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순절 후 여덟 번째 주일, 2016년 7월 10일, 부산진교회 청년예배설교, 정대진 목사
마가복음 6장 30-34, 53-56절 “목자 없는 사람들의 목자”
30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이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31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32 이에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갈새 33 그들이 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그들인 줄 안지라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로 그 곳에 달려와 그들보다 먼저 갔더라 3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53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러 대고 54 배에서 내리니 사람들이 곧 예수신 줄을 알고 55 그 온 지방으로 달려 돌아 다니며 예수께서 어디 계시다는 말을 듣는 대로 병든 자를 침상째로 메고 나아오니 56 아무 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지방이나 도시나 마을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께 그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대부분의 비극은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만약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최근에 겪었던 괴로운 일들을 차근히 곱씹어 보시길 바랍니다. 왜 상처 받으셨습니까? 왜 화가 났습니까? 왜 슬퍼하셨습니까? 그 누군가가 여러분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을 “사람”이 아닌 자신들의 목적과 욕심을 이루기 위한 “수단과 도구”로 여길 때, 또한 아무런 감정 없는 로봇처럼 대하고 자신의 기분에만 맞춰줄 것을 강요할 때, 사람들 사이에 분노와 슬픔이 피멍처럼 시퍼렇게 피어남을 우리는 종종 경험하곤 합니다.
특별히 힘을 가진 사람들이 힘이 없는 사람들을, 사회적으로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을, 필요이상 많은 돈을 가진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는 유혹에 쉽게 노출되곤 합니다. 그리고 그로 인한 폭력과 갈등으로 역사책 곳곳이 얼룩져 있음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스스로를 올바로 이해하고 삶 속에 기쁨과 즐거움이 보다 가득하길 원한다면, 그래서 서로가 함께 어울려 사는 평화로운 세상을 꿈꾼다면, 우리는 마땅히 다른 모든 사람들을 차별 없이 “사람”으로 대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우리가 기꺼이 본받고 따라야할 “참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하시기 위해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진정한 “사람”으로 역사 속에 보내셨습니다. 이를 가리켜 조금 어려운 말로, “성육신”이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성육신” 복음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을 차지합니다. 구원의 길이 결코 제한되지 않는 자유로운 능력의 하나님께서 유일한 생명의 통로를 하나님의 “사람 되심”으로 열어 가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 사람됨의 길에 하나님의 깊은 의지와 뜻이 담겨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사람다움”을 존중하시고 소중히 여기실 뿐만 아니라 거룩하게 하셨다는 진리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주님의 마음은 단순히 예수님께서 한 아기로 오신 “사건” 그 자체에만 있지 않고 그 분의 모든 삶과 가르침에 절절히 배여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이 이를 여실히 드러냅니다.
본문 바로 앞에는 세례자 요한의 억울한 죽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이야기 흐름을 잠깐 끊고 시대 배경을 설명하기 위해 마가복음의 저자가 중간에 끼워 넣은 내용으로 볼 수 있습니다. 때문에 본문 말씀은 그 앞에 있는 6장 13절 말씀과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거기에는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에게 능력을 허락하시며 복음 전도를 명령하셨고 또 그 결과 제자들이 놀라운 경험을 하고 돌아오는 내용들이 담겨 있습니다. 본문 30절 말씀에 사도들이 주님께 소상히 말씀드린 자신들의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이 바로 이러한 활동들을 가리킵니다. 그렇게 그들이 이곳저곳을 다니며 예수님에 대한 생명의 기쁜 소식을 거침없이 전하는 것은 분명 매우 보람 있고 의미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6장 13절 말씀에 따르면 제자들은 전도여행을 하면서 많은 귀신을 쫓아내고 여러 병자들을 고쳤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찾아오는 수많은 손님들을 안내하고 질서를 정돈하느라 제대로 밥도 못 먹으며 바쁘게 움직여야 했습니다. 따라서 본문 안에서 그들의 몸과 마음은 모두 너무나 지쳐있고 피곤해 있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런 제자들을 대하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주목해야 합니다.
31절 말씀 다함께 읽겠습니다.
31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예수님께서는 고단한 몸을 겨우 추스르고 있는 제자들을 향해 조용한 곳에서의 쉼을 말씀하셨습니다. 어쩌면 이것을 그리 대단한 게 아니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제자들이 힘들게 복음을 전하고 돌아와서 계속 주님 곁에서 함께 일하느라 지쳐있는데 사랑 많고 인자한 예수님께서 그런 그들을 쉬게 하는 게 너무나 당연하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 단순한 상황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를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들은 결코 수평적인 위치에 있지 않았습니다. 옛날 우리 조상들의 “서당 문화”를 떠올리면 됩니다. 오늘날 같은 공교육이 없는 옛날 중동사회에서 스승과 제자는 가파른 수직 관계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복음서 모두 적나라하게 폭로하듯이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목적은 결코 순수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조만간 화려한 이적으로 로마군대를 물리치고 “왕”이 되실 거라 믿었습니다. 그래서 주님 곁에서 저마다 한 자리씩 차지할 꿈에 부풀어 ‘네가 높니, 내가 높니’하며 티격태격할 정도였습니다.
그렇다면 만약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해 쉬지 말고 더욱 죽도록 충성하며 일 하라고 명령하신다면 과연 그들이 거부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들에게 보다 열심히 근성과 투혼을 가지고 노력하라고 채근 할 때 이를 무시할 수 있었을까요? 주님과의 인연을 끊을 각오가 아니면 절대 불가능한 행동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럼에도 제자들을 향해 목숨 건 과로가 아닌 쉼을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에게 있어 제자들은 결코 도구와 수단이 아닌 사귐과 나눔을 함께 이루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들과 더불어 전하시고 세우시는 하나님 나라는 사람됨의 존엄을 훼손시키는 착취와 억압이 아니라 정반대로 인간에 대한 충분한 배려와 존중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늘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결코 악덕 기업주가 아닙니다. 우리는 물론 때때로 복음을 바르게 전하기 위해 피곤을 감수하는 열정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힘과 시간이 허락되는 데로 늘 성실하게 말씀을 전하고 교회를 섬기는 것은 분명 그리스도인의 중요한 책임입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만약 누군가 여러분을 향해 “사명”이나 “헌신”과 같은 그럴듯한 거창한 명분을 내세우면서 여러분이 누려야할 지극히 기본적인 쉼을 무시하고 빼앗는다면, 그리하여 도무지 감당하기 벅찬 일방적인 복종만을 강요할 다면, 여러분은 마땅히 그것을 거부해야 합니다. 우리를 “사람”으로 지으신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중심에 바로 “안식”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거듭 말씀드립니다. 각종 봉사와 섬김이 무의미하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고 신앙을 성숙시키기 위해 당연히 꾸준하게 노력해야 합니다. 오히려 쉼을 핑계로 지극히 기본적인 섬김과 수고도 거부하는 태만을 정당화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몇몇 극단적인 선교단체와 일부 교회가 그러하듯이 자신들의 특정 행사와 훈련만을 지나치게 우월하게 여기며 가정과 학업 그리고 직장 생활을 비롯한 일상을 소홀히 여기는 태도를 분명히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몸소 사람이 되셔서 제자들의 사람됨을 너그럽게 헤아리신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예수님께서 “사람답게” 대하신 대상은 제자들만이 아니었습니다.
다함께 본문 33~34절 말씀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33 그들이 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그들인 줄 안지라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로 그 곳에 달려와 그들보다 먼저 갔더라 3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본문을 중심으로 앞뒤 문맥을 자세히 읽어보시면 금세 알 수 있듯이 지금 피곤한 사람들은 단지 제자들만이 아닙니다. 예수님 본인이 그들 못지않게 너무나 지치고 힘든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제자들과 함께 조용한 곳에 쉬려고 배 위에 올랐는데 그만 사람들이 주님과 제자들을 알아보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온 동네방네 소문이 퍼져 많은 사람들이 그들에게 구름같이 몰려들었습니다.
이 때, 만약 여러분이 예수님이라면 그런 그들이 어떻게 느껴질 것 같으십니까. 외람되지만 저는 너무나 “귀.찮.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 역시 안식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몹시 피곤해서 쉬고 싶은데 눈치 없이 군중이 몰려와 휴식을 방해한다면 그들이 과연 곱게 보이겠습니까? 하지만 놀랍게도 예수님은 당신의 쉼을 박탈하며 성가시게 구는 갈릴리 빈민들을 결코 귀찮아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에서 “불쌍히 여기다” 혹은 “긍휼”로 자주 번역되는 그리스 단어의 원형이 가진 뜻이 우리말과 약간의 차이가 있음을 주의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스프랑크니조마이>인데 이것은 “창자, 내장”을 뜻하는 <스프랑크나>에 뿌리를 둔 낱말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당신에게 몰려든 가난한 민중들을 불쌍히 여기셨다는 것은 막연히 ‘참 안됐다.’ 하는 식의 가벼운 동정심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본인이 ‘창자가 끊어질 정도’의 깊은 아픔을 느끼며 그들과 함께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겪고 있는 처절한 고통과 절망에 온 몸으로 공감했다는 뜻입니다.
중요한 점은 예수님께서 그렇게 당신에게 필요한 휴식을 망쳤음에도 불구하고 그처럼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을 느끼게 한 원인입니다. 그것은 34절에 나오는 바와 같이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동 지방에 흔한 동물인 “양”의 특징을 한 번 되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양은 눈이 나쁘고 다리가 짧은 동물입니다. 그래서 맹수가 다가와도 싸우기는커녕 제대로 도망칠 수조차 없는 매우 겁 많고 연약한 동물입니다. 따라서 양은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혼자서는 결코 생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살아가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가 있습니다. 바로 “목자”입니다. 양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충분히 이해하고 목숨까지 걸며 그들을 위해 곰과 사자와 맞서 싸울 목자가 있을 때에만 양은 비로소 안전하고 편안히 풀을 뜯으며 시냇가를 노닐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양에게 목자가 없다고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절망 그 자체입니다. 바로 지금 예수님 눈앞에 몰려든 사람들의 상황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의 정치적 목자로서 책임을 가진 로마 제국과 유다의 권력자들은 그들의 든든한 우산이 되지 못했습니다. 도리어 그들을 착취하고 학살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알려주고 주님의 뜻을 전해야 하는 종교적 목자들인 유대교 지도자들 역시 그들에게 무거운 율법의 짐만 지울 뿐 진정한 복음을 외치고 실천하지 않았습니다. 이렇듯 이스라엘의 정치, 종교 지도자들에게 있어 가난한 보통사람들은 그들이 공감하며 섬기고 돌볼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이용할 수단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정반대로 함께 아파하고 눈물 흘리시며 목자 없는 그들에게 목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들 모두는 마땅히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인 “사람”이었고 예수님은 그들을 “사람”으로 대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처럼 사람이 진정 사람답게 살아가는 세상,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본래의 존재를 회복하는 세상이 바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나라인 까닭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마땅히 누려야할 쉼마저 기꺼이 포기하시면서 목자 없는 양 같은 그들을 기꺼이 맞아주셨습니다. 그들의 아픔을 고치시며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 위에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극한의 고통을 대신 짊어지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지 못하도록 억누르는 모든 죄악과 억압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대부분의 비극은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따라서 역설적으로 인간의 힘만으로는 결코 인간이 처한 아픔과 절망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참 사람이 되셔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은 때때로 우리를 사람이 아닌 도구와 수단으로 여길지라도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진정 사람으로 대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사람으로 지으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쉼을 허락하시고 늘 돌보십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우리 역시 이러한 위대한 사랑을 본받아 주위의 목자 없는 양 같은, 소외된 이들 곁에서 내면 깊은 곳을 찌르는 고통에 공감하며 그들과 함께 하길 바라십니다. 가장 가까운 이들에게 휴식 같은 사람이 되길 원하고 기대하십니다. 그렇게 참된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의 다스림과 돌보심을 더욱 기쁨으로 누리고 또 전하는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설교 후 기도
우리의 착한 목자 되신 하나님.
우리의 착한 목자 되신 하나님.
주님께서 목자 없는 길 잃은 어린 양과 같은 우리를 귀찮아하지도 내 버리시지도 않으심을 믿습니다. 도리어 우리가 겪는 모든 창자가 끊어지는 듯 한 아픔에 함께하시는 위대한 사랑을 말씀을 통해 다시 확인 하였습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본받아 우리 곁에 허락하신 모든 만남 가운데 사람됨의 따스함과 균형을 지켜가며 살아가기를 간절히 구합니다.
목자 없는 사람들의 목자가 되시려 참 사람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봉헌기도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
우리 삶에 참된 휴식을 주신 은혜에 감사와 찬양을 드리며 한 주간 구별한 삶의 예배를 드립니다. 기쁘게 받으시어 사람됨을 회복하는 일에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예담 청년들이 갈 길을 찾지 못하고 방황할 때, 쉼을 빼앗기고 억눌림 당할 때, 불쌍히 여기시고 찾아오시어 일으켜 주시옵소서. 몸과 마음을 항상 건강하게 돌봐 주시고 늘 주님 아래서 건강한 회복을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보냄의 말씀
목사: 사랑하는 여러분 평안히 돌아가십시오. 복음의 말씀을 들었으니 사람다운 사람이 되어,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며 살아가십시오. 목자 없는 사람들의 목자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항상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예담: 아멘.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길은 곧 “사람 됨”을 회복하는 것임을 잊은 채 살았던 어리석음을 뉘우칩니다. 제자들에게 휴식을 주신 예수님을 본받아 곁에 있는 이들의 사람다운 삶을 위해 “쉼”을 선물하며 살아가겠습니다.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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