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2월 5일 월요일

스가랴 3장 1~10절 "아름다운 옷을 입히며"

2017년 12월 4일, 월, 삼덕교회 새벽기도회, 목사 정대진
스가랴 3장 1~10절 "아름다운 옷을 입히며"

1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천사 앞에 섰고 사탄은 그의 오른쪽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2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3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서 있는지라 4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령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5 내가 말하되 정결한 관을 그의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결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천사는 곁에 섰더라 6 여호와의 천사가 여호수아에게 증언하여 이르되 7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만일 내 도를 행하며 내 규례를 지키면 네가 내 집을 다스릴 것이요 내 뜰을 지킬 것이며 내가 또 너로 여기 섰는 자들 가운데에 왕래하게 하리라 8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너와 네 앞에 앉은 네 동료들은 내 말을 들을 것이니라 이들은 예표의 사람들이라 내가 내 종 싹을 나게 하리라 9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 여호수아 앞에 세운 돌을 보라 한 돌에 일곱 눈이 있느니라 내가 거기에 새길 것을 새기며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거하리라 10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너희가 각각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리라 하셨느니라


오늘 함께 읽은 본문에는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등장합니다. 아마 이 자리에 계신 대부분의 성도님들은 “여호수아”라는 이름이 익숙하실 겁니다. 모세의 뒤를 이어 출애굽을 완성시킨 위대한 지도자가 바로 눈의 아들 여호수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성경에서 “여호수아”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한 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이름의 뜻은 “주님은 구원이시다.”라는 원초적인 신앙고백을 담고 있기 때문에 성경 곳곳에 동명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게다가 여호수아의 헬라식 발음이 <이에수스> 즉, 예수님의 이름이 됩니다. 심지어 몇 십 년 전 우리나라의 철수와 영희처럼 그 시대 가장 흔한 이름이기도 하였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지만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입니다. 학개서와 스가랴서에 따르면 그는 스룹바벨과 함께 포로 후기 유다 공동체를 인도한 대표적인 지도자입니다. 마치 출애굽 당시 모세가 정치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고 아론이 종교지도자의 사명을 맡았듯이, 포로에서 귀환하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스룹바벨은 정치지도자로, 여호수아는 대제사장으로서 백성들의 신앙을 돌보는 사람이었습니다.

열왕기하 25장 18~21절의 기록에 따르면 여호수아의 할아버지 스라야는 예루살렘이 멸망할 당시의 대제사장이었으며, 바벨론에 사로잡혀 립나로 끌려가 숨을 거두었습니다. 스라야의 아들이자 여호수아의 아버지인 여호사닥 역시 마찬가지로 포로로 잡혀가 바벨론에서 여호수아를 낳았습니다. 즉,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역사상 최초로 이방 땅에서 태어난 대제사장입니다. 이것은 그 개인의 비극적인 가정사를 넘어 현재 민족공동체가 처해 있는 고난을 신앙으로 이겨낼 막중한 책임을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렇게 그는 나면서부터 받은 소명 그대로 스룹바벨과 함께 포로 공동체를 이끌고 유다에 돌아 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토록 중요한 사명과는 달리 너무나 초라한 모습으로 본문에 등장합니다. 바로 사탄으로부터의 고발입니다. 본문 1절을 보시면 사탄이 여호수아의 옆에서 그를 대적하였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이 사탄이라는 존재의 이름은 히브리어로 “고발하다, 대적하다”는 뜻을 가집니다. 즉, 본문은 일종의 법정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사탄이 일종의 검사 역할을 하며 여호수아의 잘못을 주님 앞에 폭로하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거듭 확인 할 수 있는 것은 욥기에서의 사탄이 그러했듯이 그들은 하나님과 일대일로 맞설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사탄은 철저히 하나님의 통치에 굴복하는 존재입니다. 다만 우리가 차마 헤아릴 수 없는 주님의 깊은 섭리 아래서 약간의 활동이 허락돼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진리를 명심하면서 때때로 삶속에 이해할 수 없는 시련이 찾아온다 할지라도 쉽게 좌절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권능을 더욱더 신뢰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2절 이하에 보면 그러한 주님의 신실한 은혜가 더욱더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를 고소한, 사탄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가리켜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 같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여호수아가 바벨론에 의한 남유다의 멸망과 포로기라는 고난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3절을 보면 사탄이 여호수아에 대해 고발한 내용이 나옵니다. 그것은 바로 “더러운 옷”을 입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 때, 이 “더러운 옷”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파악하기는 어렵습니다. 성경이 굳이 자세히 말하지 않는 것은 그냥 그대로 내버려둘 필요가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여호수아의 마음이나 영혼과 같은 인격이 더러워 진 것이 아니라 그 위에 걸쳐진 무엇을 상징하는 “옷”이 더럽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이때의 더러움은 그 자신만의 잘못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가 놓인 상황과 환경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이사야서에 기록된 비슷한 내용을 통해 그 뜻을 어렴풋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4장 4절에 보면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과 “예루살렘의 피”가 평행을 이룹니다. 이때의 피는 불의하고 억울하게 죽은 죽음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예언의 전승을 따른다면 지금 여호수아의 옷을 더럽힌 것은 그 시대, 여전히 하나님의 정의와 공평을 따르지 않고 저질렀던 이스라엘의 폭력과 죄악을 가리킵니다.

그 모두를 지금, 여호수아가 온 민족을 대신하여 둘러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비참한 모습을 하나님께서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4, 5절 제가 읽겠습니다.

4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령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5 내가 말하되 정결한 관을 그의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결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천사는 곁에 섰더라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를 완전히 변화 시키셨습니다. 그 더러운 옷을 벗긴 것은 물론이고 아름다운 옷을 입히셨고 게다가 머리에는 정결한 관을 씌우셨습니다. 그리고 제사장으로서 감당해야할 중요한 사명을 다시금 일깨우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7절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길을 따르며 그 말씀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이어서 주님께서는 그러한 순종에 대한 결정적인 약속을 10절에 하셨습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10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너희가 각각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리라 하셨느니라

여호수아가 포로 귀환한 유다 공동체를 말씀으로 온전히 섬겼을 때, 마침내 그들 가운데 이루어질 주님의 약속은 바로 각각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말씀의 의미가 얼핏 잘 이해 되지 않습니다. 이를 깨닫기 위해서 참고해야 할 말씀이 미가 4장 4절입니다.

미가 4장 1~5절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마지막 날에 이루어질 아름다운 주님의 나라의 모습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4절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4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을 것이라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의 입이 이같이 말씀하셨음이라

금세 이해하시겠지만 오늘 본문 10절과 정확히 내용이 일치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10절의 약속을 주셨다는 것은 곧 미가서에 담긴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운 통치가 그를 통해 이루어지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포로귀환 시대, 유다 백성들의 신앙을 이끌었던 여호수아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와 약속의 내용입니다. 그래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다소 거리감 있는, 어찌보면 솔직히 별 상관없는 내용의 말씀으로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분명히 기록된 바와 같이,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구원 아래서 “왕 같은 제사장”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 자신은 물론이고 이웃과 나라와 세계를 아름답게 가꿀 책임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호수아의 더러운 옷과 마찬가지로 이 복잡한 세상의 폭력적인 구조 한복판을 지나며 살아가는 모두는, 알게 모르게, 고의든 그렇지 않든 죄악에 노출되며 때때로 공범으로 살아가는 것이 분명한 현실입니다.

잘 이해가 안 되신다면 지난 한 주간 무엇에 돈을 쓰셨는지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구입한 상품 중 상당수는 제 3세계 어린 아이들의 값싼 노동력에 의존한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환경파괴에 앞장 서는 기업의 물건을 구입하기도 하고, 심각하게 불법적인 경영을 하는 회사의 제품을 구입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선택과 행동은 각 사람의 특별히 나쁜 의도가 있거나 악해서가 아니라 이 세상이 그만큼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완벽 무결하게 살아가라는 말씀을 드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오늘 우리가 입은 옷에 묻은 저마다의 더러움이 무엇인지를 부지런히 살피며 늘 깨어 정결하게 되기를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를 참으로 새롭게 하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심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 하나님의 뜻을 말씀을 통해 부지런히 살피며 이 세상 가운데 예수님의 뜻과 통치를 이루어 가기 위해 온 삶을 드려야 합니다. 바로 그것을 위해 주님께서 이 새벽에 우리를 기도의 자리로 불러 모으셨음을 믿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이 시대를 위한 참된 중보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하고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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