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2월 5일 월요일

스가랴 7장 1~14절 "누구를 위한 금식인가?"

2017년 12월 8일, 금, 삼덕교회 새벽기도회, 목사 정대진
스가랴 7장 1~14절 "누구를 위한 금식인가?"

1 다리오 왕 제사년 아홉째 달 곧 기슬래월 사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스가랴에게 임하니라 2 그 때에 벧엘 사람이 사레셀과 레겜멜렉과 그의 부하들을 보내어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
고 3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있는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게 물어 이르되 내가 여러 해 동안 행한 대로 오월 중에 울며 근신하리이까 하매 4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5 온 땅의 백성과 제사장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칠십 년 동안 다섯째 달과 일곱째 달에 금식하고 애통하였거니와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6 너희가 먹고 마실 때에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먹고 너희를 위하여 마시는 것이 아니냐 7 예루살렘과 사면 성읍에 백성이 평온히 거주하며 남방과 평원에 사람이 거주할 때에 여호와가 옛 선지자들을 통하여 외친 말씀이 있지 않으냐 하시니라 8 여호와의 말씀이 스가랴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9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진실한 재판을 행하며 서로 인애와 긍휼을 베풀며 10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며 서로 해하려고 마음에 도모하지 말라 하였으나 11 그들이 듣기를 싫어하여 등을 돌리며 듣지 아니하려고 귀를 막으며 12 그 마음을 금강석 같게 하여 율법과 만군의 여호와가 그의 영으로 옛 선지자들을 통하여 전한 말을 듣지 아니하므로 큰 진노가 만군의 여호와께로부터 나왔도다 13 내가 불러도 그들이 듣지 아니한 것처럼 그들이 불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14 내가 그들을 바람으로 불어 알지 못하던 여러 나라에 흩었느니라 그 후에 이 땅이 황폐하여 오고 가는 사람이 없었나니 이는 그들이 아름다운 땅을 황폐하게 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스가랴 7장 1절을 통해 본문의 시간 배경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바로 페르시아 다리오 황제가 즉위한지 4년 되던 해 4월 9일입니다. 참고로 구약성경에 나오는 날짜는 모두 음력입니다. 그래서 본문 속 날짜를 양력으로 바꿔보면 주전 518년 12월 7일이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스가랴 1장 1절에 스가랴가 처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된 날은 다리오왕 제 2년 8월이고, 이후 환상을 본 때는 7절에 따르면 그로부터 3개월이 지난 후였습니다. 정리하자면 오늘 본문인 7장과 1장 사이에는 약 2년이라는 시간의 거리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 페르시아를 중심으로 요동쳤던 중동의 정세는 차츰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또한 페르시아의 허락 아래 진행되었던 유다백성들의 예루살렘 귀환 계획도 점점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벧엘에서 온 한 무리의 사람들이 성전 제사장과 예언자들에게 찾아왔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벧엘은 야곱이 형 에서의 칼을 피해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하는 길에 하늘과 연결된 사다리 위를 오가는 천사들을 보고, 하나님의 신실한 언약을 확인한 지역입니다. 따라서 그곳은 역사적으로 오랜 신앙의 중심지였으며 거기에 모인 종교지도자들은 그 전통에 대한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질문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바로 여러 해 동안, 다섯 째 달마다 해온 금식을 계속해야하는 지 여부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구약의 달력은 음력입니다. 따라서 이 때 유다력의 5월은 오늘날 8월에 해당되고 이 달에 있었던 가장 중요한 사건은 바로 예루살렘의 멸망입니다. 그래서 바벨론 포로기를 거치며 매년 다섯 째 달마다 그들은 애통과 금식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제 무사히 성전이 완공 중이기 때문에 금식하며 계속 탄식하고 슬퍼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 예루살렘 신앙지도자들에게 지속 여부를 물었습니다.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을 하나님께서는 예언자 스가랴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5~7절 말씀 제가 읽겠습니다. 

5 온 땅의 백성과 제사장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칠십 년 동안 다섯째 달과 일곱째 달에 금식하고 애통하였거니와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6 너희가 먹고 마실 때에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먹고 너희를 위하여 마시는 것이 아니냐 7 예루살렘과 사면 성읍에 백성이 평온히 거주하며 남방과 평원에 사람이 거주할 때에 여호와가 옛 선지자들을 통하여 외친 말씀이 있지 않으냐 하시니라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질문을 던진 사람들은 벧엘에 속한 종교 지도자들이었지만 대답을 들어야 할 대상은 “온 땅의 백성과 제사장”들로 확장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유다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후 약 칠십여 년 간 진행된 금식에 대해, 그렇게 그들이 자랑스러워한 견고한 신앙전통에 대해 다음 같은 예리한 의문을 던지십니다.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주님께서는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들이 제 아무리 당신의 이름을 걸고 거룩한 척, 신앙의 열심을 뽐낸다 할지라도 실상 자신들의 만족과 욕망을 위한 것이지 하나님의 진정한 뜻과 마음을 헤아린 결과가 아니라는 사실 말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금식을 가리켜 ‘너희를 위한 것’이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향해 진정 원하시는 경건의 삶은 과연 무엇일까요? 9~10절 제가 읽겠습니다.

9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진실한 재판을 행하며 서로 인애와 긍휼을 베풀며 10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며 서로 해하려고 마음에 도모하지 말라 하였으나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바벨론 포로 생활이라는 극한의 위기 속에서 금식을 통해 겸손히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자체는 너무나 귀하고 소중한 태도입니다. 문제는 경건의 껍질만 남아있고 정신은 사라진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거룩함은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들로 대표되는 약자들을 돌보며 그들의 편에 서는 것으로 구체화 됩니다. 하지만 11절을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그들은 그러한 주님의 말씀 듣기를 거부하였습니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말씀이 스가랴를 통해서만 전해지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여러 예언자들을 통해 그럴듯한 경건의 외형보다 약자를 돌보는 진정한 삶의 실천을 수도 없이 강조하셨습니다. 본문 7절과 12절 제가 다시 읽겠습니다.

7 예루살렘과 사면 성읍에 백성이 평온히 거주하며 남방과 평원에 사람이 거주할 때에 여호와가 옛 선지자들을 통하여 외친 말씀이 있지 않으냐 하시니라

12 그 마음을 금강석 같게 하여 율법과 만군의 여호와가 그의 영으로 옛 선지자들을 통하여 전한 말을 듣지 아니하므로 큰 진노가 만군의 여호와께로부터 나왔도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오늘 본문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스가랴 때가 처음이 아니라 이미 여러 예언자들을 통해 들려졌던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종교 의식보다 정의와 공평의 삶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수 차례 말씀하셨습니다. 대표적으로 이사야 1장 11~12절 말씀 읽어드리겠습니다.

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이렇듯 주전 8세기 이사야 때의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주전 6세기 스가랴 때의 유다 포로들이나 죄의 양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보다 훨씬 더 두렵고 떨리는 사실은 그들과 오늘 우리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점입니다.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보이는 비본질로 보이지 않는 본질을 대체하려는 유혹에 빠집니다. 특히나 오랫동안 교회의 중심에서 신앙생활을 해온 사람들의 경우 더더욱 그렇게 되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참된 진리를 따르고 실천하는 것보다 훨씬 더 쉽기 때문입니다.

한 번 가정해 보겠습니다. 여러분 앞에 매주 주일 예배는 물론이고 모든 공적 모임에 성실히 참석하고 열심히 봉사하며 많은 헌금을 드리지만 직장에서는 직원들을 착취하는 사람과 주중기도회는 고사하고 주일예배에 띄엄띄엄 나오고 술, 담배를 즐기지만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를 위해 남몰래 꾸준히 기부하고 가난한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 둘이 있다면, 과연 누구의 믿음을 칭찬하시겠습니까? 당연히도 정답은 후자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겉으로 보기에는 누가 봐도 전자의 믿음이 좋아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은 사람들 앞에 자신의 믿음을 드러내고 칭찬 받기 위해 넓은 길을 선택합니다. 그것은 바로 눈에 보이는 교회 생활에 열심을 내는 것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그 자체가 그릇된 것은 아닙니다. 외형적인 신앙생활 역시도 분명 그 나름의 의미와 가치가 있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하면서 점점 복음의 본질에서 길을 잃고 하나님을 위한 신앙이 아닌 나를 위한 신앙으로 변질되기 쉽다는 사실입니다.

이와 같은 경고를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엄중해 깨달아 아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믿음을 진리 앞에 다시금 바르게 가다듬으시길 바랍니다. 우리 주변의 소외된 약자들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보며 그들을 위해 더욱 나누고 섬기는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나를 위한 믿음에서 벗어나 참으로 하나님을 위한 믿음을 간직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댓글 2개:

  1. 주님을 위한 신앙이어야했는데 교회만 왔다갔다하는 무늬만 크리스챤이었음을 회개합니다 죄를 용서하여주세요 주님감사합니다 예수님사랑합니다 예수님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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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부족한 설교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위로와 평안히 더욱 함께 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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