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2월 8일 수요일

사도행전 1장 1-14절 "내 증인이 되리라"

오순절 후 세 번째 주일, 2016년 6월 5일, 부산진교회 청년예배 설교, 정대진 목사
사도행전 1장 1-14절 "내 증인이 되리라"

1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2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3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4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6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7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9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10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11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12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13 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14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우리는 지금 이 시간 ‘교회 안에’, ‘교회로서’ 이 자리에 모여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일부라고 믿는다면, 그리고 예수님께서 바로 이 교회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음을 믿음으로 고백한다면, 우리는 마땅히 과연 무엇을 위해 교회가 세워졌고 그 교회가 어떻게 오늘 우리에게까지 이어져 있는지를 올바로 알고 이를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사도행전은 바로 그와 같은 질문의 소중한 해답이 되는 책입니다. 특별히 사도행전의 첫 머리인, 본문 말씀을 통해 교회의 교회됨을 더욱 온전히 깨달으며 우리 자신을 복음의 증인으로 드리는 모두 되길 바랍니다.



먼저 1~3절까지의 말씀 다시 한 번 함께 읽겠습니다. 



1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2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3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가장 기본적으로 유념해야할 사실은 성경은 결코 하늘에서 뚝! 하고 떨어진 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분명 저자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록된 말씀을 사람들의 연약한 손을 통해 남기고 전하길 원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은 “누가”에 의해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누가가 지은 성경은 사도행전만이 아닙니다. 그는 사복음서 중에서 가장 길고 자세한 내용을 담은 누가복음을 이미 기록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뒷이야기를 적은 것이 바로 사도행전입니다.



이렇게 그가 기록한 두 권의 책인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다른 성경들과는 구별되는 아주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한 사람 ‘데오빌로’를 향해 보내진 편지였다는 사실입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결코 누가가 책상 앞에만 편하게 앉아 완성한 책이 아닙니다. 그는 바울의 2차 전도여행에 함께 했던 사람입니다. 때문에 그는 사도 바울이 겪어야만했던 온갖 환란과 핍박을 함께 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교회가 마주했던 수많은 궁핍과 위협에도 동참하였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그 숱한 고난의 와중에도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과 하신 일들을 수집하며 기록하였습니다.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못하였던 1세기에 그것은 우리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위험과 수고를 감수한 일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에 장문의 편지를 쓴다는 것은 종이가 몹시 귀한 당시에 경제적으로도 막대한 손실을 의미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모든 어려움 가운데서도 그가 경험하였고 교회가 만났던 예수님에 대해 상세히 기록하여 데오빌로에게 편지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후 성령님의 임재가운데 그분의 제자들이 얼마나 위대하게 교회를 세워갔는지를 기록하기 시작합니다. 



이는 또한 앞서 누가복음을 완성하며 겪은 어려움을 기꺼이 반복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그는 그렇게 눈물과 땀과 피로 무려 A4 용지 약 150쪽이 넘는 방대한 양의 편지를 단 한 사람 데오빌로를 위해 보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그런 그의 위대한 희생의 결실인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당신의 말씀으로 전해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누가는 이것을 감히 상상조차 못했음이 분명합니다.  그는 과연 지금 자기가 한 사람을 위해 고되게 쓰고 있는 이 편지가 수천 년의 시간이 지나 대한민국 부산의 청년들이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읽혀지고 있다는 사실을 예상했을까요? 그것은 데오빌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사랑하는 친구 누가로부터 받아서 주변 이들과 함께 나누었던 그 감격어린 기록이, 오랜 시간동안 무수한 이들의 삶을 변화 시키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전해질 것임을 감히 상상할 수 있었을까요?



그렇다면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곁에 있는 저마다의 데오빌로들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귀한 선물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 그들의 사도행전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흘린 땀과 눈물을 잉크로 삼고 우리의 몸을 펜으로 사용하여 일상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를 기록해갈 때, 주님께서는 결코 우리의 삶을 무의미하게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수천 년 전 의사 누가에게 그러하셨듯이 우리 자신을 이 시대의 사도행전으로 사용하시어 반드시 오늘날의 데오빌로들을 향하여 생명의 은혜를 전하실줄 믿습니다. 그렇게 우리 자신을 나날이 사도행전으로 일구어가는 것이 바로 이 시간 사도행전을 펼 쳐든 당신의 자녀들이 가장 먼저 귀 기울여야 할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제 다함께 6~11절 말씀 읽겠습니다. 



6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7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9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10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11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본문 1-5절은 누가가 앞서 기록한 누가복음에 대한 요약이고, 6절부터 본격적으로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6절에 보면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께 매우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나라를 되찾아 주실 때”가 지금인지를 물었습니다. 그들이 이러한 질문을 하는 데는 중요한 역사적인 배경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로마제국으로부터의 압제입니다.



우리에게는 이와 유사한 역사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35년간의 일제 강점기입니다. 우리나라는 그 비참한 기간 동안 일본에 의해 강제로 주권을 빼앗기고 온갖 끔찍한 핍박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그 때 우리 민족의 가장 큰 소원은 다름 아닌 “대한 독립” 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장에서의 이스라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하루하루 제국주의의 수탈과 폭압을 목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들 자신과 그들 곁에 있는 가장 가까운 이들이 로마 군대의 군홧발에 짓밟히는 것을 수도 없이 경험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그들에게 가장 큰 소망이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로마 제국으로부터의 해방이었습니다.




따라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이스라엘 민중 앞에 나타 나셨을 때 그들이 주님께 가졌을 강열한 기대와 열망을 우리는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이 되어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하여 로마 군인들을 쫓아낸 후 강성한 이스라엘 제국을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그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실로 잔인하기까지 할 정도로 매정한 대답을 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때와 시기, 곧 이스라엘이 다시 회복되는 바로 그 날은 하나님의 손에 쥐어진 것이기에 너희가 알 바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며 겪는 가장 근본적인 고통입니다. 하나님의 시간표는 결코 우리의 시간표와 일치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의지를 넘어 불연 듯 달려오셔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져 올리셨습니다. 하지만 때때로 우리가 결코 원치 않은 아픔과 시련들로 당혹스럽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시련의 시간들을 우리가 원하는 때 걷어가지 않습니다. 그러다 우리의 계획과 생각을 넘어 우리가 미처 기대하지 않은 때에 돌연히 새로운 은혜들을 부어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따라가는 우리가 날마다 이겨내야 하는 삶의 무게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그러한 힘겨운 시간들 속에서도 주님께서는 결코 우리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우리들이 하루하루 직면하는 고난과 역경들 그 자체를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그 시간들을 통하여 우리 안에 불어넣으실 또 다른 생명을 위해 우리의 울부짖음과는 잠시 거리를 두어 응답하실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신실한 하나님의 시간표를 믿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빈 무덤을 신뢰한다면 바로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때와 시기를 담대히 기다려야 합니다. 그것이 곧, 고난의 시간 위를 걸어가는 우리가 가질 올바른 마음가짐입니다.




바로 이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7절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7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제자들이 이스라엘의 재건을 꿈꾸는 것 자체는 결코 그릇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 저마다에게 절실히 필요한 무언가를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그분의 자녀로서 지극히 정당한 행동입니다. 허나 우리의 욕심과 뜻을 앞세워 주님을 어르고 달래려 하는 것, 그래서 하나님의 시간표를 불신하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고 무모한 일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때와 시기는”, “너희가 알 바”아니라는, 어찌 보면 매정한 대답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8절 말씀을 통하여 제자들이 가져야할 바른 신앙 태도를 당부하십니다. 너무나 중요한 말씀이기에 8절 말씀 다시 한 번 다함께 읽겠습니다.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하늘로 오르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성령님의 임재를 강조하십니다. 우리는 바로 이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역 후반에 유독 성령님에 대해 많은 시간을 할애해 자세히 설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떠나 하늘로 오르시기 직전까지 성령님의 임재를 거듭해서 매우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행동은 성령님의 사역이 갖는 본질적인 성격과 연관 되어있습니다.



영국 성공회의 제임스 패커 신부님이 쓴 ‘성령님을 아는 지식’에 보면 매우 흥미로운 비유를 통해 성령님의 사역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거대하고 웅장한 조각상이라면 성령님께서는 어두운 밤 그 조각상을 비추는 투광조명과 같은 분이라는 묘사입니다.



깜깜한 밤에 제 아무리 위대하고 아름다운 조각상이 우리 눈앞에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비추는 조명이 없다면 그 작품이 어떠한 모습인지를 결코 알 수 없습니다. 조명 자체가 조각상은 아니지만 그 조명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조각상의 찬란한 위용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오르신 후 오늘날까지 사람들은 예수님의 육체적인 몸을 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 분을 알고 믿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삶과 선포를 비추어 알게 하시는 성령님을 통해서입니다. 오직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 옛날 이 땅위를 거닐었던 예수님을 바르게 알고 믿으며 그 분을 닮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제자들에게 그런 성령님에 대한 위대한 약속을 하고 계십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우편으로 떠나지만 제자들을 결코 버려두지 않으시고 성령님을 보내실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성령님께서 오실 때, 제자들은 각자 서있는 삶의 자리에 그저 가만 머물러 있지 말고 거기로 부터 벗어나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인이 되는 작은 예수의 삶을 살아가라고 주님은 그들에게 명령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결론적으로 예수님께서 이 땅위에서 제자들을 향해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인 사도행전 1장 7, 8절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는 바는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들은 결코 너희들의 시간표를 고집하지 마라. 하나님께 맡겨라! 주님께서 정하신 그 날을 기다려라! 다만, 성령님을 그대들의 중심에 모시고 그분과 더불어 땅 끝까지 이르러 나의 증인으로 살아가다오!’ 바로 이것입니다.




끝으로 12~14절 말씀 읽겠습니다. 



12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13 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14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이 석 절 말씀은 앞서 기록된 예수님의 강력한 말씀을 듣고 그 분이 하늘위로 들려 올라가시는 것을 분명히 목격한 제자들이 취한 행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감람산에서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온 것입니다. 감람산은 예루살렘 바로 동편에 위치한 산으로서 복음서에 등장한 여러 사건들의 배경이기에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산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감람산에 대해 자세히 이해하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감람산은 연성석회질로 이루어진 산입니다. 따라서 굴을 파기 매우 용이한 지질로 이루어진 산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무덤으로 애용하던 산입니다. 이는 동시에 잠자리를 얻지 못한 가난한 이들이 불편하게나마 잠을 청하고, 쫓겨 다니는 사람들이 몸을 피하는 곳이 되는 적절한 조건이 되기도 했습니다. 



한마디로 감람산은 은둔자들의 산, 버림받고 소외된 이들의 산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왜 그 곳에 모여 있었는지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메시아로 믿고 따르던 예수님께서 극악한 신성 모독죄와 반역죄로 사형 당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 처벌 순서는 당연히 자기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은 음습한 감람산에서 몸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허나 그들이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만나 성령님을 통한, 증인된 삶에 대한 약속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늘 위로 찬란히 오르신 그 분을 본 후 샘솟듯 넘치는 담대함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이들이 거리를 메우는 예루살렘 도성을 향해 용기 있게 발걸음을 내딛었습니다. 즉, 자신들을 사로잡기 위해 혈안이 된 이들 속으로 기꺼이 자신들을 내어 던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취한 행동은 14절 후반부와 같이 마음을 함께하여 오직 기도에 힘쓴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도란 무엇일까요? 기도는 흔히 오해하듯이, 하나님을 우리 쪽으로 끌어당기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이미, 우리를 붙잡고 계신 주님의 신실한 팔 앞에 기꺼이 우리의 전 존재를 내어던지는 일입니다.



6절에 기록된, ‘이스라엘이 회복될 때를 묻는’ 제자들의 모습은 자신들의 시간표로 하나님의 시간표를 덮어버리는, 한 마디로 예수님을 그들의 욕망으로 끌어당기는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 앞에 자신들의 삶을 온전히 드렸을 때 그들은 더 이상 예수님을 끌어당기는 사람들이 아니라 주님께 이끌려 다니는 존재로 변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 후에 벌어진 일들을 우리는 사도행전의 나머지 기록들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모임 가운데 약속대로 성령님께서 강렬히 함께 하셨고 그로 말미암아 그들은 더 이상 우둔하고 어리석은 상태로 머물지 아니하고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갔습니다.




세속적 기준으로 보면 제자들은 철저히 실패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수도 없이 감옥에 갇히고 온갖 형벌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을 잃었습니다. 하루하루 불안과 위험으로 얼룩진 삶들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피와 눈물로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온 세상을 아름답게 변화 시키는 희망이 움터 올랐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소외되고 버림받은 갈릴리 시골 사람들의 모임이 성령님의 거센 임재와 더불어 이 세상 가장 위대한 공동체로 발전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숱한 세월의 언덕을 넘어 지금 이 시간 우리의 모임으로까지 이어져왔습니다. 그들은 이 땅위에서 모든 것을 잃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좌절을 통하여 당신의 은혜와 평화를 역사 속에 이루어 가셨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주님께 내어드림으로 마침내 하나님 나라의 생명에 동참하는 위대한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 마음대로 작성한 시간표를 들이미는 서툰 손목을 따사로이 붙잡으시며 말씀하십니다. ‘네 손에 든 시간표를 버려라! 그리고 내가 정한 그날 기다려라! 이제 곧 성령님께서 네 안에 임재하실 것이다. 네가 그분과 더불어 살 때 너는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된 삶을 살아갈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도행전’으로서의 삶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의 일상을 통해 진실로 이루기 원하는 열매입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응답하여, 오늘 우리 곁에 있는 또 다른 데오빌로들을 향해 믿음으로 나아가는 우리 모두 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소망합니다.




기도 : 우리를 복음의 증인으로 세우시고 보내시는 하나님

우리가 처한 삶의 어려움 앞에서 너무도 자주 어리석은 시간표를 주님 앞에 고집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정한 그 날을 신뢰하며 오늘 우리 안에 이루시는 일들 앞에 겸손히 순종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안에 함께 계신 성령님을 힘입어 담대히 예루살렘으로 나아가 복음의 증인이 되게 함께 하여주시길 원합니다. 그리하여 그 옛날 한 남자의 눈물어린 편지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용하셨듯이 우리의 삶이 또 다른 사도행전이 되어 복음에 갈급한 이 시대의 데오빌로들을 살리고 돕는 진리의 참된 도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 위로 오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봉헌기도 

시간의 주인이신 하나님
우리를 복음의 증인으로 부르시고 세우시는 은혜를 높여 찬양하며 한 주간 구별한 삶의 예물을 드립니다. 기쁨으로 받으시어 부활과 생명이 필요한 곳에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예담청년들을 축복하며 기도합니다. 하나님과 다른 마음의 시간표 때문에 힘들고 지칠 때, 실패와 좌절로 인해 스스로를 질책하며 괴로움에 빠질 때 결코 외면하지 말아 주시옵소서. 항상 주님 안에서 몸과 마음 건강히 지키게 하시고 가정 안에 참된 평화 넘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보냄의 말씀

목사: 사랑하는 여러분 평안히 돌아가십시오. 복음의 말씀을 들었으니 주님의 부활과 승천을 전하는 증인으로 살아가십시오. 성령님께서 진정한 능력으로 우리와 함께하시고 도와주십니다.


예담: 아멘! 우리만의 시간표를 고집했던 어리석음을 내려놓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신실한 계획을 신뢰하며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가겠습니다. 주님! 우리를 이 시대의 사도행전으로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참고자료: 제임스 패커 <성령을 아는 지식>(서울: 홍성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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