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절 네 번째 주일, 2016년 12월 18일, 부산진교회 청년예배설교, 정대진 목사
마태복음 1장 18~25절 "성탄의 조연"
기원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대림절 마지막 주일 예배를 드리며 주님께로 나아갑니다. 어서 오셔서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여 주시고 하나님께서 보이신 진리와 생명의 길을 이루게 하여 주시옵소서. 침묵으로 고백하는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아기 예수님의 오심을 올바로 맞이하는 예배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성경 – 마태복음 1장 18~25절
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19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22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24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25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설교 - “성탄의 조연”
먼저, 준비한 영상 다함께 보겠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1TWNKUETHdg
이 광고를 다들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당시 상당한 화제를 모은 외환은행의 CF 입니다. 나레이션 카피를 다시 읽어 드리겠습니다.
2002년, 2006년 그는 한 골도 넣지 못했다.
하지만 모든 골의 뒤엔 그가 있었다.
광고라는 매체의 특성상 자세히 설명하진 않았지만, 이 짧은 화면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의 의미는 분명합니다. 이영표 선수는 지난 2002년과 2006년 월드컵에 단 한 골도 넣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골의 뒤에서 그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벌써 14년 전이라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2002년 월드컵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인 포르투칼전의 박지성의 골과 이탈리아전의 안정환의 골 모두 이영표가 어시스트 하였습니다.
따라서 월드컵에서 이영표가 직접 넣은 골이 없다고 해서 축구선수로서의 그의 기량과 가치를 폄하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가 맡은 중간 수비수로서 자리는 화려한 스트라이커와는 달리 골을 넣을 기회가 적었을 뿐이고 그는 그것과 상관없이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비록 득점을 얻는 화려한 순간에는 분명 조연이었지만 경기 전체의 흐름에서는 중요한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비단 축구뿐만 아니라 삶의 여러 현장 모두에게 해당되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소위 말하는 ‘인생의 주인공들’ 즉, 성공한 사람들에 대해 과도한 찬사를 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유명한 연예인이나 대기업 회장들을 비롯해서 남들 눈에 띄는 화려한 명성을 날리는 이들만을 우러러 볼 때가 참 많이 있습니다.
물론 그러한 사람들의 치열한 노력에 대해 존경을 표시하고 그들로부터 배울 것을 배우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성공의 원인이 모두 그들의 순수한 노력에만 있다고 믿는 것은 어떻게 보면 굉장히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결코 단순하지 않고 사람들끼리 굉장히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화려하게 남들보다 앞서 있고 눈에 띈다는 것은 가려진 곳에서 알게 모르게 그들의 성공을 도운 수많은 아름다운 조연들이 있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오늘 우리는 대림절 마지막 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올해는 성탄절과 주일이 겹치는데 어느덧 한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이 성탄절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대로 예수님께서 우리 가운데 한 아기로 오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 날의 주인공이 분명히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거룩한 성탄절을 맞이하며 우리끼리 즐겁게 놀고 떠들기 전에 이 세상에 기꺼이 사람의 연약함을 입고 다가오신 예수님의 위대한 은혜와 사랑을 깊이 마음에 새기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그렇게 예수님께서 이 땅 가운데 올 수 있도록 위대한 헌신을 했던 아름다운 조연이 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함께 읽은 성경 말씀은 18절 말씀에서 시작하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태어)나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예수님의 탄생을 위해 헌신한 여러 사람들의 소중한 이야기가 담겨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요셉의 희생을 다함께 살펴보길 원합니다.
첫 째, 요셉은 예수님께서 태어나시기 전에는 “의로움”으로 자신을 희생했습니다.
다함께 18, 19절 말씀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19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18절 말씀에 따르면 요셉과 마리아는 이미 ‘약혼’한 상태입니다. 유대인들은 옛날 우리나라 사람들과는 달리 부모에 의한 일방적인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당사자들의 동의를 얻어서 약혼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마리아와 요셉은 억지로 약혼한 사이가 아니라 서로가 원하고 사랑해서 약혼한 사이입니다.
그런데 그 마리아가 아직 결혼도 안했는데 임신을 했습니다. 게다가 변명이랍시고, 자신이 임신한 게 다른 남자를 가까이 해서가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임신했다는 얼토당토 않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얘길 듣는 요셉은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그는 아마도 이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아, 마리아가 나를 사랑하는 줄 알았는데 다른 남자랑 눈이 맞더니 별 이상한 핑계를 대는 구나.’
그리고 동시에 남자로서 도무지 참기 어려운 분노와 배신감에 치를 떨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가 제사장에게 이 사실을 고발해서 마리아에게 벌을 준다 해도 그 누구도 뭐라 말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직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약혼한 상태라 할지라 다른 남자와 사랑을 나누는 것은 율법에 따르면 돌로 쳐 죽을 정도로 나쁜 죄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때는 모세 율법이 문자 그대로 지켜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하지만 돌에 맞아 죽지는 않더라도 그 시대 여성이 그러한 잘못이 들통 나면 더 이상 결혼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곧 경제적으로 의지할 곳을 잃고 매우 가난하게 살아야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따라서 요셉은 이러한 사회적, 종교적 여건을 통해 얼마든지 마리아에게 협박하거나 복수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천사가 나타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지도 않았음에도 지극히 당연한 분노와 원망으로 마리아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에 19절 말씀에 따르면 ‘가만히 끊고자’했습니다. 이 때 “가만히 끊는다.”에 해당되는 그리스어 원문은 <에불레쎄 라쓰라 아포뤼싸이 아우텐>(ἐβουλήθη λάθρᾳ ἀπολῦσαι αὐτήν.)입니다. 이 문장을 직역하면, ‘그녀를 비밀스럽게 놓아주기로 결심했다.’ 즉, 남몰래 약혼을 취소한 다는 뜻을 가집니다.
그렇게 되면 남들 보기에 요셉은 결혼 전에 마리아를 임신시켜놓고도 제멋대로 파혼한 몰지각한 사람이 됩니다. 그렇다면 마리아는 아무런 벌을 받지 않게 되고 오히려 요셉이 책임감 없는 약혼자라며 남들에게 욕을 먹는 상황이 됩니다. 그러나 요셉은 마리아를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에 자신의 감정과 사회적인 평판보다는 그녀의 안전을 먼저 생각하며 걱정했습니다. 그래서 아기 예수님을 잉태한 그녀 마리아를 살리고자 기꺼이 의롭게 자신을 희생하였습니다.
둘 째, 요셉은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몸 안에 있었을 때는 “인내”로 자신을 희생했습니다.
마리아의 임신으로 무척 힘들어하는 요셉에게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셔서 위로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본문 20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요셉에게 마리아가 다른 남자의 아기를 가진 것이 아니라 바로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임신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요셉은 그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여 마침내 마리아와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태어나시기 전까지 요셉이 어떻게 하였는지에 대한 아주 놀라운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25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25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이 말씀에 따르면 요셉은 “아들을 낳기까지” 즉, 예수님께서 태어나시기 전까지 마리아와 결코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았습니다. 이 대목에서 무척 예민하고 조심스럽지만 지금 여러분이 삶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부딪히고 많이 고민할 “성”性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이른바 “혼전순결”을 지키지 않았다고 해서 함부로 누군가를 비난 하고 정죄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단지 얼마만큼의 스킨십을 했는지를 두고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사실 너무나 유치할 뿐만 아니라 부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남녀 사이에는 그 두 사람만의 복잡한 상황과 관계가 얽혀 있기 때문에 결코 다른 사람들이 함부로 왈가왈부 할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서로에 대한 깊은 신뢰와 욕망에 대한 절제 없이 성을 함부로 대하는 것 역시 결코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미혼남녀 사이의 성은 극도의 쾌락과 동시에 임신을 비롯한 여러 다양한 책임과 대가지불을 수반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부부사이의 성은 결혼이라는 거룩하고 아름다운 언약이 안겨주는 소중한 선물이자 특권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결혼한 성인 남성으로서 당연히 누릴 수 있는 아내에 대한 소중한 권리를 희생하며 마리아가 그녀의 몸에 아기 예수님을 가진 8개월 동안 동침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임신한 기간 동안 한 번이라도 잠자리를 같이 한다면, 그 아기는 훗날 사람들로부터,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요셉의 아들로 오해받을 가능성이 무척 높습니다.
그런 까닭에 요셉은 예수님께서 성령님을 통해 한 여인의 몸에 오셨다는 놀라운 은혜와 신비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자연스런 욕망을 참아내고 인내하며 자신을 희생하였습니다.
셋 째, 요셉은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는 “양보”하며 자신을 희생했습니다.
누가복음 1장 59~63절은 세례요한의 부모가 아들의 이름을 짓는 장면이 기록돼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그의 어머니인 엘리사벳이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 말씀하신대로 아들의 이름을 ‘요한’으로 지으려 하자 친척들이 반대하면서 아버지와 같이 ‘사가랴’라고 지으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통해 알 수 있는 당시 문화는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한 아기의 이름을 짓는 다는 것을 단순히 부모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누군가의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그의 소속을 확인하는 것이고 한 아기는 단순히 부모님만의 소유가 아니라 많은 친척을 이루는 한 가문의 소속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아기의 이름을 짓는 다는 것은 여러 가지를 많이 고려해야 하는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요셉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은 요셉의 첫 번째 아들입니다. 따라서 이름을 짓는데 고려해야할 일들이 더욱 많았을 것이고 분명 그 스스로 짓고 싶은 이름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큰 아들의 이름을 자기 마음대로 혹은 친척들과 가문의 뜻대로 짓지 않았습니다. 21절 말씀 다함께 읽겠습니다.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보내시는 당신의 아들의 이름을 천사를 통하여 요셉에게 분명히 알려주셨습니다. 바로 “예수”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예수”라는 이름을 지어주셨습니다. 이것은 “구원”이라는 뜻을 가지는데, 당시 이스라엘에서 쓰이던 이름이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흔한 이름으로 자신의 아들이 이 세상 속에서 불리게 하시며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향한 구원을 분명히 선언하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마음과 뜻을 요셉은 함부로 무시하거나 잊어버리지 않고 분명히 순종하였습니다. 다시 한 번 25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25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마침내 마리아가 아들을 낳자 요셉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그의 이름을 “예수”라고 지었습니다. 이것은 동시의 그의 믿음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사람들 보기에는 이 아기가 자신의 큰 아들로 보이겠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고 성령을 통해 아기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자 구원자이심을 그 “이름 지음”을 통해 드러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분명, 아들에 대한 아버지로서의 권한을 양보하고 포기한 위대한 희생이자 섬김이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이름의 뜻과 같이 “하나님의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시고 예언자 이사야가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생생한 증거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우리에게 성탄절의 참 주인공이 되셨습니다.
하지만 한 편으로 우리는 대림절을 보내며, 예수님의 탄생을 위해 의로움과 인내와 양보로써 희생했던 조연인 요셉의 존재를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아기로 오신 예수님께서 전하신 하나님 나라는 결코 주인공들만의 나라가 아니라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진 수많은 조연들의 위대한 헌신들로 이루어진 나라임을 믿음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비록 사람들의 눈에는 어리석고 못난 이 세상의 단역으로 보일지라도 하나님 나라의 은혜와 생명과 신비 안에서는 하늘의 별과 같이 찬란한 주인공과 같다는 아름다운 진리를 마음 깊이 새겨야 합니다.
2013년에 이영표 선수가 은퇴하고 가진 기자회견 장에서 사회자가 그에게 그동안 ‘박지성이라는 그늘에 가려져 있는 게’ 아쉽지 않았는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 제가 박지성이라는 그늘에 가려져 있었습니까?
어쩐지 항상 시원하다 했습니다. 저는 그늘을 좋아합니다.
그늘은 서늘해서 낮잠을 자기도 좋습니다.
누군가 제게 그늘을 허락한다면 그 사람에게 감사해 할 것입니다.”
저는 이 인터뷰 기사를 읽으면서 이 땅에 이루어가는 하나님 나라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고 자신에게 맡겨진 역할을 소중히 깨달으며 성실히 수행했던 한 위대한 신앙인의 모습을 발견하였습니다. 또한 성탄의 위대한 조연이었던 요셉의 삶을 오늘날 어떻게 적용해야할 지를 보여주는 훌륭한 예를 찾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온 세상을 향한 구원의 드라마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한 없이 초라한 말모이 통에서 무력한 한 아기로 태어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낮아짐의 역할을 몸소 감당하신 성탄 사건 자체가 우리 마음속에 중요한 울림을 전하며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삶의 태도를 알려줍니다. 그것은 사람들에 의해 주목받지 못하고 오히려 잊혀지고 무시당하는 역할이라 할지라도 각자 주어진 삶의 자리를 믿음으로 지켜가는 것입니다.
비록 그것이 십자가와 같은 어둠과 고통과 절망으로 우리를 몰아 놓는다 할지라도 끝내 부활의 생명과 영광이 우리를 품어 않으며 그러한 우리의 희생과 섬김을 통해 찬란한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어 가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전하시고 이루시기 위해 한 아기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모습을 기억하며 성탄절을 맞이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성탄을 위해 희생했던 요셉의 아름다운 헌신과 삶을 깊이 곱씹으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다시 오시는 예수님의 은혜 안에서 참된 조연이자 주연으로서 저마다의 삶의 자리를 지켜나가는 모두가 되길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설교 후 기도
죄인들을 위해 희생하시고 섬기신 하나님.
아기 예수님의 태어남 위해서 의로움으로 인내로 그리고 양보로 희생했던 요셉의 모습을 말씀을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 나라 안에서 조연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뒤쳐지고 패배하는 어리석은 길이 아니라 자신의 생을 더욱 온전한 주연으로 살아가는 은혜의 길이라는 진리를 마음 깊이 간직합니다. 그 진리 가운데 우리에게 참 자유와 해방을 주시고 성탄절을 더욱 의미 있게 맞이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한 아기로 우리에게 오셨고 또한 하나님 나라의 참된 주인공으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봉헌기도
우리 삶의 진정한 주인이신 하나님
한 아기로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은혜에 감사와 찬양을 드리며 한 주간 삶으로 구별한 예물을 드립니다. 기쁘게 받으시어 자신의 소유와 권리를 내려놓으며 세상을 변화시키려 섬기고 희생하는 이들을 위해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예담 청년들을 축복하며 기도합니다. 한파 속에서 몸과 마음의 건강 지켜주시옵소서. 계획하는 일들이 실패하고 공부와 업무와 관계 속에서 여러 압박을 느낄 때 위로하시고 새 힘을 주시옵소서. 주님의 크신 섭리 안에서 그 누구도 쓸모없는 존재가 없음을 명심하게 하시고 항상 참된 은혜를 누리고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보냄의 말씀
목사: 사랑하는 여러분 평안히 돌아가십시오. 복음의 말씀을 들었으니 성탄의 조연으로서 충실히 역할을 다한 요셉을 본받아 희생과 나눔의 삶을 살아가십시오. 주님께서 우리 삶의 주인공이 되시어 아름다운 이야기의 매듭을 지어 주십니다.
예담: 아멘! 때때로 성공과 찬사에 연연했던 어리석음을 회개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길을 준비하기 위해 더 낮은 곳에서 이웃을 섬기고 돌보며 살아가겠습니다. 주님! 어서 오셔서 우리를 죄에서 구해 주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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