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2월 3일 토요일

룻기 4장 13-22절 "한 아기가 그들에게 태어나기까지"

2017년 12월 1일, 삼덕교회 금요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룻기 4장 13-22절 "한 아기가 그들에게 태어나기까지"

13 이에 보아스가 룻을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그에게 들어갔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게 하시므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 14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지로다 여호
와께서 오늘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하지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15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이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네 며느리가 낳은 자로다 하니라 16 나오미가 아기를 받아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니 17 그의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지어 주되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하여 그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였더라 18 베레스의 계보는 이러하니라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19 헤스론은 람을 낳았고 람은 암미나답을 낳았고 20 암미나답은 나손을 낳았고 나손은 살몬을 낳았고 21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22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혹시 모르시는 분 계실까봐 알려 드립니다. 오늘 날짜는 12월 1일입니다. 조금 신기하지 않으십니까? 2017년 새해를 맞이하며 송구영신예배를 드리던 때가 불과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마지막달이 찾아왔습니다. 생각해 보면 12월은 참 신비로운 것 같습니다. 한 해의 마지막을 보내며 자연스럽게 새해를 맞이할 준비를 하는, 시간의 끝과 시작이 겹치는 오묘한 접점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지난 한 해는 어떠셨습니까? 무엇에 아쉬움을 느끼셨고, 또 무엇에 감사를 드리십니까? 저는 지나온 한 해를 돌이켜 보면 무엇보다, 참 좋은 우리 삼덕교회에 부임하게 된 것이 무척 감사합니다. 그 덕에 성도님들의 귀한 사랑 속에 하루하루 정말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 개인적으로 특별히 감사하게 되는 것은 제 아내의 뱃속에 귀한 생명이 자라게 된 일입니다. 저는 보통의 삶은 허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결혼하고 7년이 지나도록 아기가 없었지만 그로인해 특별히 힘들거나 허전하지는 않았습니다. 자녀가 없으면 없는 데로 마음을 비우며 아내와 둘이서 행복하게 살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곳 대구에 온 후 전혀 예상치 못하게 아기가 생긴 덕분에 살면서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축하를 받았습니다. 

물론 몇몇 친구들은 이제 행복한 날 다 지났고 아기가 뱃속에 있을 때가 더 좋다고 놀려대고는 하지만 하루하루 설레는 마음으로 출산일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임신기간을 통해 새삼 분명히 확인하는 것은 한 아기의 탄생은 그 주위 사람들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을 안기는 참으로 복된 소식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한 기쁨을 제가 우리교회에 조금이나마 전할 수 있어서 한 해의 마지막을 보내며 무척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이렇듯 출산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주변 이웃들과 크나큰 축복을 나누는 즐거운 순간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묘사된 아기 탄생은 좀 특이하고 유별납니다. 우선 이웃 여인들이 아기를 낳은 당사자인 룻이 아닌 그의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우르르 몰려가서 함께 기뻐하며 노래했습니다.

여기까지는 끈끈한 유대관계를 가진 농경문화의 하나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드러난 나오미의 행동과 그녀에 대한 이웃 여인들의 노래 가사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16, 17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16 나오미가 아기를 받아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니 17 그의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지어 주되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하여 그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였더라

 먼저 16절을 보면 나오미가 아기를 ‘받아 품에 품고’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 모습을 단순히 할머니가 손자를 끌어안고 돌보는 일상적인 행동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받아’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동사는 거의 입양과 흡사한 이 아기에 대한 상당한 권리와 책임을 암시합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17절입니다. 이웃 여인들은 이 상황을 가리켜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고 말하였습니다. 이상하지 않으십니까? 지금 나오미 품에 안겨진 “오벳”은 분명 나오미가 아닌 룻이 낳은 아들, 즉 나오미의 손자입니다. 게다가 오벳에게 있어 나오미는 친할머니가 아니라 어머니의 전 남편의 어머니입니다. 그래서 엄밀히 따지면 그녀는 이 아기와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습니다. 그런데 왜? 그 아기를 가리켜 이웃 사람들은 ‘나오미의 아들’이라고 말했을까요? 그것은 아기 오벳이, 룻의 아들이고 나오미의 손자이기 전에 14절에 기록된 바와 같이 나오미의 ‘기업 무를 자’(히, 고엘)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에 대해 보다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의 눈을 더욱 크게 떠서 룻기 전체의 내용을 다시금 되짚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룻기의 시작은 잘 아시는 대로 무척 어둡고 절망적입니다. 극심한 가난을 이유로 나오미가 가족과 함께 이방 땅 모압으로 이민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부푼 기대와 희망과는 달리 그만 거기서 남편과 두 아들을 잃는 가슴 아픈 비극을 겪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곁에는 과부가 된 두 며느리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지만 남자 없이 여자들만 살아간다는 것은 특히나 고대 중동 사회에서는 생존자체가 위협받을 정도로 매우 힘겨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오미는 모압 출신의 두 며느리에게 그녀들의 고향에 남길 권했습니다. 똑같이 과부 처지인데다 나이 많은 나오미가 젊은 며느리들에게 짐만 될 뿐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며느리 중 하나인 오르바는 죄송함을 무릅쓰고 결국 시어머니에게서 떠나 모압에 남았습니다. 하지만 그와 달리 룻은 끝까지 나오미 곁에 머물러 시어머니와 함께 낯선 땅 베들레헴으로 향해습니다. 비록 그 결정으로 말미암아 결코 녹록치 않은 현실과 마주할 것이 분명했지만 사랑 많으신 늙고 힘없는 시어머니를 홀로 보내는 것은 그녀에게는 결코 내키지 않는 일 이었습니다.

그렇게 룻은 고향에 남아서 자신의 삶을 지탱해줄 또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지극히 상식적이고 현실적인 길 대신, 언어와 문화가 매우 다른 것은 물론이고 자신과 같은 이방 사람들에게 철저히 배타적인 이스라엘에서 과부 시어머니를 모시고 함께 사는 험난한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낯선 땅 베들레헴에서 끼니를 잇기 위해 룻이 했던 일은 바로 추수하는 들녘에 남겨진 이삭을 줍는 것이었습니다. 모세 율법에 따르면 가난하고 힘없는 이웃을 위해 곡식을 모두 거두지 말고 반드시 일부를 남겨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황량한 삶의 자리에서 그녀는 뜻밖의 운명적인 만남을 가지게 됩니다. 바로 “보아스”입니다. 그녀가 이삭을 주었던 그 땅의 주인인 보아스는 룻을 알아보고 시어머니를 향한 그녀의 갸륵한 마음을 어여쁘게 여겨 따뜻하고 친절하게 도움을 베풀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얘기를 룻으로부터 전해들은 나오미는 크게 환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왜냐하면 보아스는 죽은 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척이었고 따라서 삶의 터전을 잃은 그들을 레위기 25장의 희년 법에 따라 도와줄 의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희년 법에 따르면 이스라엘 가운데 누군가가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부득이하게 자신의 땅을 팔고 빚을 지었을 때 그의 가까운 가족이나 친척이 “기업 무를 자”가 되어 그의 빚을 대신 갚아 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겪는 현실적인 가난의 문제에 대한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해결 방안을 희년 제도를 통해 마련하셨고 그 뜻을 행할 사람들을 ‘기업 무를 자’로 세우셨습니다. 

중요한 점은 그렇게 ‘기업 무를 자’가 된다는 것은 철저한 책임과 희생만 따르지 혜택과 권리는 지극히 적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보아스는 자신 보다 먼저 ‘기업을 무를 책임’이 있는 다른 친척의 포기를 구태여 번거롭게 얻으면서 까지 그 의무를 수행했고 마침내 룻을 아내로 맞아들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지금 나오미의 품에 안긴 아기는 그녀에게 있어 단순한 손자가 아닌 “생명의 회복자”이자 “노년의 봉양자”가 됩니다.

이와 같은 룻기 전체 이야기를 들여다보았을 때, 한 아기 ‘오벳’의 출생은 그의 부모인 보아스와 룻의 평범한 사랑의 결과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늙고 힘없는 시어머니를 위한 룻의 희생과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돌본 보아스의 섬김이 만나 이루어진 참으로 아름다운 결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모든 과정을 익히 잘 알고 있는 베들레헴의 아낙네들은 마치 자신들 일 인양 함께 기뻐하며 14, 15절에 기록된 찬양을 드렸습니다. 보다 쉬운 이해를 위해 새번역 성경으로 읽어 드리겠습니다.

14 그러자 이웃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말하였다. "주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이 집에 자손을 주셔서, 대가 끊어지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의 이름이 이스라엘에서 늘 기리어지기를 바랍니다. 15 시어머니를 사랑하는 며느리, 아들 일곱보다도 더 나은 며느리가 아기를 낳아 주었으니, 그 아기가 그대에게 생기를 되찾아 줄 것이며, 늘그막에 그대를 돌보아 줄 것입니다." 

이렇게 룻기는 언제 읽어도 마음 따뜻해지는 훈훈한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이 책이 이것으로 끝나지 않고 매우 의미심장한 내용을 알려주고 이야기의 매듭을 짓는 다는 점입니다. 

본문 17절 말씀 다시 한 번 다함께 읽겠습니다.
17 그의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지어 주되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하여 그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였더라

룻기는 오벳이 이새의 아버지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즉, 지금 나오미의 품에 안긴 간난 아기는 바로 다윗의 할아버지입니다. 그 다윗은 우리 모두 잘 알다시피 이스라엘 역사 속에 가장 위대한 왕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다윗 왕의 위대함은 그 자신의 뛰어난 인격과 능력에 아니라 그가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공평을 바탕으로 왕의 자리를 섬긴 것에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는 이 땅에 이미 오셨고, 또 다실 오실 메시아를 예고하는, 찬란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다면 한 번 상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룻이 홀로된 시어머니 나오미를 모시고 그 가냘픈 어깨에 괴나리봇짐을 짊어졌을 때, 그리고 마침내 낯선 땅 베들레헴에 잔뜩 주눅 든 얼굴로 겨우 도착했을 때, 훗날 자신의 이름을 딴 성경책에 그 아름답고 위대한 희생이 기록되어 수 천 년 동안이나 전해져 내려올 것을 과연 알고 있었겠습니까?

보아스가, 자신의 보리밭 한 쪽에서 야윈 몸을 움직이며 애처롭게 이삭을 줍는 룻을 처음 보았을 때, 그리고 그런 그녀를 위해 아낌없이 나누고 섬겼을 때, 과연 자신이 메시아의 육체적 조상이 되어, 룻과 마찬가지로 성경에 기록되는 어마어마한 영광을 누리리라고 과연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다만 자신들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곁에 있는 약하고 가난한 이들을 위해 그저 묵묵히 섬기고 나누었을 뿐입니다. 그것은 절대로 거창한 이상과 꿈의 계획적인 실현이 아니었습니다. 그 대신 눈앞에 놓인 일상의 진정성 있는 연속이었고, 그 결과 한 아기가 태어났을 뿐입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그 아기를 통해 당신께서 이 땅에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은혜와 평화의 서막을 열어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아기 오벳은 그의 부모인 룻과 보아스가 살아온 복음의 삶이 이루어낸 소중한 결과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 아기의 탄생은 온 세상을 위해 주님께서 계획하신 복음의 또 다른 시작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이것이야말로 룻기 전체가 결론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기 때문에 저자는 이 책을 마무리 하며 오벳을 거쳐 다윗에게 이르는 족보를 굳이 다시 한 번 더 언급합니다. 18~22절 우리 다함께 읽겠습니다.

18 베레스의 계보는 이러하니라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19 헤스론은 람을 낳았고 람은 암미나답을 낳았고 20 암미나답은 나손을 낳았고 나손은 살몬을 낳았고 21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22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향한 참된 믿음과 순종은 굉장히 신비롭고 초월적인 무언가를 성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끊임없이 ‘일상을 살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감당 못할 거창한 희생과 헌신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기인에 가까운 금욕과 가학적인 자기 절제를 바라시지도, 결벽적인 도덕성을 강요하시지도 않으십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한 아기의 탄생처럼, 많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다양한 삶의 모습들, 친구들과 어울려 수다를 떨고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재밌는 영화를 보고, 아름다운 음악을 듣는 일상을 소중히 여기길 바라십니다. 다만,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우리의 삶 주변에 있는 고통가운데 소외된 이웃들에게 좀 더 따뜻한 사랑의 시선을 건네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섬김의 손길을 내미는 것을 주저하지 말라고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일러 주십니다.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 나라는 바로 그와 같은 작은 눈길과 손길들이 한데 어우러져 완성된 모자이크와 같습니다. 그리고 그 거대한 모자이크의 중심에, 바로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 속 오벳처럼, 한 아기로 누워 계십니다. 그리하여 온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최종 구원의 결정적 시작이 바로 주님의 ‘아기 되심’으로 움터 올랐음을 예수님께서는 그 초라한 구유 위에서 생생히 보여주셨습니다.

마침 모레인 12월 3일은 “대림절 첫 번째 주일”입니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이 대림절을 보내며 성탄절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시간으로 지켰습니다. 또한 대림절은 거룩한 교회력의 시작입니다. 그런데 참 묘하게도 이러한 복음의 시작이 한 해의 마지막인 12월과 겹쳐집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는 복음의 마무리이자 출발인 아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은총의 기쁜 소식을 더욱 깊이 묵상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살리시기 위해 여러 방법들 대신 굳이 당신의 아들이 한 아기로 이 땅에 태어나는 길을 선택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어른이 되지 못한 아기들은 있어도 아기가 아니었던 어른은 아무도 없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진정한 인간다움은 곧 ‘아기다움’과 맞닿아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 아기의 연약함 속에 온 생명을 참으로 구원하는 진정한 능력과 희망이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성탄의 진정한 복음과 신비가 담겨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여러분께 소개하고 싶은 영화가 있습니다. 바로 알폰소 쿠아론 감독이 2006년에 발표한 “칠드런 오브 맨”(Children of Men)입니다. 이 영화는 가까운 미래의 어두운 상황을 묘사하였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다른 비슷한 영화들처럼 외계인의 침공이나 거대한 자연 재해가 아니라 전 지구적인 “불임”(不姙)을 소재로 다루었습니다. 

정확한 원인을 알 수 없는 채로 더 이상 사람들은 아기를 낳지 못하였습니다. 그렇게 20년 가까운 시간이 흘러가며 사람들은 점점 더 인류의 멸종을 실감하고 까마득한 절망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정부의 독재와 억압은 더더욱 심해져 갔고 그것에 반발한 사람들의 저항역시 만만치 않아서 결국 극도의 긴장과 폭력이 온 세계를 뒤덮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기적적으로 한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만약 독재정부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해 불의하게 사용할 것이 뻔했습니다. 한 편, 정부에 반대해 투쟁하는 사람들 역시도 자신들의 정치적인 목적만을 위해 그 아기를 이용하려 하였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주인공이 아기와 산모를 인도적인 의료연구 단체로 데려가는 힘겨운 과정이 이 영화의 줄거리입니다.

그중 하이라이트는 반란군에 붙잡혀 있던 산모와 아기를 주인공이 우여곡절 끝에 다시 찾아오는 장면입니다. 반군 지도자는 그런 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I was carrying the baby up the stairs. I started crying
아기를 안고 계단을 오르면서 그만 울고 말았어.

I'd forgotten what they looked like. They're so beautiful. They're so tiny.
그동안 잊고 있었어. 아기가 그렇게 예쁘다는 것을. 그렇게 너무나 작다는 것을.”

그런 그를 뒤로 하고 주인공은 울고 있는 자신의 아기를 품에 안은 소녀와 함께 정부군과 반란군이 서로를 향해 격렬하게 포탄을 주고받는 건물 밖을 향해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20여년 만에 비로소 아기 울음소리를 듣게 됩니다. 이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영화의 한 장면을 다함께 보시겠습니다.

<Children of Men Baby Ceace-fire Scene>
https://www.youtube.com/watch?v=Y5vmo_oUnJo

사람들은 너무도 오랜 시간이 흘러 처음 듣는 아기의 울음소리에, 그 작디작은 몸짓에 경이로움을 표현합니다. 살기를 뿜어내며 달려들던 군인들이 총을 내려놓았습니다. 심지어 아기 앞에 무릎 꿇고 성호를 긋는 군인도 있었습니다. 

한 아기의 작음이, 그의 철저한 무력함이 비록 잠시 동안이었지만 전쟁마저도 멈추게 하는 참된 능력과 희망을 가지고 있음을 이 영화는 보여주었습니다. 이는 또한,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가난한 우리들의 “기업 무를 자”가 되시려, 사람들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한 아기로 이 땅에 오신 성탄절 사건이 얼마나 위대하고 놀라운 은혜인지를 새삼 깨닫게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일상 가운데서 아기와 같은 미숙한 모습을 애써 감추려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 연약함과 무지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룻과 보아스처럼 다른 이들의 아기 같음을 날마다 감싸주고 돌보아주시길 바랍니다.

그 때, 그 모든 섬김의 결실들은 단지 우리들만의 잔치와 노래로 그치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알리는 희망의 증거가 됨을 굳게 믿으며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한 아기 ‘오벳’이 단지 나오미의 평범한 손자로 그치지 않고 이새의 아버지이자 다윗의 할아버지임을 성경이 오늘 우리에게까지 거듭해서, 분명히 전해주는 이유입니다.

이 모든 복음의 놀라운 능력과 생명을 바라보며 일상 가운데 섬김과 나눔을 묵묵히 이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소망 합니다.


설교 후 기도
신실하신 하나님.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섬김과 나눔을 결코 잊지 않으시고 그것을 통하여 생명의 귀한 열매를 맺어주심을 믿습니다. 대림절을 맞이하며, 기꺼이 아기와 같은 낮은 자세로 이웃을 돌보는 것을 주저하지 않게 하시고 저마다의 일상을 통해 날마다 주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한 아기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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