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2월 5일 월요일

사도행전 9장 19~31절 "증언하는 증인"

2018년 1월 23일, 화, 삼덕교회 새벽기도회, 정대진 목사
사도행전 9장 19~31절 "증언하는 증인"

19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20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21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그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 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22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 23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24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그들이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25 그의 제자들이 밤에 사울을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서 달아 내리니라 26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27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 28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29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30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어제 함께 읽은 9장 10~19절 말씀은 교회를 핍박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 예수님을 만나고 눈이 먼 사울의 눈을 뜨게 하도록 아나니아가 부름 받고 이를 실행한 장면을 기록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로서는 여러모로 위험하고 힘겨운 명령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바울을 통한 위대한 선교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따라서 비록 성경에서 아나니아의 비중은 매우 적었지만 그의 헌신이 이룬 결실은 너무나도 찬란하게 빛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어지는 오늘 본문 말씀은 그렇게 극적으로 변화된 사울이 전한 복음의 내용과 그로 말미암은 고난을 기록하였습니다. 먼저 20절에 보면 사울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였습니다. 또한 22절에 따르면 그는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였습니다. 즉, 예수님을 만난 사울이 주저 없이 즉각 전파하고 증언하였던 복음의 핵심은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외침은 오랫동안 교회에 출석하며 신앙 용어에 익숙한 21세기 그리스도인으로서는 그리 새로울 게 없는, 어찌 보면 조금 식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목격자들이 여전히 많이 살아있고 아직 유대교와 기독교의 경계가 흐릿하고 이제 막 교회가 시작되고 있던 그 시대로서는 몹시 충격적인 이야기였습니다. 

이스라엘 변방지역의 천대받던 동네 출신의 목수로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나무에 매달려 죽임당한 예수는 그 시대 이스라엘의 일반적인 인식에서는 절대로 하나님의 아들이거나 그리스도 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과거 다윗 왕과 같은 강력한 전제군주로서의 메사아를 고대했던 당시 유대교의 시각에서는 극심한 신성모독이었습니다.

게다가 막강한 군사력과 거대한 행정력에 기반 한 제국의 평화를 선전하며 차츰 황제를 신성화했던 로마제국의 입장에서도 얼토당토 않는 황당한 소리였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의 고향인 나사렛은 그 시절 가장 격렬한 반 제국 혁명이 수시로 일어났던 곳이라 바울이 외친 원시복음은 제국의 질서를 위협하는 반란군의 불온한 구호로 들리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본문에 기록된 격렬한 반응이 사울에게 자연스럽게 쏟아졌습니다. 먼저 21절에 보면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였다”고 적었고 22절에 보면 “유대인들이 당혹스러워” 했습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23, 24절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사울의 암살을 모의하고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을 지켰습니다. 또한 29절에도 그를 향한 살해 계획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듯 회심 직후 바울이 전파하고 증언했던 원초적인 복음의 내용과 그로 말미암은 놀람과 당혹 그리고 살해위협이라는 결과는 오늘날 비교적 안전한 상황에서 편하게 신앙생활 하는 우리의 안일함에 경종을 울리게 합니다. 우리는 본문 앞에서 끊임없이 되물어야 합니다. 우리가 믿고 고백하며 삶으로 전하는 복음은 과연 세상을 놀라고 당혹스럽게 했던 바울이 외친 진리의 핵심과 맞닿아 있습니까? 아니면 사람들의 욕망에 부합한 감언이설은 아닙니까?

물론 오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결코 엄숙하고 비장한 의무가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신명으로 신명나게’라는 우리교회의 주제와 마찬가지로 복음은 온갖 굴레와 억압에서 해방시키는 기쁨과 즐거움입니다. 그 분명한 결실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부활은 모든 죽음과 절망을 이기신 주님의 진정한 생명과 희망이 끝내 이룬 승리입니다. 그러한 부활은 온 우주를 찬란하게 휘감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한 부활에 이르는 유일한 과정이 바로 십자가라는 사실 말입니다. 십자가는 좀 더 많이 움켜쥐고 좀 더 높이 오르기 위해 자신 보다 약한 사람들을 억누르고 이용하려는 이 세상의 욕망과 필연적으로 어긋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말하는 핵심입니다. 따라서 그 진리에 새롭게 두 눈을 뜬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22~24절에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그러므로 진리를 가슴에 품고 그것을 이루며 살아갈 때, 때때로 도무지 납득하기 힘든 고난이 찾아온다 할지라도 쉽게 절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모든 시련은 우리로 하여금 지난날 사도 바울이 목숨을 건 위험 속에서도 끝내 포기하지 않았던 십자가 복음으로 이끄는 은혜의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러한 예수님의 복음을 올바로 깨닫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온갖 어려움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에 함께 할 수 없었습니다. 사도들이 여전히 의심의 눈으로 그를 경계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러한 그들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닙니다. 사람은 그리 쉽게 변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 모두는 잘 알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복음을 향한 박해에서 순종으로, 한 사람의 가치관과 세계관이 완전히 바뀐다는 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게다가 이 모든 것이 예루살렘 교회를 소탕하려는 모종의 음모로 볼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바울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 던지며 예수님을 따랐지만 정작 그분의 제자 공동체에는 받아들여지지 못한 채 따돌림과 의심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런 그를 도와 준 은인이 바로 바나바입니다. 2주 전에 함께 읽은 사도행전 4장 36~37절에 잘 나와 있듯이 그의 본명은 “요셉”입니다. 하지만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을 가진 별명인 “바나바”가 이름보다 더욱 널리 불려 졌습니다.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 별명에 담긴 그의 성품과 인격을 모두가 주저 없이 인정하고 존경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도들 역시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바나바가 직접 바울의 결백을 보증하자 마침내 그는 교회 공동체에 속할 수가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 역시 오늘날의 바나바로, 또 다른 “위로의 자녀”로 인정받으며 살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누군가 가진 신앙의 건강함은 단순히 그가 얼마나 열심히 교회 생활을 했느냐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과연 그가 함께 있으면 좋은 사람인지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이웃을 위해 인내하고 섬기고 사랑하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기 때문입니다. 성경 전체에서 연약한 이웃을 향한 하나님의 일관된 관심이 기록돼 있는 이유도, 예수님께서 율법을 요약하시며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대등한 위치에 두신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는 또한 바나바가 한때 자신의 동료들을 가차 없이 억압했던 원수인 바울을 향한 초인적인 용서와 관용의 근거이기도 합니다. 즉,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이시라는 바울이 깨달은 복음의 핵심을 자신의 내면 깊이 받아들였기 때문에 진정한 위로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 자신이 하나님의 무한한 용서와 사랑의 대상이었음을 분명히, 그리고 겸손히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하루, 복음의 본질을 고민하며 위로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길 소망합니다. 특별히 우리 보다 약한 이들을 가슴에 품으며 좀 더 손해 보고 낮아지며 섬기는 삶을 살아가길 희망합니다. 주님께서 그런 우리 모두의 믿음을 기억하시고 선한 은혜의 길로 인도하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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