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순절 후 열 여섯 번째 주일, 2016년 9월 4일, 부산진교회 청년예배 설교, 목사 정대진
스바냐 3장 14-20절 "역설의 구원"
14 시온의 딸아 노래할지어다 이스라엘아 기쁘게 부를지어다 예루살렘 딸아 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15 여호와가 네 형벌을 제거하였고 네 원수를 쫓아냈으며 이스라엘 왕 여호와가 네 가운데 계시니 네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16 그 날에 사람이 예루살렘에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시온아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 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18 내가 절기로 말미암아 근심하는 자들을 모으리니 그들은 네게 속한 자라 그들에게 지워진 짐이 치욕이 되었느니라 19 그 때에 내가 너를 괴롭게 하는 자를 다 벌하고 저는 자를 구원하며 쫓겨난 자를 모으며 온 세상에서 수욕 받는 자에게 칭찬과 명성을 얻게 하리라 20 내가 그 때에 너희를 이끌고 그 때에 너희를 모을지라 내가 너희 목전에서 너희의 사로잡힘을 돌이킬 때에 너희에게 천하 만민 가운데서 명성과 칭찬을 얻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먼저, 준비한 동영상 같이 보시겠습니다. 내용 중에 설교에는 적절치 못한 다소 자극적인 내용이 있는데 너그러이 양해 부탁드립니다.
재밌게 보셨나요? 방금 본 영상은 2006년 미국에 방영되어 많은 인기를 불러 모은 시트콤 “럭키루이” (Lucky Louie)의 첫 회, 첫 장면입니다. 저 역시 별 생각 없이 이 영상을 보며 크게 웃다가 끝부분에서 가슴 아픈 씁쓸함을 느꼈습니다. 좀처럼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어린 딸의 계속된 “왜?”라는 질문을 마침내 끊은 아버지의 대답이 “하나님이 죽었기 때문”인 까닭입니다.
그래서 이 대사의 의미를 보다 더 정확하게 알고 싶어서 영어 대본을 찾아보았는데 원래 문장 다음과 같았습니다. "Cause God is dead and we're alone", 다시 옮겨 보자면 “하나님이 죽어서 우리들만 남겨졌기 때문이야”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영상에서 보셨듯이 이런 아버지의 말에 딸 루시는 전혀 의문을 제기 하지 않고 지금껏 언제 그랬냐는 듯 흔쾌히 "Okay!"라고 대답합니다.
어린 아이도 금세 이해할 만큼, 하나님이 죽어서 고통과 절망 가운데 사람들만 덩그러니 내버려 둔 세상. 이것이 바로 큰 화제를 일으켰던 시트콤을 통해 드러난 지난 십 년 전 조지 부시 대통령 당시 미국의 자화상입니다. 그 때 미국 사람들은 점차 극에 달한 정치, 경제 위기 속에 이 시트콤의 대사들에 헛헛하게 웃음 지으며 그 안에 담긴 쓰라린 풍자들에 격렬히 공감하였습니다.
그렇다면 2016년 대한민국 부산을 살아가는 지금 우리에게 있어 하나님은 과연 어떤 존재일까요? 보다 구체적으로 묻는다면, 하나님과의 거리감은 과연 어떠하십니까? 주님께서 늘 함께하심으로 말미암아 언제나 평화와 행복을 누리십니까? 아니면 연거푸 찾아드는 실패와 좌절 속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을 향해 “왜?”냐고 묻지는 않으십니까? 더 나아가 주님께서 우리만 내버려 두고 떠났거나 심지어 죽은 분으로 느껴질 때는 없으십니까?
대형 찬양집회에 자주 등장하는 인도자의 멘트와 찬양 가사들 중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주제는 바로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역설적으로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부재”로 말미암아 신음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 같아 가슴이 쓰라리곤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시 묻겠습니다. 마음속으로 정직히 대답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항상 풍성히 느끼십니까? 아니면 때때로 하나님의 버려두심과 죽음을 느끼며 힘겨워하고 계시진 않으십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함께 읽은 예언자 스바냐의 글을 통해 그가 처한 시대의 절망과 마주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와 상당히 넓은 교집합을 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으로부터의 “버림받음”에 대한 공포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스바냐서의 중심 주제가 다름 아닌 “주님의 날”이라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언자 스바냐는 다른 예언자들과 비교 해봐도 유난히 “주님의 날”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날”은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승리하시는 날입니다. 이 시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을 괴롭히는 모든 열방의 강국들을 하나님께서 직접 무찌르시고 화려한 영광과 위엄을 선언하시는 날을 간절히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스바냐를 비롯한 여러 참된 예언자들이 강조하는 주님의 날과 그 시대 다른 수많은 거짓 예언자들이 외치는 주님의 날 사이에 중요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올바른 예언자들은 거짓 예언자들과는 달리 그날에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심판은 이방민족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철통같은 보호를 믿으며 안심하는 이스라엘에게도 주님의 심판이 똑같이 향해 있다고 외쳤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반드시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진솔한 회개와 삶의 열매가 없는 막연하고 모호한 구원을 절대로 말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은혜와 사랑은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향하지만 구원에는 결코 아무나 참여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마다 안전하다고 믿는 신앙의 틀 안에 숨어 자신들의 죄악들을 비겁하게 정당화하는 모든 자기만족들을 하나님께서는 여지없이 깨뜨리십니다. 북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 의해, 남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처참하게 점령당했던 이스라엘의 역사를 우리가 의미심장하게 곱씹어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지금 스바냐가 예언 활동을 하고 있던 시대에 유다는 이미 동족인 북이스라엘이 앗시리아 제국에 의해 패망한 이후입니다. 그 때, 남유다왕 히스기야가 눈부신 개혁운동을 벌이긴 했지만 그의 뒤를 이은 므낫세와 아몬의 통치기간 동안 그 성과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그리고 그 두 왕의 잘못된 통치로 말미암아 국가의 근간은 완전히 무너져버렸습니다. 그때 나라 전역에는 우상숭배가 횡행했고 지배층의 부패와 타락은 극에 달했습니다.
그 와중에 겨우 8살의 어린 요시야가 불안하게 왕위에 올랐습니다. 또한 나라 외적으로는 고대 중동 질서의 한 축을 차지했던 앗시리아 제국이 신흥 제국 바벨론에 의해 차츰 쇠약해져 갔습니다. 그래서 격변하는 국제 정치 속에서 약소국 유다는 이웃 국가들의 눈치를 숨죽여 살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유다가 이렇게 국내외적인 온갖 불안요소로 크나큰 혼란에 빠진 상황에서 예언자 스바냐는 따뜻한 위로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유다도 예외 없는 전 우주적인 심판이 이루어지는 “주님의 날”을 거침없이 외쳤습니다. 이것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얇디얇은 기대와 희망마저도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잔인한 선언이었니다.
그런데 그렇게 냉혹한 스바냐의 예언이 그 결론에 이르러 전혀 다른 어조의 놀라운 구원의 선언으로 변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말씀 입니다.
그 중에서 17절 말씀 다함께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이 말씀은 성경 전체에서 당신의 자녀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달콤하게 묘사한 문장으로 손에 꼽힙니다. 이러한 17절 말씀이 우리에게 이르시는 내용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시며 그로인해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는 하나님께서 절망과 불안 속에 신음하는 유다와 함께 하고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로 다소 모호하게 번역된 히브리어 <기뽀르 요쉬아>는 직역하면 “구원의 용사”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유다에 “구원의 용사”로 오시어 마치 ‘하나님이 죽고 안 계시는 것처럼 느껴지는’ 모든 어둡고 절망적인 상황으로부터 건져주시고 살리십니다. 이것이 바로 예언자 스바냐를 통해 유다와 우리를 향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으십니까? 불과 3장 밖에 되지 않는 적은 분량의 스바냐서 거의 대부분은 유다를 향한 심판의 목소리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론에 이르러 예언자는 갑자기 하나님의 따뜻한 위로와 희망을 전합니다. 이 모습이 모순적으로 보이지 않으십니까? 주님은 과연 심판하시는 분이실까요? 아니면 구원하시는 분이실까요? 하나님께서는 과연 당신의 백성들, 아들과 딸들을 내버려두고 멀리 떠나 계신 분이실까요? 아니면 항상 함께하시는 분이실까요?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과 임재의 역설을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심판하심으로 구원하시며 떠나계심으로 함께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날”을 선언하시고 북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결국 남유다 역시 외국 군대에 의한 처참한 살육을 겪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으시고 외면하시는 분이 결코 아닙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가차 없이 심판하실 때에도, 그들의 죄를 엄하게 꾸짖으실 때도 그리하여 때때로 당신의 얼굴을 감추실 때도 여전히 우리를 변함없이 사랑하시고 강한 구원의 용사로 함께 하시는 분이심을 반드시 믿으시길 바랍니다.
앞서 함께 본 영상처럼 세상에 대해 막 눈을 뜨기 시작하고 생각의 근육이 조금씩 자라나는 어린 아이들은 끊임없이 “왜?”라고 물으며 질문을 그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질문은 비단 어린이들만의 것은 아닙니다. 살아가며 마주하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온갖 어려움과 절망 가운데 모든 사람들은 평생에 걸쳐, 대체 왜 이 일이 내게 일어났는지, 왜 지금 이런 상황이 닥쳐왔는지, 왜 그런 사람들과 얽혔어야 했는지를 계속해서 묻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의 모습을 언제나 마음 깊이 새겨야합니다. 십자가는 온 세상을 향한 주님의 거대한 물음표이면서 동시에 느낌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며 울부짖었습니다. 그 참혹한 나무 위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으로부터의 가혹한 "버림받음"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처절한 질문에 하나님은 부활로 답하시어 예수님께서는 마침내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하여 십자가위에서의 버림받으심은 곧 하나님의 진정한 함께 하심을 드러내는 구원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사람들을 죽게 내버려두신 것처럼 보이시지만 결코 그렇지 않는 사랑과 생명의 주님이심을 명백히 보여 주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왜?”냐는 질문이 끊임없이 솟아오를 때마다 십자가의 복음을 붙잡아야 합니다. 이 복음 가운데 온 세계를 살리는 참 생명이 살아 숨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복음을 널리 전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항상 잊지 말고 우리의 삶을 통해 이와 같은 역설의 구원을 이웃들에게 전하는 것을 결코 주저해서는 안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드넓은 구원과 임재를 인간의 경험과 느낌으로는 결코 전부 파악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정 반대로 전혀 구원받지 못하다고 느낄 때, 하나님이 우리를 완전히 버리셨다고 고통스레 토로할 때 그제야 비로소 참된 구원이 더욱 온전히 함께함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승리의 용사이신 하나님, 우리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본문 16, 17절을 공동번역 개정판 성경으로 다시 읽어드리며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그 날이 오면, 예루살렘에 이렇게 일러주어라. '시온아, 두려워 마라. 기운을 내어라. 너를 구해 내신 용사 네 하느님 야훼께서 네 안에 계신다. 너를 보고 기뻐 반색하시리니 사랑도 새삼스러워라. 명절이라도 된 듯 기쁘게 더덩실 춤을 추시리라.'”
설교 후 기도
구원의 용사이신 하나님
때때로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이 어둡고 혼탁한 세상에 우리만 덩그러니 내버려 두시고 멀리 떠나버리신 것처럼 느낀 적도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우리의 느낌과 판단과 관계없이 우리를 항상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주님께서 오늘도 우리로 하여금 참된 승리를 거두게 하시려 이미 오셨고 다시 오고 계심을 믿습니다. 주님의 기쁨과 승리를 믿으며 참된 희망을 날마다 힘써 전하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역설의 구원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봉헌기도
우리를 구하시고 살리시는 하나님
세상 속에 홀로 버림받은 것과 같은 비참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는 은혜를 높이며 한 주간 삶으로 구별한 예물을 드립니다. 기쁘게 받으시어 주님의 구원을 알리는 일에 소중히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예담 청년들을 위해 축복하며 기도합니다. 그 어떤 패배감에도 굴복하지 않는 내면의 힘과 희망을 지켜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마다 계획하며 달려가는 일들을 위해 항상 몸과 마음의 건강 허락해 주시고, 가정과 학교와 직장 등 제각기 속한 모든 곳에서 건강한 관계를 지켜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보냄의 말씀
목사: 사랑하는 여러분, 평안히 돌아가십시오. 복음의 말씀을 들었으니 역설의 구원을 맞이하고 전하며 살아가십시오. 구원의 용사이신 주님께서 우리를 기쁨으로 반기시며 사랑으로 새롭게 하십니다.
예담: 아멘! 하나님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지 못하고 원망 섞인 질문만 늘어놓았던 어리석음을 회개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평생에 걸쳐 답을 찾아가며 살아가겠습니다. 주님! 다시 오셔서 온 세상을 사랑으로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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