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2월 17일 토요일

사도행전 17장 16~34절 “감히 실패라고 말하기 전에”

2018년 2월 14일, 수, 삼덕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정대진 목사
사도행전 17장 16~34절 “감히 실패라고 말하기 전에”

16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17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
니 18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 19 그를 붙들어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네가 말하는 이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느냐 20 네가 어떤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 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니 21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22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23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24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27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28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29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32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33 이에 바울이 그들 가운데서 떠나매 34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하여 믿으니 그 중에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은 아테네에서 선교하는 바울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테네”라는 도시를 가보진 못했어도 다들 들어는 보셨을 것입니다. 서양 문명의 중심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눈부신 정신 유산으로 가득한 곳입니다. 비록 당시 지중해의 패권을 차지한 제국은 로마였지만 그들은 특유의 유연함으로 그리스 문화를 적극적으로 계승 발전 시켰습니다. 라틴어라는 자신들 고유의 언어가 있었음에도 지식층과 상류층은 헬라어를 사용하였고 심지어 이를 통해 신약 성경이 기록되었다는 사실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따라서 아테네 사람들은 고대로부터 전해오는 자신들의 철학과 종교에 대한 상당한 우월감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그들의 자부심은 바울의 눈에는 역겨운 우상숭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까지 전해져 오는 그리스 신화를 통해 잘 알 수 있듯이 그리스 종교의 특징은 “다신교”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들은 그러한 자신들의 신을 가장 완벽한 형태를 갖춘 인간의 모습으로 조각하는 것을 즐겼습니다. 이것은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진정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한 분 이심을 고백할 뿐만 아니라 그 분을 그 어떤 모습의 우상으로도 만들어 섬기지 않는 야훼 신앙과 정면으로 부딪히는 모습입니다. 

그런 까닭에 본문 16절을 보면 바울은 아테네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거기서 멈추지 않고 당대 헬라 철학의 대표적인 양대 세력인 에피쿠로스파와 스토아파 학자들과 거침없이 토론 하였습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그가 정통 랍비 교육을 받았던 것과 동시에 헬라 철학에도 능통했기 때문입니다. 

앞서 유대인들의 회당에서 그들에게 익숙한 구약의 역사를 근거로 예수님께서 진정한 메시아이심을 전했던 바울은 이제 그리스 종교가 가진 모순을 그리스 철학에 근거해 논파합니다. 28절을 새번역 성경으로 제가 읽겠습니다. 

28 여러분의 시인 가운데 어떤 이들도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이다' 하고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고 있습니다.

개역개정성경에 28절 앞부분에서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한다.”는 표현을 새번역성경은 좀 더 쉽게 풀어서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고 있습니다.”라고 옮겼습니다. 이것은 주전 600여년 경에 살았던 그리스 시인 “에피메니데스”의 시 “크레타”에서 인용한 구절인데 더욱 거슬러 올라가면 플라톤 철학과 이어지는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고 옮긴 문장을 새번역 성경은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이다”라고 풀었는데 이는 주전 2세기에 활약한 시칠리 섬의 시인 “아라투스”의 시 “패노메나”에서 인용한 표현입니다. 그는 이외에도 고린도전서 15장 33절과 디도서 1장 12절에서 헬라 시인들의 문장을 언급하였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사실을 통해 바울의 신앙과 사상이 얼마나 넓고 깊은 지를 새삼 확인하게 됩니다. 그는 단지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전통을 충실히 공부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정통 유대교 입장에서 터부시 했던 당대 헬라의 고급 철학과 문학역시 성실히 공부하였습니다. 이러한 노력의 끝에 그는 아테네에서 극적인 상황을 이루어냅니다. 그 시대 최고의 철학자들 앞에서 헬라 고전에 근거하여 그들 종교가 가진 허상을 거침없이 폭로하였습니다.

아테네 사람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빚은 온갖 우상들을 가리키며 신이라 부르고 거대한 신전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면 그 하나님이 사람들이 만들어낸 우상과 같다고 믿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며 그들이 가진 거짓과 모순을 예리하게 지적하였습니다. 29절 말씀 새번역 성경으로 읽어 드리겠습니다. 

29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신을,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가 새겨서 만든 것과 같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바울은 헬라 문화의 언어로 성경의 하나님을 전하는 탁월한 실력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초라하였습니다. 다른 지역에 비해 비교적 적은 수의 사람들의 그의 전도를 받아들였습니다. 따라서 본문 속 바울을 가리켜서 복음을 직접적으로 말하는 대신 철학을 사용했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평가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익숙한 해석이라고 해서 늘 옳은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틀린 경우가 상당히 많습니다.

바울이 아테네에서 행한 선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전달하는 도구가 철학이었을 뿐 그 핵심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18절 하반부를 보면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라고 기록합니다. 또한 32절에 보면 아테네 사람들이 바울이 말한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내용을 듣고 그를 조롱했다고 언급합니다. 이를 통해 그날 그의 중심에는 여전히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이 굳건하게 자리 잡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날 만약 그가 유대인 회당에서처럼 구약성경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면 그리스 사람들이 과연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을까요? 말을 꺼내는 순간 고개를 돌렸을 것이 분명합니다. 바울이 철학을 인용한 덕분에 그나마 그곳에서 성경이 말씀하시는 진정한 하나님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그가 당대 철학에 능통했기 때문에 그것을 활용하여 기독교의 진리를 논리정연하게 정리한 보석 같은 편지를 적을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가 최초의 기독교 신학자라는 극찬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율법뿐만 아니라 그 시대 보편적인 선진 학문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활용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성경을 올바로 깨달아 아는 길은 말씀 자체를 열심히 읽고 묵상하는 것과 동시에 인문학과 과학을 비롯한 또 다른 지식을 익히며 끊임없이 소통하는 것임을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뜨거운 신앙과 동시에 냉철한 이성과 합리적이고 보편적인 상식을 두루 균형 있게 갖춰야합니다. 그리할 때 비로소 우리의 신앙은 협소한 고집에서 벗어나 더욱 깊고 넓은 언어로 하나님의 무한한 뜻을 증언할 수 있습니다.

또한 바울의 아테네 선교를 감히 실패로 규정할 수 없는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그 평가의 잣대를 인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본문 속 바울을 가리켜 실패했다고 말하는 이들은 적은 수의 사람들이 복음을 영접하는 것을 그 근거로 삼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엄중히 물어야 합니다. 과연 숫자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기준이 될 수 있을까요? 

단적인 예를 들겠습니다. 두 교회가 있다고 할 때, 그중에서 교인들의 숫자가 많은 교회가 적은 교회보다 더 좋은 교회일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질문 자체가 성립될 수 없습니다.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깊은 섭리에 감히 숫자를 들먹이며 조급해 하는 것은 철저히 모순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감정을 계량화 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비록 아테네에서 예수님을 받아들인 사람은 몇 안 되지만, 그들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결실입니다. 설령 그날 아무도 복음을 영접하지 않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최선을 다해 복음을 전했고 그 결과는 오직 하나님께만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루하루 경험하는 온갖 실패와 좌절 속에서 쉽게 절망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절대로 유치한 이 세상의 기준으로 스스로를 무시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온 우주를 지으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눈앞에 우리 모두는 너무나 사랑스러운 자녀이자 주님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향한 우리의 진심을 그 누구보다 잘 아시기에 때때로 어쩔 수 없는 한계에 막혀 넘어질 때 결코 함부로 정죄하지 않으십니다. 그 대신 넘어진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어 그 모든 실패들을 은혜의 통로로 삼아 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바울이 아테네에서 전한 죽임당하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오늘 하루도 진정한 위로와 희망을 발견하고 누리게 되시길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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