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진교회 청년부 겨울수련회 설교, 2016년 2월 27일, 정대진 목사
누가복음 19장 1-10절 “올려다보시다”
1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3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7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박민규 작가가 지은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80년대 어느 남녀의 사랑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소설이 흥미로운 점은 남녀 주인공의 외모묘사가 일반적인 다른 연애소설과는 사뭇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남자주인공은 유명 영화배우의 아들로서 주변 여자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무척 잘 생긴 얼굴을 가졌습니다. 반면 여자주인공은 누가 봐도 너무나 못생긴 외모를 가졌습니다. 그 둘은 같은 백화점에서 함께 아르바이트를 하며 서로를 알게 됩니다. 이 때, 남자주인공이 여자주인공을 처음 보았던 순간을 소설은 다음과 같이 1인칭으로 묘사합니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말하자면, 그때까지도 꽤 많은 못생긴 여자들을 봐왔지만 나는 그녀처럼 못생긴 여자를 본 적이 없었다. 세기를 대표하는 미녀를 볼 때와 하나 차이 없이, 세기를 대표하는 추녀에게도 남자를 얼어붙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얼핏 이러한 내용들이 재미있는 이야기로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소설은 외모만으로 함부로 판단하고 평가하는 시선의 폭력에 의해 오랫동안 깊은 상처를 받아왔던 “그녀”의 고통을 전반에 걸쳐 비중 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여주인공이 자신의 입술을 통해 가슴 아프게 말하는 과거 중 한 대목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저 사실 그때 당신을 믿지 않았거든요. 아니, 실은 믿고 싶었지만... 믿을 수 없었던 거예요. 그럴 리가 없었으니까. 도대체 어떻게... 그럴 이유가... 없었으니까요. 그 전에 당신이 제 짐을 들어주지 않았다면 전 분명 또다시 놀림감이 되었구나, 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이전에도 여러 번 비슷한 일을 겪었으니까...
즉 가위 바위 보를 해서 진 사람이 저애에게 가서 말 걸기... 그리고 이긴 남자애들이 어딘가 숨어서 배를 잡고 웃는 거예요. 수군거리는 주변의 그 분위기를 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어요. 그런 일을 겪을 땐 언제나 못 박힌 듯 몸이 얼어붙었으니까... 사람의 웃음이... 창(槍)처럼 사람의 배를 찌를 수 있다는 걸 믿으세요?”
여러분, 혹시 이 소설 속 그녀처럼 ‘창처럼 날카로운 사람의 웃음에 배를 찔려본 적’이 있으십니까? 저는 이 대목에서 한참을 먹먹히 가슴을 쓸어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 역시 그 누구 못지않게 이 아픔에 공감했기 때문입니다. 살면서 늘 따뜻한 시선만을 받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경우의 차이만 있을 뿐 우리 모두는 종종 날카로운 싸늘한 눈길에 의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시린 피를 흘리곤 합니다. 그리고 외모뿐만 아니라, 학벌과 집안을 비롯한 여러 다양한 이유로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시퍼렇게 날 서고 꼬인 시선을 주고 받으며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안고 살아갑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성경 말씀에도 이런 싸늘한 시선 앞에 오랫동안 노출된 한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로 “삭개오”입니다.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오랜 여행 끝에 마침내 예루살렘 도착을 앞두고 일어난 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바로 오른 쪽에는 “여리고”라는 도시가 있었는데 바로 거기에 삭개오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의 저자는 그를 가리켜 “세리장”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때 우리는 이 “세리장”이라는 직업이 가진 복잡한 사정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당시 이스라엘을 포함한 지중해 연안의 거의 대부분을 “로마 제국”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거대한 제국을 잘 유지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물론 여러 가지가 있었겠지만 바로 돈, 즉 ‘세금’입니다. 역사상 어느 나라나 세금을 정확하고 효율적으로 거두는 것은 그 나라의 흥망성쇠를 좌우하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로마 제국역시 마찬가지로 그들은 각각의 속주로부터 세금을 철저히 걷는 일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문제는 그 모든 식민지에 세금을 걷는 공무원을 세우고 그들을 조직하는 것이 무척 어렵다는 점입니다. 때문에 로마 제국이 생각해낸 방법은 각 영토별로 세금을 거두는 권한을 장기 임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지역 담당자가 정해진의 세금만 로마 제국에 제때 바친다면 그가 추가로 돈을 걷는 것에 대해 일체 참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책임자는 스스로 모든 세금을 직접 다 거두는 것이 아니라 마찬가지 비슷한 방식으로 구역을 나누어서 세금을 걷는 사람들을 고용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고용된 세리들 역시 자신 밑에 다른 일꾼들을 두어 그들에게 세금을 거두게 시켰습니다.
문제는 그 세리들이 꼭 필요한 양의 세금만 걷는 게 아니라 정해진 액수보다 지나치게 훨씬 많은 양의 돈을 그 사회 절대다수의 가난한 사람들로부터 악랄하게 빼앗았다는 사실입니다. 한 마디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 세리라는 존재는 그들이 힘겹게 일해서 번 소중한 돈을 합법적인 수단으로 빼앗는 흉악한 강도들입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그들이 그렇게 세금을 걷어서 최종적으로 바치는 곳이 바로 로마제국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은 오직 자신들만이 하나님으로부터 택한 받은 민족이라는 굉장한 자부심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그들 외의 다른 민족들은 짐승만도 못한 더러운 백성들이라는 멸시로 자연스럽게 이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상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저 야만스런 로마가 자신들을 침략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는 예루살렘 성전을 모독하였습니다. 이것은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이스라엘로서는 무척 서럽고 비참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원수 같은 로마제국이 든든히 잘 유지되도록 세금을 걷으며 동족을 착취하는 세리들이 그들 눈에 과연 어떻게 보였겠습니까? 단순히 강도일 뿐만 아니라 신앙까지도 저버리고 적국에 아부하는 끔찍한 민족배반자 그 이상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복음서 곳곳에서 세리들을 향한 이스라엘의 혐오를 쉽게 발견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등장하는 삭개오는 단순한 세리가 아니라 로마 제국으로부터 세금 징수 권한을 직접 부여 받은 “세리장”입니다. 복음서에 이처럼 세리가 아닌 “세리장”이란 직함을 가진 사람은 삭개오만이 유일합니다. 한 마디로 그는 세리들 가운데서도 단연 눈에 띄는 민족 배반자들의 우두머리였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삭개오를 그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보았을까요? 그를 친절하고 따뜻하게 바라보았을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대놓고 말은 못하지만 그를 향해 “더러운 욕심으로 가득 찬 돼지”, “애국심도 없는 천박한 로마 앞잡이”, “돈에 눈이 멀어 양심도 저버린 매국노” 라고 속으로 외치며 경멸어린 시선을 보냈습니다. 이것이 그들 눈에 낱낱이 비친 삭개오의 추악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살고 있는 여리고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기 위해 그들 마을을 지나가신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리고 소문에 따르면 주님께서는 놀랍게도 수많은 병든 사람들을 고치셨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죽은 사람들도 살리셨습니다. 또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많은 사람들을 먹이는 신비로운 일도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소문들은 오랜 시간 동안 여러 예언자들이 말씀했던 그 ‘메시야’가 바로 예수님일지도 모른다는 가슴 떨리는 기대로 이어졌습니다. 그런 까닭에 주님께서 자신들 마을을 지날 때가 가까웠다는 소식을 들은 여리고 사람들은 어서 빨리 예수님을 뵙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께서 여리고에 나타나 그들 사이를 지나가시셨습니다. 그러자 그 분을 향한 사람들의 기대와 환호가 점점 무르익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갑자기 바쁜 걸음을 멈추시고 웬 나무 하나에 눈길을 옮기셨습니다.
이 모습을 성경이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지 다함께 본문 3-5절 말씀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3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이러한 본문 3-5절에는 각 절마다 반복되는 동사 하나가 있습니다. 바로 “보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매우 흥미로운 점은 우리말 번역에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3절과 4절에 두 차례 등장하는 삭개오의 “보다”와 5절에 한 번 언급되는 예수님의 “보다”가 헬라어 원문에는 각각 다른 단어라는 사실입니다.
부득이 헬라어를 인용하는 것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3절과 4절에서 삭개오를 묘사하는 “보고자 하되”와 “보기 위하여”로 옮긴 헬라어의 뿌리는 둘 다 <호라오>입니다. 이것은 신약 원문에 매우 자주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반면 5절에 나무위로 올라탄 삭개오를 예수님께서 “쳐다 보셨다.”고 기록한 단어는 이런 <호라오>가 아닌 <아나블레파스>입니다.
이 낱말은 “위로 보다”로 직역할 수 있는데, 신약 원전에 단 7차례 밖에 나오지 않는 무척 희귀한 단어입니다(마 14:19; 막 6:41, 7:34, 8:24, 눅 9:16, 19:5, 21:1). 그리고 그 대부분은 허공을 향한 멍한 시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위를 바라보며 갈망 하는 눈길을 묘사할 때 사용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단어에는 흔히 사용되는 <호라오>와는 달리 ‘마음의 눈으로 보다’라는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령, 마태·마가·누가복음 모두 오병이어 사건에서 예수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보시고’ 축복과 감사의 기도를 드린 모습을 기록하면서 이 <아나블레파스>를 사용하였습니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신’ 주님의 눈길은 무의미한 습관적인 행동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사랑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누가복음 기자가 삭개오와 예수님의 시선을 각각 다른 성격의 단어로 기록한 의도가 과연 무엇일까요? 돌무화과나무 위를 향한 주님의 눈길을 묘사하면서 삭개오와 똑같이, 평범하게 그냥 ‘보셨다.’라고 언급해도 이야기 흐름에 전혀 무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굳이 마음의 눈으로 ‘위로 올려다보셨다.’라고, 정확히 묘사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누가복음은 이와 같은 정교한 단어 선택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향한 삭개오의 눈길과는 달리, 그가 있는 곳을 향해 막연한 시선을 던지지 않았음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대신 주님께서는 “나무 위”에 초라한 모습으로 올라가 있는 삭개오, 그 한 사람을 당신의 온 마음을 다해 정확히 응시 하셨음을 우리에게 분명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할 것은 지금 예수님께서는 한가롭게 산책 하는 중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막중한 사명을 위해 예루살렘을 향한 발걸음을 무겁게 그러나 더디지 않게 옮기는 중입니다. 게다가 예수님 주변에는 어마어마한 무리의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그런 그들을 로마 군인들이 예의 주시하는 매우 긴박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주님께서는 뜬금없이 발길을 멈추시고 그동안 일면식도 없었던 “삭개오” 한 사람을 가만히 올려다보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때 삭개오를 향한 예수님의 시선은 과연 어떠했을까요? 주님의 눈동자에 비친 삭개오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예수님께서도 다른 여리고 사람들처럼 그를 미움과 멸시의 눈길로 바라보셨을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그를 바라보신 후 매우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5절 말씀 제가 다시 읽겠습니다.
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예수님께서는 삭개오에게 얼른 내려오라고 하시며 오늘 그의 집에서 머무르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그 자리에 모인 다른 수많은 사람들에게 어마어마한 충격을 주는 이야기였습니다. 왜냐하면 누군가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음식을 먹을 뿐만 아니라 그 곳에 머물며 쉰다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속한 ‘유목민 문화’에 있어 우리가 생각 하는 그 이상으로 각별하게 마음을 같이 하는 친한 친구가 됨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삭개오에게 하신 말씀은 곧, 그와 깊은 사귐을 나누는 친구가 되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주님께서 강한 힘으로 로마제국으로부터 자신들을 해방시킬 영웅적인 메시아로 기대했던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결정적으로 무너뜨리고 실망을 안긴 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물어보겠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돌무화과나무 앞에서 올려다보신 삭개오는 주님의 눈에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과연 그를 어떻게 바라 보셨을까요? 주님께서는 삭개오에게서 겉으로는 아닌 척했지만 같은 민족의 돈을 빼앗는 죄책감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아무리 악착같이 재산을 긁어모아도 도무지 채워지지 않는 마음 속 깊은 공허함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체면을 무릅쓰고 나무위에 오르면서까지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하는 갈급함을 보셨습니다.
그렇게 삭개오는 다른 수많은 사람들과 전혀 다른 예수님의 사랑어린 눈길을 경험하였습니다. 이것은 한 마디로 “시선의 기적”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의 내면 깊은 곳을 향한 주님의 예리하고도 따뜻한 시선과 눈을 맞춘 삭개오는 그 이전과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을 살아갔기 때문입니다.
우리 다함께 8절 말씀 읽겠습니다.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맞아들여 잔치를 베푼 후 결연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이 가진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며, 남을 속여 빼앗은 것이 있다면 네 배나 갚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그는 주님 앞에서 막연하고 모호한 회개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많은 헌금을 바치고 제사를 열심히 드리는 것으로 자기만족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동안 자신이 약자들을 향해 저질러 온 정확하고 구체적인 죄를 명확히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머물지 않고 분명한 실천을 공개적으로 다짐하였습니다.
이러한 그의 선언은 예수님께서 그간 일관되게 전하신 하나님 나라의 핵심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와 같이 새롭게 변화된 삭개오의 모습을 통해 주님께서 보내시는 사랑의 눈길이 닿는 곳에 얼마나 위대한 일들이 시작되는 지를 새삼 깨닫게 됩니다.
사랑하는 예담 청년 여러분, 이 시간 우리는 겨울 캠프를 맞아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주님을 보기 위해’ 어렵게 시간을 내었습니다. 이는 마치 그 옛날, 사람들의 비웃음과 미움의 시선을 이겨내고 나무 위에 오른 삭개오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그들이 알건 모르건, 인정하건 하지 않건, 마음 깊숙이 예수님을 찾고 보고 싶어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저마다의 돌무화나무 위를 오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고 바라보기 이전에 이미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 먼저 다가오고 계십니다. 우리 각자가 올라탄 나무 위를 온 마음을 다해 ‘올려다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너와 함께 머물며 친구가 되고 싶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그동안 경험했던, 다른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사랑의 눈길로 우리의 마음 깊은 곳을 바라 보는 분이심을 반드시 깨달아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시선을 통해 우리에게 전하신 위대한 변화의 걸음을 삶과 일상 가운데 내딛으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설교를 시작하며 소개한 박민규 씨의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에서 못생긴 외모로 오랜 시간 깊은 상처를 받아온 여자 주인공은 남자 주인공의 한결 같은 사랑의 눈길을 통해 내면의 놀라운 치유와 변화를 경험합니다. 그리고 그 감격을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전까지... 저는 한 번도 뜨거운 눈물을 흘려본 적이 없습니다. 눈물은 더없이 차가운 것이었고, 그때의 제 마음도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알 수 있었습니다. 냉대를 받은 인간의 마음은 차가운 눈물을 흘린다는 사실을... 관심과... 사랑을 받은 인간의 마음만이 더없이 뜨거운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말하자면 당신은 한 여자의 체온을 바꿔주었고, 한 여자를 둘러싼 세상의 기후를 바꾸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달의 뒷면처럼 어둡고 어두웠던 저라는 여자를 바꾸어놓았습니다. 어느새 저는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지난날의 모든 상처가 사라졌음을... 그리고 이제는 튼튼하게 아물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은 이웃을 향해, 특별히 소외된 약자들을 향해 멸시와 무시가 아닌 온 마음을 담은 따뜻한 시선으로 다가가는 사람들입니다. 올곧은 눈길로 세상의 변화를 갈망하며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가슴 아픈 비극을 겪고도 잔인한 오해를 당하는 사람들을 향해 다가가 그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공감의 시선을 결코 거두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소설의 표현을 빌리자면 차가운 심장을 가진 다른 이의 ‘체온과 그를 둘러싼 세상의 기후를 바꾸어 주는’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향해 따뜻한 눈길로 올려다보셨기 때문입니다. 이토록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금 우리의 온 마음으로 품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위대한 변화의 시선을 더욱 감사함으로 누리고 또 이웃들에게 차별 없이 전하는 모두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소원합니다.
기도 : 이미 우리를 잘 아시고 바라보고 계신 하나님
모든 사람들이 차갑고 싸늘한 시선으로 쳐다볼 때도 주님께서는 우리 마음 깊이 숨겨진 아픔과 갈등을 아시고 한없이 따뜻한 사랑의 눈길로 올려다보실 줄 믿습니다. 주님의 그 은혜로운 눈길을 마음 깊이 새기며 거짓과 욕심의 길에서 벗어나 늘 주님과 함께 걷게 하여 주시옵소서.
어느덧 수련회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이틀간의 순서들을 통해 깨닫고 나누었던 것을 잊지 않게 하여 주시고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주님과 더욱 동행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수련회를 위해 수고한 임원과 리더들의 몸과 마음을 더욱 든든히 지켜주시옵소서.
참된 회복과 변화의 잔치로 우리를 초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참고자료: 박민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인천: 예담.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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