼈다는 말입니다. 오르바는 마침내 시어머니의 뜻을 따라 작별 인사를 드리고 떠났습니다.
여기서 주의해야할 점은 그런 오르바를 비난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는 그저 현실적인 길을 선택했을 뿐입니다. 여기에 가치 판단할 여지는 전혀 없습니다. 같은 며느리인 룻이 더욱 숭고하고 이상적인 결정을 했다 해서 함께 있던 이의 평범한 결정을 함부로 평가절하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그런 오르바의 결정은 정반대로 룻의 결심을 더욱 굳게 하였습니다. 그는 “오히려 시어머니 곁에 더 달라 붙었습니다.”(개역개정성경: “붙좇았더라”) 여기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다바크>는 “가까움의 감정”으로서의 사랑을 뜻하는 <아하브>와 함께 평행을 이루어 구약 성경에 종종 쓰이는 단어입니다.
그러자 나오미는 오르바를 가리키며 또다시 룻을 설득하였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신神”의 등장입니다. 10절에서 며느리들은 “어머님과 함께 어머님의 겨레에게로” 돌아가겠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자신들의 겨레”로 돌아간 오르바를 가리켜 나오미는 그녀가 또한 그녀의 “신에게로” 돌아갔다고 말합니다. 이는 제정일치사회에서의 너무나 당연한 문화를 분명히 지적할 뿐만 아니라 지금 며느리들과의 실랑이가 단순히 거주지의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어떤 신을 섬길 것인가?”에 대한 논의를 담고 있음을 알려줍니다.
5. 룻의 결단과 베들레헴 귀환(16~19a절)
16 그러자 룻이 대답하였다. "나더러, 어머님 곁을 떠나라거나, 어머님을 뒤따르지 말고 돌아가라고는 강요하지 마십시오. 어머님이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님이 머무르시는 곳에 나도 머무르겠습니다. 어머님의 겨레가 내 겨레이고, 어머님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입니다. 17 어머님이 숨을 거두시는 곳에서 나도 죽고, 그 곳에 나도 묻히겠습니다. 죽음이 어머님과 나를 떼어놓기 전에 내가 어머님을 떠난다면, 주님께서 나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더 내리신다 하여도 달게 받겠습니다." 18 나오미는 룻이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마음먹은 것을 보고,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 19a 그 두 사람은 길을 떠나서, 베들레헴에 이르렀다.
나오미는 며느리들에게 진심으로 집요하게 각각의 집으로 돌아갈 것을 설득했고 그 결과 그 중 한 명을 회유하는 것도 성공하였습니다. 이런 시어머니의 뜻을 꺾기 위해서 룻은 더욱 굳건한 의지를 보여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먼저 “그녀는 어머님이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님이 머무르시는 곳에 나도 머무르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동사 “가다”와 “머무르다”가 반복과 대조를 이루는데 이는 단순히 베들레헴 여정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전 생애”를 함께 함을 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연한 다짐들이 그 다음에 이어집니다. “어머님의 겨레가 내 겨레이고, 어머님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입니다.” 앞서 오르바를 통해 드러난 “신앙”의 문제가 여기서 다시금 언급됩니다. 룻은 단순히 시어머니를 따라 이스라엘 백성으로 귀화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나오미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믿고 따를 것을 선언합니다.
여기서 놓쳐서는 안 될 점은 그러한 룻의 개종은 그에게 달콤한 보상이 아닌 천대와 차별을 의미한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이제 받아들인 야훼신앙의 전통적 문화는 이방인인 자기 자신을 배제합니다. 이는 곧 룻에게 있어 자기 부정을 의미합니다. 도움을 받기는커녕 계속 도움을 드려야할 시어머니 외에 아무도 아는 이 없는 베들레헴으로 향하는 그의 결단은 이처럼 위험천만했습니다. 따라서 룻이 새롭게 선택한 신앙은 화려한 성공과 안전 보장이 아니라 희생을 감수한 삶의 전환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만약 자신이 “죽음이 어머님과 나를 떼어놓기 전에” 시어머니를 떠난다면 주님께서 벌을 내리신다 할지라도 그것을 기꺼이 감수하겠다고 맹세하였습니다. 그런 그의 결연한 의지에 결국 마음을 굽힌 나오미는 더 이상 말리지 않고 함께 베들레헴으로 향했습니다.
6. 나가며
우리는 공감 능력을 상실한 채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가며 약자들을 짓밟는 이들의 잔인한 폭력이 넘치는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자신의 이익보다 며느리의 앞길을 철저히 배려하는 시어머니 나오미와 과감한 희생의 길을 선택한 룻, 그리고 그런 둘 사이에서 눈물을 삼키며 부득이 현실적인 결정을 내린 오르바 이 세 사람이 보여주는 모습은 많은 깨우침을 안겨줍니다. 특별히 “돌이켜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의 의미를 고민하게 합니다.
이들의 모습을 마음에 새기며 아름다운 섬김의 공동체를 가정과 이웃들 사이에 이루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다른 한편, 룻은 홀로 서 있다. 그녀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하나님께서 그녀를 부르시지도 않았다. 그 어떤 신도 그녀에게 축복을 약속하지 않았다. 그 어떤 인간도 그녀를 도우려고 오지 않았다. 지원해 주는 공동체도 없이 살아가려고 선택하고 있으며 자신의 결정의 열매가 거절이라는 허무함, 즉 실질적인 죽음이 될 수도 있음도 알고 있다. (중략) 한 젊은 여인이 남편을 찾기 보다는 한 늙은 여인의 삶에 자신을 위탁했다. (중략) 삶을 남성들에게 의존하는 세상에서 한 여성이 또 다른 여성을 선택했다. 이스라엘의 기억에 남을 모든 사건 가운데서 이보다 더 철저한 결정은 없을 것이다.”(필리스 트리블, Phyllis Trible, W.B.C. 룻기 주석 150쪽 재인용)
<묵상 질문>
1) 나오미처럼 힘과 지위의 우위에 있음에도 훌륭한 공감능력을 보인 어른의 예는?
2) 어떻게 룻의 결단이 가능했고 또한 오르바의 결정을 비난할 수 없는 지 각각 생각하는 이유를 나누어 봅시다.
3) 기독교 신앙이 “축복의 보장”이 아님에도 고난 가운데 선택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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