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월 25일, 목, 삼덕교회 새벽기도회, 목사 정대진
사도행전 10장 1~16절 "낯설게 다가오시는 하나님"
1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 부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2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
도하더니 3 하루는 제 구 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이르되 고넬료야 하니 4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5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6 그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유숙하니 그 집은 해변에 있다 하더라 7 마침 말하던 천사가 떠나매 고넬료가 집안 하인 둘과 부하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불러 8 이 일을 다 이르고 욥바로 보내니라 9 이튿날 그들이 길을 가다가 그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그 시각은 제 육 시더라 10 그가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들이 준비할 때에 황홀한 중에 11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12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더라 13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어라 하거늘 14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한대 15 또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16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려져 가니라
잘 아시다시피 사도행전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구절은 1장 8절입니다. 부활 하신 예수님께서는 하늘로 오르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복음이 가진 범우주적인 확장성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의 삶과 가르침을 통해 구약의 핵심 사상은 이어가되 구원의 대상은 파격적으로 넓히셨습니다. 더욱 정확하게는 창조주 하나님이 본래 뜻하신 넓은 구원의 속성을 몸소 확증하셨습니다.
오랫동안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육체적 혈통을 타고난 자신들만을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믿고 따르는 모든 사람들이 예외 없이 하나님의 드넓은 품에 안길 수 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래서 복음은 더 이상 예루살렘과 온 유대에만 국한되지 않고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뻗어나가게 됩니다.
사도행전은 그와 같은 광활한 선교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기록한 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서 읽은 9장에서는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 받은 바울의 극적인 회심을 소개 하였습니다. 문제는 그럼에도 그는 기독교 신앙공동체에서 아직 비주류 외부인이라는 사실입니다. 많은 존경을 받고 있는 바나바의 보증이 있긴 했지만 여전히 교인들의 마음에는 어느 정도의 경계심이 남아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게다가 그 때는 아직 기존의 유대교와 기독교의 차이가 불분명하던 시대입니다. 사도행전은 물론이고 신약의 여러 서신서들을 통해서 쉽게 확인할 수 있듯이 그 당시 상당수 기독교인들, 특별히 그 중에서도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를 중심으로 한 유대계 기독교인들은 구약 성경의 사고방식으로 예수님의 복음을 이해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까지 뻗어간다는 진리를 이해할 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노골적인 거부감을 보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바울과 같은 외부인이 아니라 모든 교인들이 권위를 인정하는 핵심리더의 전적인 인정이 필요 했습니다. 그 적임자가 바로 베드로입니다. 그런 까닭에 사도행전의 저자는 바울의 회심에 이어 베드로가 겪은 인식의 획기적인 변화를 의도적으로 연달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등장시킨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고넬료입니다.
본문 1절은 그의 사회적 지위를 알려줍니다. 고넬료는 가이사랴에 주둔 중인 로마군 장교입니다. 강력한 군사력을 기반으로 제국을 확장시켜 왔던 로마에서 해외 분쟁지역에 파병된 장교는 당대 최고 엘리트로서 상당한 부와 명예를 누렸습니다. 게다가 일반적으로 몇 년 안에 고국으로 돌아가 상당히 높은 위치에 오르게 됩니다. 그것은 곧 복음 전파에 매우 유용한 영향을 가지게 됨을 의미합니다. 본문 1절은 바로 그와 같은 어마어마한 가능성에 대한 기록입니다.
놀라운 점은 그러한 로마 장교가 하나님을 경외하였다는 사실입니다. 그 당시 이방인들 가운데에는 로마의 다신교 문화에 환멸을 느껴서 이와 정반대의 신앙을 가진 유대교에 호감을 가지고 회당 예배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습니다. 고넬료가 바로 그런 경우 였습니다.
본문 2절은 그의 신앙을 소개합니다. 제가 다시 읽어 드리겠습니다.
2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우리말 번역으로는 “하나님 경외”와 “백성 구제”와 “항상 기도하는 것”이 병렬적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헬라어 원문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경외”가 상위 개념이고 “백성 구제”와 “기도”는 하위 개념입니다. 즉, 고넬료는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에 그 결과로 약자들을 돕고 늘 기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사 역시도 4절에서 그의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드려졌다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다시금 분명히 확인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신앙은 수직적인 기도와 종교 생활만이 아닙니다. 그와 동시에 수평적인 나눔과 섬김의 균형을 갖춰야 합니다. 고넬료는 비록 로마인이었지만 회당예배에 낭독된 율법을 통해 이와 같은 구약의 핵심을 정확히 이해했고 그것을 실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복음의 역사를 바꾸는 중요한 인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말씀을 통해 그를 본받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조화를 이루는 참으로 건강한 신앙을 지켜가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고넬료에 대해서 우리가 주의를 놓쳐서는 안 될 점은 그는 아직 유대교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여전히 예수님을 모른 채 진리의 절반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 일방적으로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살고 있는 도시와 머무르고 있는 집 주인의 이름을 정확히 일러 주시며 그의 부하들을 보내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고넬료로 하여금 베드로를 통해 예수님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거듭 말씀드리지만 아직 유대교 신앙에 갇혀 있던 그로서는 완전히 새로운 낯선 진리와의 만남입니다.
이는 베드로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게다가 하나님께서는 더욱 충격적인 방식으로 그에게 낯선 진리를 알려주셨습니다. 어느 날 베드로는 제 육시에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갔습니다. 이것은 율법의 전통에 따라 기도하는 시간입니다. 게다가 이 때 “제 육시”는 오늘날로 따지면 12시, 즉 정오입니다. 태양이 작렬 하는 중동에서 한낮에 지붕에 올라 기도하는 것은 너무나 힘겨운 일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베드로의 태도는 그가 여전히 유대교 경건 전통에 익숙해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런 그가 기도 중에 환상을 보았습니다. 하늘에서 큰 보자기가 내려왔는데 거기에는 율법이 금지한 음식들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런 음식들은 먹지 않는 것이 그동안 그에게 익숙한 진리였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에게 매우 낯설고 불쾌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바로 그 부정한 음식들을 먹으라는 명령입니다. 그 명령을 두고 베드로는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라고 무려 세 번이나 거부하였고 그럴 때마다 하늘에서는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는 음성이 울려 퍼졌습니다.
이러한 환상의 뜻은 내일 읽을 17절 이하의 본문을 통해 이해하게 됩니다. 바로 고넬료와의 만남을 통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렇듯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은 두 사람 모두에게 있어 낯선 진리의 수용을 뜻했습니다. 그리고 그 만남을 통해 복음은 더욱 본격적으로 혈통과 지역과 계급의 경계를 넘어 역동적으로 전파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따라서 우리 역시 낯선 하나님을 맞아들일 용기를 가져야합니다. 만유의 하나님께서는 결코 사람들의 좁은 경험과 지식에 갇히지 않으십니다. 사람들의 그 어떤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으시는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전혀 새로운 얼굴로 다가오십니다. 때때로 그 얼굴에는 우리가 결코 예상치 못했던 고난의 상처가 남아있기도 하고 시련의 눈물이 흘러내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본문 속 베드로처럼 주님을 향해 “결코 그럴 수 없다고” 외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결코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십자가 위에서 낯선 하나님을 몸소 만나셨다는 사실 말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대신해, 골고다 언덕 위에서 숨을 거두시며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울부짖으셨기에 온 세상은 구원을 얻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가장 낯설고 추하고 끔찍한 복음 한 복판에 서셨기에 우리는 부활의 찬란한 생명과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하루도 뜻밖의 방식으로 다가오는 저마다의 십자가를 기쁨으로 짊어지시길 바랍니다. 그러한 새로운 삶의 장면들이 종종 아프고 허탈하게 하지만 그 모든 순간들이 알알이 이어져 끝내 우리를 진정한 복음의 증인으로 바로 세우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진리 앞에 고개를 숙이며 이 시대의 고넬료이자 베드로로 참된 경건을 지켜나가는 모두가 되시길 진심으로 바라며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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