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2월 13일 화요일

사도행전 17장 1~15절 “따르거나 대적하거나”

2018년 2월 13일, 화, 삼덕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정대진 목사
사도행전 17장 1~15절 “따르거나 대적하거나”

1 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2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
하며 3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4 그 중의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나 5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하게 하여 야손의 집에 침입하여 그들을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6 발견하지 못하매 야손과 몇 형제들을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7 야손이 그들을 맞아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 8 무리와 읍장들이 이 말을 듣고 소동하여 9 야손과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보석금을 받고 놓아 주니라 10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그들이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11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12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13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은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베뢰아에서도 전하는 줄을 알고 거기도 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하게 하거늘 14 형제들이 곧 바울을 내보내어 바다까지 가게 하되 실라와 디모데는 아직 거기 머물더라 15 바울을 인도하는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아덴까지 이르러 그에게서 실라와 디모데를 자기에게로 속히 오게 하라는 명령을 받고 떠나니라


앞선 16장은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히는 고난을 겪는 바울과 그의 일행에 대해 기록하였습니다. 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로마 시민권 덕분에 풀려나긴 했지만 진리를 전파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매우 힘겹고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바울은 17장에서 여전히 굴하지 않고 맡겨진 사명을 묵묵히 감당하였습니다.

바울 일행은 소아시아의 도시인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거쳐 데살로니가에 도착하였습니다. 데살로니가는 로마제국의 속주 중 하나인 마케도니아의 수도이자 로마 총독이 머무는 주요도시입니다. 또한 그 곳에는 상당히 커다란 규모를 가진 유대인 공동체가 있었기 때문에 초기 선교에 있어 매우 중요한 장소이기도 합니다. 

거기서 바울은 “자기의 관례대로” 유대인들의 회당에 들어갔습니다. 이 때 “관례대로”라는 말을 “습관대로” 혹은 “늘 하던 대로”라고 바꿔도 무방합니다. 여기서 “회당”은 잘 아시는 바대로 오늘날 교회처럼 유대인들이 지역마다 세운 신앙의 중심입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바울의 일관된 선교 전략은 먼저 유대인들에게 다가가는 것이었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우선, 아직 유대교와 기독교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아서 바울 스스로가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미 구약성경을 충분히 잘 알고 있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굳이 많은 설명을 할 필요 없어 효율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바울은 선교지에 도착할 때마다 유대인들이 몰려 있는 회당에 가장 먼저 찾아 갔습니다. 마찬가지로 데살로니가 회당에 모인 유대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했는데 무려 3주간이나 성경을 토대로 치열한 토론을 벌였습니다. 그 때 그가 전한 선포의 핵심이 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3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우리는 여기에서 기독교의 핵심 진리를 명확히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께서 곧 구약 성경이 증언한 메시아, 즉 그리스도라는 사실입니다. 한편 이러한 바울의 증언은 그 시대 유대인들이 메시아에 대해 가졌던 일반적인 기대와는 정 반대되는 내용입니다. 그들은 강력한 힘과 지도력을 가진 전제군주로서의 메시아를 고대하며 그가 언젠가 로마제국을 물리쳐 주리라 기대하였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심지어 제자들조차 이런 오해에 사로 잡혀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는 바울의 외침은 그날 회당에 모여든 유대인들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충격과 혼란을 안겨주었습니다. 그 결과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뉩니다. 바로 복음을 따르는 사람들과 복음에 분노하는 사람들입니다. 먼저 4절에 보면 사도행전 10장의 고넬료처럼, 외국인이지만 야훼 신앙에 매료된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이 바울과 실라가 전한 진리를 받아들였습니다.


반면 5절 이하의 기록을 통해 그 외 다수 유대인들의 부정적인 반응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격노하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바울 일행이 잠시 머물고 있던 야손의 집에 불량배들과 함께 쳐들어갔습니다. 마침 바울은 이미 몸을 피한 후였지만 불타오르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한 채 야손과 그의 형제들을 지역 관원들에게 끌고 가 처벌을 받게 하였습니다.

명심해야할 점은 이런 장면이 사도행전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복음서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점입니다. 예수님 앞에 사람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말씀 앞에 엎드려 그분을 주님으로 믿고 따르는 사람들과 말씀을 업신여기며 거침없이 화를 낸 사람들입니다. 그 둘의 차이는 진리와 탐욕 중에 무엇을 우선 하느냐에 따라 나뉩니다. 그 결과 첫 번째 사람들에 의해 복음은 온 세상을 향해 전파 되었고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었습니다. 반면 두 번째 사람들에 의해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스스로를 향해 엄중히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과연 복음을 따르는 사람들입니까? 아니면 복음을 무시하고 대적하는 사람들입니까? 물론 당연히 이 자리에서 자신을 두 번째 종류의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실 분들은 없으실 겁니다. 새벽 일찍 고단한 몸을 깨우고 이 거룩한 기도의 자리로 오는 것은 굉장한 열정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과 바울을 옥에 가둔 사람들 역시 자기들 나름에는 뜨거운 신앙을 가졌다는 사실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나 열심히 교회 생활하는 지가 아닙니다. 아무리 봉사를 많이 하고 매일 부르짖어 기도한다 할지라도 신앙의 중심에 십자가 없이 탐욕만 도사리고 있다면 그 “열심”이 크면 클수록 복음을 대적하는 비극적인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물론 이것은 특정 몇몇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저를 비롯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종종 범하는 잘못입니다. 우리는 상황에 따라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가기도 하고 복음의 반대자가 되기도 합니다. 이는 “의롭다 칭함은 받은 죄인”이라는 모순적인 존재로서의 숙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말씀 앞에서 스스로를 바로 세워 주님의 뜻 앞에 겸손히 귀 기울이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것이 또한 이 기도의 자리에 함께 모인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며 저마다의 간절한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 자체는 너무나 중요한 일입니다. 문제는 기도의 중심이 “나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웃의 아픔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십자가와 부활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깊이 묵상하며 그 뜻이 나의 삶을 통해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더욱 섬기고 희생하고 포용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한편 위험을 피해 베뢰아에 도착한 바울 일행은 이번에도 역시 그 곳에 있는 유대인 회당에 찾아갔습니다. 그는 그 곳에서 모처럼 휴식 같은 순간을 맞이하였습니다. 거기에서는 핍박이 아닌,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결실은 베뢰아 사람들 특유의 성품과 태도 덕분임을 본문을 밝히고 있습니다. 11절 제가 읽겠습니다.

11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베뢰아 사람들은 바울이 전한 말씀을 무시하지 않고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날마다 성경을 깊이 연구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다른 지역의 사람들과는 달리 더 “너그러운”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보다 원문에 가깝게 바꿔보면 “보다 품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경험과 생각으로 제한하지 말아야 합니다. 날마다 낯설게 대하며 무한히 넓은 주님의 뜻을 깊게 고민하고 묵상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신앙의 품격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하루도 베뢰아 사람들처럼 품격 있는 신앙으로 말씀을 바로 깨닫고 전하는 모두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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