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7월 8일, 부산진교회 청년부 수련회 저녁집회설교, 정대진 목사
누가복음 13장 10-17절 “나를 아는 이의 손길”
10 예수께서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11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12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13 안수하시니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14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하거늘 15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16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17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매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온 무리는 그가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니라
저는 덴마크 출신의 영화감독 “라스 폰 트리에”(Lars von Trier)의 작품들을 참 좋아합니다. 그중에서도 1996년에 개봉한 “브레이킹 더 웨이브”(Breaking the Waves)는 아직도 제 마음에 깊은 여운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그 영화의 삽입곡 중 하나인 엘튼 존의 노래인 “Goodbye yellow brick road”를 계속 반복해서 들었는데, 가슴이 너무 먹먹해서 중간에 끊었다가 다시 재생하는 걸 되풀이 했었습니다.
이 영화는 1970년대 완고한 청교도 신앙이 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스코틀랜드 북서부 외진 섬마을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 마을에 “베스”라는 이름의 너무나 순수한 성격과 신앙을 가진 한 여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기 마을에 일을 하러 온 자유분방한 청년 얀과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져 주위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못하고 베스의 남편은 석유 채굴작업을 하다가 사고를 당해 전신불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병원 침상에 누운 얀은 사랑하는 아내가 자신 때문에 젊음을 누리지 못하고 얽매여 사는 걸 원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내에게 매우 비상식적인 부탁을 합니다. 그녀가 다른 남자들과 자유롭게 성관계를 가지고 그 경험담을 자신에게 들려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남편의 요청은 엄숙한 장로교 신앙아래 자란 베스로서는 도저히 선뜻 응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자 얀은 순진하기 이를 데 없는 그녀에게, 그렇게 하면 자기의 몸이 나을 수 있다고 집요하게 거짓말과 회유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베스는 남편의 말을 믿고 원치 않는 잠자리를 갖기 시작합니다. 그 결과 그녀는 남편이 거동 못하는 틈을 타서 문란한 행실을 서슴지 않은 부정한 여인으로 마을 사람들의 매서운 질책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을 향한 사람들의 그런 끔찍한 평판에도 불구하고 남편의 소원을 들어줄 때마다 그가 정말 몸이 회복되는 것 같은 이상한 확신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래서 비록 주위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자신의 이런 기괴한 사랑 표현이 기적을 낳을 거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남편의 완쾌를 위해 마을의 매춘부들과 어울려 점점 더 위험한 만남들을 이어갔고 그럴수록 그녀를 향한 비난과 지탄도 더해 갔습니다.
이렇듯 이 영화의 여주인공 베스는 주변 사람들의 눈에는 분명 부도덕하기 이를 데 없는 더러운 여자였습니다. 사실 만약 저라도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그들과 똑같은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판단했을 겁니다. 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모든 게 진실은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익숙한 관념과 전통이 그녀의 참된 정체성 모두를 규정할 수는 없었습니다.
비록 그녀의 행동을 선뜻 이해할 수 없고 도무지 납득할 수 없긴 하지만 진정한 그녀의 모습은 남편을 버린, 문란하고 미친 여자가 아닌, 세상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자신만의 숭고한 사랑으로 남편의 곁을 지키는 지고지순한 아내였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우리는 오늘 함께 읽은 본문 말씀에서 진정한 자신의 모습과 다른 겉모습 때문에 사람들에 의해 쉽게 판단되고 규정 지어진 한 여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녀에 대해 본문 11절에서 누가는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11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강조하는 바이지만, 성경은 오늘날 발전된 과학과는 매우 동떨어진 고대 중동의 세계관을 배경으로 기록, 편집된 책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시대 그들의 눈높이에서 성경을 읽어야만 말씀이 진정 의도하는 바에서 멀리 벗어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에 등장하는 귀신들린 사람들은 모두 말 그대로 다 “귀신에 사로잡힌” 사람들일까요? 물론 성경 안에 “귀신”이라는 존재가 드러나는 것 자체는 명확한 사실이고 그들에 의해 인격이 지배당해 비극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역시 말씀 안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성경에 언급되는 귀신들린 사람들 모두가 문자적인 의미 그대로 “귀신에 들렸다.”고 판단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고대 사람들은 자신들이 미처 이해하지 못하는 여러 다른 병들도 “귀신 들렸다.”고 쉽게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뇌질환 중 하나인 “간질”을 생각해보시면 이해가 쉬울 겁니다. 제가 중학교 때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 때 시외버스 안에서 처음으로 간질발작을 하는 분을 본적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눈꺼풀이 뒤집힌 채, 입에는 거품을 물고 있었고 온 몸을 파르르 떨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은 언뜻 보았음에도 지금껏 제 기억에 잊혀 지지 않는 충격적인 장면이었습니다.
때문에 불과 얼마 전까지 오랜 시간 동안 사람들은 간질을 귀신들려 생긴, 종교적인 병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간질을 가리키는 그리스어인 <에필렙시> 자체가 (외부의 악령에 의해 영혼이) “사로잡히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대인들 중에 이러한 간질증상을 두고 귀신들린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그만큼 뇌과학과 의학의 발달로 이것이 분명 뇌질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최근 의학계에서는 간질 대신 “뇌전증”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여인도 귀신에 들린 것으로 보기 힘듭니다. 몇 가지 근거가 있는데, 우선 본문에 등장하는 귀신의 인격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복음서에서 귀신들린 사람의 모습을 묘사할 때 그 사람을 사로잡은 귀신이 보여주는 별개의 언어와 개성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 모두 기록하고 있는 “거라사 지방의 귀신들린 사람”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누가복음 8장 26-39절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풍랑을 헤치며 갈릴리 호수를 지나 맞은편 거라사 마을로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곳에서 귀신들린 한 사람을 만나는데, 그 안에 살고 있는 귀신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하지 마옵소서”라는 자기주장을 말했습니다. 게다가 “군대”라는 자신의 이름도 이야기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귀신이 떠나간 이후에 전혀 다른 행동을 보입니다.
반면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여인은 “귀신 들렸다.”는 언급만 있을 뿐 이에 대한 현상이 단 하나도 묘사되지 않습니다. 물론 16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도 주위 사람들에게 그녀를 가리켜 “사탄에게 매인 바”되었다고 말하긴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귀신이 그녀의 인격을 사로잡아 이상한 행동을 하게 하는 일반적인 의미의 “귀신들림”을 이야기하기 보다는, 그만큼 그녀가 겪고 있는 고통이 힘겨웠음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이해하는 게 더 정확합니다.
가장 결정적인 증거는 바로 그녀를 향한 예수님 자신의 직접적인 말씀입니다. 다함께 12절 읽겠습니다.
12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예수님께서는 사람들 눈에 ‘귀신들려 보이는’ 그녀에게 ‘네가 네 귀신에서 놓였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네 “병”에서 자유롭게 되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따라서 그녀는 분명 귀신들린 사람이 아니라, 귀신들린 것으로 보일 정도로 심각한 장애로 무려 열여덟 해나 되는 긴 시간 동안 고통당한 병자였음을 알게 됩니다.
이러한 몸의 질병만으로 그녀는 충분히 끔찍한 아픔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었습니다. 그녀의 분명한 정체성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육체적 고통을 받고 있는, 돌봄과 관심이 필요한 환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진정한 자아는 사람들에게 냉혹하게 짓밟히고 무시당했습니다. 단지 겉모습이 흉측하다는 이유 하나로, 자신들의 생각으로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익숙한 경험과 관념으로 무책임하게 그녀를 “귀신 들렸다.”고 함부로 규정 지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함부로 그녀를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 눈에는 결코 보이지 않는 그녀의 참된 내면을 분명히 바라보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귀신아 떠나라!”는 말 대신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고 말씀하시며 그녀의 아픈 몸에 손을 얹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녀가 구체적으로 무엇에 의해 고통당하는 지를, 그렇게 그녀가 진정 누구인지를 올바로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비극의 원인을 정확히 지적하시며 치유와 해방을 안겨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과연 누구입니까? 여러분의 진정한 자아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 사람들의 의해 규정지어지고, 판단 당하며 살아갑니다. 개중에는 한, 두 명의 생뚱맞은 오해도 잊지만, 때로는 대다수로부터 심각한 오해를 당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오해는 사람들에게 익숙한 전통과 관념에 더해져 싸늘하게 날카로운 시선의 폭력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심지어 우리 자신조차 진정한 나를 잊어버린 채 그처럼 자신을 둘러싼 거짓된 판단에 속아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코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런 우리를 향해 주님께서 다가오십니다. 오셔서 우리를 알아봐 주십니다. 우리를 이중, 삼중으로 둘러싼 거짓된 나가 아닌, 진정한 내 모습을 주목하시며 함께 눈물 지으십니다. 우리를 향해 거짓을 외치는 이들을 단호하게 꾸짖으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진정한 내면을 사람들에게 굴절시켜 보이게 했던 그 모든 아픔과 절망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십니다.
앞서 소개한 영화 “브레이킹 더 웨이브”의 여주인공 베스는 남편을 살리기 위해 극단적인 관계들을 이어오다가 결국 난폭한 선원들에 의해 학대를 당한 끝에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이 사건을 두고 재판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녀가 사람들의 모욕와 조롱 속에도 꿋꿋하게 믿었던 기적들, 자신이 행한 희생들이 남편을 다시 일으킬거라는 기대가 정말 이루어지고야 말았습니다. 그녀가 보여준 눈물겨운 헌신 덕분에 그 재판장 한 쪽에 그녀의 남편 얀이 건강을 회복한 채 앉아 있었습니다.
판사는 이 모든 상황을 다 알고 있는 담당의사에게 베스에 대해 이렇게 물었습니다.
“피해 사망자를 치료했으니 당신으로부터 의학적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Listen, man, you had the deceased in your care.
The court would like to hear the medical facts.
그러자 그 의사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만약 저에게 다시 소견서를 쓰라고 하시면 전에 쓴 신경과민이나 정신병이라는 말 대신에 ‘선함’(good) 때문이라고 쓰겠습니다.”
If...If you'd, um, if you were to ask me again to write umthe conclusion,
then instead of writing “neurotic” or, um, "psychotic,"
then I might just um use a word like "Good."
하지만 그럼에도 베스의 장례식은 교회의 허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교회로부터 출교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저 “매장식”만 치르게 되었습니다. 그 때 예식을 집례 하는 목사는 마치 본문 속 회당장과 같은 엄숙한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베스 맥닐, 너는 죄인이다. 네가 저지른 죄들 때문에, 지옥으로 갈 것이다.”
Bess McNeill, you are a sinner, and for your sins, you are consigned to hell.
그러자 그 자리에 있던 그녀의 친구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당신들 누구도 베스를 지옥으로 보낼 자격 없어요!”
Not one of you has the right to consign Bess to hell.
한편, 베스의 시신을 몰래 빼낸 얀과 그의 친구들은 배 위에서 자신들만의 장례를 치르며 그녀를 추모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그들은 바다 한 가운데서 하늘에서 은은하게 들려오는 신비로운 종소리를 듣는 장면으로 영화는 끝을 맺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인공이 사는 마을에 위치한 교회가 종이 없다는 사실과 대조되어 매우 의미심장한 대목입니다.
이 영화는 이와 같은 결말을 통해 한 인간의 진짜 모습, 진짜 자기는 사람들의 생각과 경험들, 심지어 거룩한 겉모습을 지닌 종교마저도 초월한 것임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베스의 진정한 정체성은 사람들 눈에 보이는 대로 한 없이 더럽고 부도덕한 여인이 아니라 그 어떤 편견과 혐오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져 남편을 사랑하고 구한 위대한 아내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진정한 나”는 사람들이 판단하고 이해하는 겉모습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의 얕은 판단에 있지도 않습니다.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에게 다가오신 주님의 심장 한 복판에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우리 곁에서 함께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세찬 비바람을 맞으며 사람으로 살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함께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시어 하나님 나라를 완성해 나아가셨습니다.
이와 같은 생명의 복음을 통해 여러분 자신의 참된 모습을 비추고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이 세상 그 누구보다, 심지어 나 자신보다 나를 가장 잘 아시는 예수님께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아니, 더 정확히는 이미 우리 안에 다가오신 하나님께 마음의 문을 여시길 바랍니다. 그 주님과 더불어,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이 땅위의 여정을 기쁨으로 우직이 걷는 모두가 되기를 마음 깊이 소망합니다.
기도 :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
사람들 눈에는 귀신 들린 더러운 여자로 보였지만, 사실 그녀는 그저 오랜 시간 병든 가련한 여인임을 잘 아신 예수님께서 지금 우리의 모든 아픔 역시 잘 아실 줄 믿습니다. 그리고 그녀를 구하시고 자유롭게 하셨듯이 오늘 우리를 얽매는 온갖 좌절과 절망으로부터 구하여 주시옵소서. 더 이상 이 세상의 거짓에 속지 않게 하시고 오직 주님 안에서 진정한 나를 올바로 찾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를 기어이 살리시며 참된 얼굴을 찾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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