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2월 8일 수요일

창세기 1장 26-28절, 5장 1-2절, "하나님의 형상으로"

2016년 7월 13일, 부산진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정대진 목사
창세기 1장 26-28절, 5장 1-2절, "하나님의 형상으로"

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1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2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먼저 감사의 말씀 드리겠습니다. 성도님들의 귀한 중보와 도움 덕분에 지난 주 금요일부터 주일까지 예담 여름캠프를 무사히 마쳤습니다. 아울러 영유아부 여름캠프도 은혜 가운데 지난 주일에 잘 마무리 되었습니다. 이제 앞으로 유치부와, 초등 1.2부, 중고등부 캠프가 남아 있습니다. 이번 캠프를 통해 우리교회 다음세대들이 더욱 성숙한 신앙을 가질 수 있도록 보다 많은 기도와 관심 부탁드립니다.




교회 곳곳에 붙어있던 포스터를 보신 분들을 아시겠지만 이번 예담 캠프의 주제는 바로 “진아야 안녕?” 이었습니다. 아마 많은 교우님들께서 그것을 보시고 조금은 당황해하며 그 뜻을 궁금해 하셨을 겁니다. 이 때, “진아”는 참 진(眞), 나 아(我)를 합해서 “진정한 나”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번 캠프를 통해 청년들이 자신들의 참된 자아를 발견하길 바라는 마음에 그렇게 주제를 잡고 진행했습니다.




특별히 저는 우리 청년들이 스스로가 “하나님의 형상”임을 분명히 명심할 것을 말씀을 통해 거듭 강조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청년들뿐 만 아닌, 저를 포함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소중한 정체성일줄 믿습니다. 따라서 앞서 청년들과 나눴던 말씀을 이 시간 성도님들과 함께 다시 나누려합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소중한 정체성을 거듭 회복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첫 번째로, 우리가 가진 하나님의 형상을 통해 깨달아야할 진정한 나는 ‘하나님의 주목을 받는 존재’입니다.




창세기는 성경 중 가장 앞에 위치한 책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흔히 이 책이 다른 성경들보다 제일 먼저 기록된 것으로 오해하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많은 논란의 여지가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창세기가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벨론에서 포로살이 하던 시절에 최종적으로 편집, 완성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창세기는 험난하고 처절했던 역사의 한복판을 살아가는 주님의 백성들이 그 힘겨운 현실에도 불구에도 고백하는, 자신들의 믿음을 담은 기록입니다. 그렇다면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의 창조를 묘사한 까닭은 이것을 통해 우주의 기원에 대한 “과학적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 대신 온 세상을 향한 주님의 창조를 믿는, 그 믿음을 표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 말씀에 담긴 창조사건을 과학적인 기록이 아닌, “믿음의 고백” 차원에서 상상력을 펼쳐 다시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거대한 암흑 속에 한 줄기 빛이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그 빛은 하나의 공간을 향해 비추었습니다. 그러자 그 곳에 지붕, 즉 하늘이 펼쳐졌습니다. 이어서 그 하늘 밑에는 땅과 바다가 생겼을 뿐만 아니라 각종 채소와 과일들이 움터 올랐습니다.




또한 그 동식물들이 활동하는 데 필요한 열과 에너지를 뿜어줄 태양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밤하늘을 밝히는 달은 물론이고 고대인들이 거리와 위치를 측정할 때 절대적으로 도움을 받는 무수한 별들이 생겨났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휘황찬란한 배경 아래서 새들과 물고기들과 여러 동물들이 역동적으로 움직였습니다.




바로 이러한 과정 끝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이를 통해 그 모든 창조세계가 사람이 만들어지고 살아가는 찬란한 배경이 되고, 천지창조의 순서 자체가 점점 인간 창조를 향해 좁혀오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창조의 “절정”으로서 인간의 정체성이 결정적으로 드러나는 대목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다함께 27절 말씀 읽겠습니다.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주님께서는 사람을 그저 평범한 존재로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른 피조물들과는 달리 오직 인간에게만 당신의 “형상”을 부여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형상”이라는 말이 26절과 27절에 무려 세 번이나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와 같은 사실을 통해 위대한 천지창조 가운데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거룩하고 찬란하게 구별되어 만들어 졌음을 분명히 확인하게 됩니다.




그러나 한 편으로 생각해 보면, 그 거대한 온 우주 가운데 인간은 겉으로 보기에 너무나 작디작은 존재에 불과합니다. 산이든 바다든 거대한 자연 앞에 서 본 경험이 있는 분들은 분명 공감하실 겁니다. 잠깐 불어오는 바람에도 온 몸이 주체할 수 없이 흔들릴 때, 까마득한 높이와 깊이의 위압감을 느낄 때, 우리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유한한지를 생생하게 실감합니다.




비단 자연환경뿐만 아니라 곰과 호랑이를 비롯한 맹수들에 견주어 봐도 인간의 신체 능력은 나약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리고 온 지면 위를 화려하게 수놓은 꽃들과 나무에 비교해 볼 때도 사람의 외면이 갖는 아름다움 역시 그리 대단하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사람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거대한 세계 속에 뭐하나 제대로 내세울 만한 게 없는 먼지와 같은 생명체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온 우주 가운데 단 하나, 오직 사람만 당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이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리는 이와 같은 사실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지으신 그 놀랍고 위대한 세계 속에서 지극히 미미하고 보잘 것 없는 피조물인 인간을 한 없이 주목하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사람에게 집중하고 관심을 두시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사람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간절히 사랑해 보았던 경험을 떠올려 본다면 이러한 복음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제 아무리 많은 인파 속을 지나친다 할지라도 그 안에 사랑하는 이가 있다면 우리는 금세 그 사람을 알아보고 주목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이 무한한 온 우주를 지으시며 단 한 존재, 사람에게만 당신의 형상을 심어두시고 바라보시며 사랑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험난한 바벨론 포로생활 속에서도 끝까지 지켜낸 창조신앙입니다. 그들은 그 시대 일반적인 상식대로 왕과 귀족만이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자신들처럼 천대받는 포로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믿음을 결코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 가운데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굳게 신뢰하였습니다.




사도요한이 자신의 편지를 통해 명확히 선언하였듯이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요일 4:8). 그렇게 주님의 본질이 곧, 사랑이시기에 성부, 성자, 성령, 각각 구별된 인격을 가지신 세 분께서는 서로 간에 한없는 사랑과 섬김을 나누시면서 한 존재가 되셨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삼위일체 하나님은 충분히 그 스스로 부족함 없이 살아가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함께 사랑을 나눌 또 다른 누군가를 창조하실 것을 결심하셨습니다. 그래서 말씀으로 온 우주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도 더욱 특별한 사랑의 대상을 지으셨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을 향한 주님의 말도 안 되는 사랑이 가능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무엇보다 심지어 당신 자신보다 사람을 사랑 하시고 주목하시며 끝없는 관심을 놓지 않으십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아들이 참 사람이 되셔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전하시다가 마침내 십자가에 달려 숨을 거두셨습니다. 그리고 그 깊고 깊은 죽음과 절망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셔서 진정한 생명과 희망을 모든 사람들에게 안겨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무한한 사랑의 대상임을 항상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을 어떻게 보든 간에, 심지어 스스로조차 자신을 어떻게 판단하는지와 상관없이 우리 모두는 항상 하나님의 사랑어린 주목과 관심을 받는 존재라는 이 소중한 정체성을 결코 잊지 말고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온 우주 가운데 단 하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임을 성경이 우리에게 일러주는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우리 안에 담긴 주님의 형상을 바라보면서 스스로를 더욱 아끼고 사랑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 자신을 더욱 긍정하시길 바랍니다. 스스로에 대한 포기와 좌절을 이젠 훌훌 털어버리고 다시금 우리의 창조주 하나님께 나아가 안기시길 바랍니다. 그 하나님께서 지금 이 순간도 우리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고 항상 주목하시며 사랑하십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가진 하나님의 형상을 통해 깨달아야할 진정한 나는 ‘관계를 이루는 존재’입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하나님의 형상”이 말씀 안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본문 1장 27절 말씀 다함께 읽겠습니다.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7절 말씀을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고”라고만 기록해도 내용이해에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문장에 굳이 “하나님의 형상”과 “창조”가 한 번씩 더 반복되어 언급되고 있습니다. 중요한 점은 일반적으로 구약성경에서 반복은 곧 강조를 의미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27절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이 창조되었음을 강조하면서 분명히 드러내고자 하는 바는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 본연의 모습은 혼자가 아닌 “남자와 여자”, 즉 “관계”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런 언급은 여기만이 아니라 아담으로 부터 시작되는 족보를 기록한 5장의 첫 머리에도 등장합니다. 다함께 1, 2절 읽겠습니다.




1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2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이와 같은 창세기 말씀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정체성을 이해하기 위해 우선 각자에게 주어진 “관계”를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본문에 따르면, 주님께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관계를 이루게 하시려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2장 18절에 주님께서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다.”고 말씀하신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는 것은, 직접적으로는 아담과 하와와 같은 부부 관계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어쩌면 결혼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부족한 것인가? 라는 의문도 자연스럽게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창세기가 기록될 때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세계관은 전혀 다르다는 점을 유념해야 합니다. 오늘날은 옛날과 비교해 보면, 결혼 제도와 가족의 구성이 확연히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미혼(未婚)이 아닌 비혼(非婚)을 선택한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에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는 의미를 이해할 때 단순히 “결혼”을 넘어 남, 녀 사이의 “다름”을 주목해야 합니다.





관련해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구약성경은 “히브리어”로 기록되었습니다. 저는 대학교 4학년 1학기 때 처음으로 히브리어 수업을 들었는데 중간고사 까지만 하더라도 나름 즐겁게 열심히 공부했지만 기말이 가까울수록 도무지 진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헤맸던 기억이 있습니다. 심지어 교수님께서 수업 중에 하시는 말씀도 히브리어처럼 들렸습니다. 그만큼 고대 언어를 공부한다는 게 매우 어려웠습니다.




그래도 무사히 한 학기를 마치며 곧 바로 이어진 여름방학 때 제 아내를 소개 받아 오랜 모태솔로 생활을 마치고 처음으로 본격적인 연애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행복하고 즐거운 연애를 즐겼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알게 된 놀라운 사실은 “여자의 말은 히브리어보다 어렵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한국말인데 도무지 어떻게 해석해야할지 모를 때가 참 많았습니다. 




오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당연히 여성의 표현방식을 비하하려는 뜻이 아니라, 그만큼 남녀의 “다름”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반대로 여성분들 역시 남성과의 의사소통에 곤혹스러워 했던 경험이 분명 많을 줄 압니다.




이것은 아마 여러분도 충분히 공감하실 겁니다. 이성교제를 하고, 결혼을 해서 부부로 지내다 보면, 상대의 인격과 성품과는 별개로 남과 여라는 근본적인 이질감 때문에 불필요한 오해를 하고 상처를 주고받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부부사이 뿐만 아니라 다른 가족 관계 그리고 직장 등에서 자주 겪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으로 사람을 창조 하시면서 한 종류로만 만들지 않으시고, 굳이 극명하게 다른 남자와 여자, 이렇게 둘로 지으신 까닭은 분명합니다. 서로가 확연히 다른 사람들끼리 서로의 경계를 넘어 아름다운 관계를 쌓아가는 것, 그렇게 서로를 아끼고 섬기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본질인 사랑과 맞닿아 있고 이것을 드러내기 위해 당신의 형상으로 사람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가 살아가며 수많은 관계의 문제를 겪게 됩니다. 얼마 전에 라디오로 들었던 사연 하나를 소개 해 드리겠습니다. 고부간의 갈등으로 괴로움을 겪는 어느 30대 중반 며느리의 이야기입니다. 이분이 겪는 문제는 일반적인 가정처럼 시어머니가 아들에 대한 사랑이 극진해서 며느리를 질투하는 게 아니라 철저히 이기적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어려운 회사 사정으로 밤늦게 피곤에 찌들어 집에 들어온 아들을 붙잡고 용돈을 백만원 이상으로 올려달라고 한 시간 넘게 떼쓸 때도 종종 있었습니다.




더 끔찍한 일은 손녀에게 하는 행동입니다. 며느리가 맞벌이를 하기 때문에 그 시어머니가 3살짜리 손녀를 봐주었습니다. 물론 그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문제는 며느리가 부득이 퇴근이 늦을 때마다 “너는 자기 딸을 사랑하지 않아!”라고 함부로 말을 했습니다. 가장 소름끼치는 것은 시어머니가 며느리가 듣는 앞에서 대놓고 옹알이하는 손녀에게 하는 다음과 같은 말입니다. “넌 참 불쌍하다. 엄마한테 사랑도 못 받아서”, “넌 커서 네 엄마 담지 말아라.”




여러분 어떠십니까? 이야기만 들어도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지 않으십니까? 그런데 충격적인 사실은 이 시어머니가 교회를 다닌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아주 열심히. 물론 저는 그분의 신앙을 함부로 판단할 수 없고 그럴 자격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가장 가까이 있는 이들에게 씻을 수 없는 모욕과 상처를 안기는 것은 그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형상을 모독 하는 죄입니다. 뿐만 아니라 관계를 통해 하나님의 형상을 완성시키라는 주님의 깊은 뜻에서 멀어지는 일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신앙을 성숙시키기 위해 갖춰야할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는 바로 “공감능력”입니다. 이것은 거창한 게 아닙니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울고 웃는 자들과 함께 웃는 것입니다. 그리고 미안한 걸 미안해 할 줄 알고, 고마운 걸 고마워 할 줄 아는 마음의 성실함입니다. 이것을 너무나 상식적이고 당연한 일로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그렇지 않는 경우가 참 많다는 걸, 심지어 그리스도인 중에도 적지 않다는 걸 어렵지 않게 수긍하실 겁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전하신 하나님 나라는 공감의 눈길과 손길로 가득한 공동체임을 반드시 명심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과 기도 가운데 진정한 나를 찾아가며 우리 안에 참된 관계를 회복하길 바랍니다. 특별히 우리 부산진교회 신앙 공동체가, 서로가 서로에게 진심어린 내면을 비추어주는 맑은 거울이 되길 원합니다. 그리하여 각자 지닌 소중한 하나님의 형상을 올바로 찾아가는 여정에 격려와 응원을 아끼지 않는 소중한 동역자가 되길 소원합니다.





이것이 바로 온 우주 가운데 단 하나 사람에게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시며 남자와 여자로 지으신 주님의 깊은 뜻을 따르는 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몸소 참 사람으로 이 땅에 오시어 사람다운 삶을 살아가신 이유입니다. 그 예수님을 본받아 진정한 나, 진정한 공동체를 이루어 가는 우리 모두 되기를 마음 깊이 바라며 소망합니다.





설교 후 기도

창조주 하나님
온 우주 가운데 단 하나, 오직 사람만 주님의 형상대로 지으시며 놀라운 사랑과 관심으로 주목하셨음을 깨닫습니다. 이 말씀을 따라 스스로를 더욱 긍정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사람을 창조하시며 남자와 여자로 나누어 구별하신 깊은 섭리를 깨달아 알기 원합니다. 너무나 낯설고 다른 사람들을 너그러이 포용하는 마음 갖길 구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 부산진교회가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여정에 함께 동참하고 격려하는 믿음의 공동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진정 닮아야 할 참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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