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2월 7일 화요일

빌립보서 3장 17절 - 4장 1절 “낯선 시민권의 출처”

사순절 두 번째 주일, 2016년 2월 21일, 부산진교회 청년 설교, 정대진 목사
빌립보서 3장 17절 - 4장 1절 “낯선 시민권의 출처”

1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 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1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90년대부터 지금까지 여러 청년 집회 등에서 자주 들을 수 있었던 말 중 하나는 이른바 “고지론”입니다. 청년들이 세속적인 의미에서의 성공을 많이 해서 정치, 경제 등 각 분야의 높은 위치를 차지해 그로 말미암은 커다란 사회적 영향력을 선하게 사용하여 세상을 변화시키자는 주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해외 명문대에 합격한 기독 청년들의 감동적인 담은 책들을 기독교서점에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선망 받는 위치에 오른 기독교인들이 여러 집회에서 간증하는 모습도 자주 접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와 같이 얼핏 설득력 있어 보이는 이야기들이 과연 기독교 복음에 일치하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의 욕망을 그럴듯한 신앙 언어로 포장한 것은 아닌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단적인 예로서 대한민국 전체 인구대비 개신교 신자 비율보다 정,관계 및 재계 고위직의 개신교 신자 비율이 월등이 높습니다. 좀 단정적으로 말씀드리면 개신교는 이미 한국 주류, 기득권의 종교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또 이는 역사적으로도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의 비호 아래 개신교가 발전했음을 돌이켜 봐도 명백한 사실입니다.

문제는 그토록 많은 개신교인들이 이미 고지를 점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역대 세 명이나 되는 장로 대통령을 배출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개신교에 대한 사회적 신뢰도는 급격히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언론을 통해 종종 정권의 핵심요직을 맡을 이들의 문제적인 인사청문회를 접합니다. 그들 중 상당수는 개신교인일 뿐만 아니라 열성적인 신앙 전력으로 화제를 불러 모으기도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 역시도 상당한 비리 의혹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개신교인으로서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간증거리 혹은 선망의 대상이 될 수는 있어도, 그에 걸 맞는 사회적 책임감과 도덕성을 갖추지 못한 채 도리어 배타성만을 드러낼 때, 교회는 세상의 매서운 질타와 불신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모습을 가슴깊이 새겨야 합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은 모두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도착하셔서 가장 먼저 하신 일이 성전 안을 더럽힌 장사꾼들을 몰아낸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예수님의 충동적인 만용이 아니라 일관된 삶과 가르침에 근거한 행동입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거대한 성전 건물을 바탕으로 유지돼온 대제사장 계급의 오랜 기득권과 부패한 경제 질서에 대해 정면으로 맞섰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공개적으로 성전의 파멸을 선언하며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한 오랜 유대교 신앙의 금기에 도전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주님께서 십자가형을 언도받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바로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당신의 “왕권”이 가진 의미를 곱씹어 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삶으로 선포하신 복음의 핵심 주제는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런데 이 때 “나라”로 옮긴 헬라어 “바실레이아”는 “왕국”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신·구약 성경 전체가 증언하는 ‘왕이신 하나님의 진정한 다스림’을 참 인간의 모습을 통해 전하셨고 빌라도 앞에서도 스스로를 “왕”으로 칭하셨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예수님께서는 정작 유대인들이 당신을 왕으로 세우려 할 때마다 여지없이 그들로부터 훌쩍 벗어나 왕관을 거부했다는 사실입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그것은 당신을 왕으로 옹립시키려는 이들의 마음속에 꿈틀거리는 뒤틀린 욕망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강한 왕의 지도력 안에서 안정되고 번영된 제국의 시민으로 살고 싶어하는 군중의 욕구를 파악하신 예수님은 그것을 단호하게 거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섬김과 희생을 통해 다스리는 ‘하나님의 왕국’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예수님 당시나 오늘이나 신앙의 이름으로 그럴 듯하게 꾸며대는 논리와 담론들이 정작 예수님의 뜻과 한 참 거리가 있거나 심지어 가슴아픈 불일치를 보이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신앙으로 포장한 우리의 욕망을 벗겨내고 올바르게 붙잡아야할 믿음의 핵심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그 무엇도 아닌 오직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위에 달리신 하나님의 아들의 처참한 죽음을 바라보며 그 한없는 위대한 사랑을 응시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십자가가 있어야할 곳에 화려한 성공과 업적 등으로 대신하려는 모든 왜곡되고 변질된 신앙을 단호히 거부해야 합니다.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예수님을 믿는다하면서 정작 참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더 나아가 십자가와 원수가 되는 이들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말씀에서 바울은 한 무리의 사람들을 가리켜 ‘눈물을 흘리며’ 격정적인 어조로 강하게 질책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들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라고 지칭 하며 마지막에 멸망을 맞을 것이라고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그들을 기독교 신앙을 전면으로 부정하는 불신앙의 절정으로 규정하였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이들이 기독교 신앙을 갖지 않은 비종교인이거나 핍박을 주도하는 로마 관리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빌립보 교회에 속하는, 즉 그리스도인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이 극단적인 표현까지 주저하지 않으며 기독교의 적으로 몰아세우는 사람들은 신앙 밖에 있는 이들이 아닌, 예수님을 주님으로 시인하며 세례를 받고 어려움 가운데서도 교회에 속해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이 당혹스러운 역설을 어떻게 받아들이십니까?

“내부의 적 한 명이 외부의 적 백 명보다 더 무섭다.”는 유명한 격언은 비단 전쟁뿐만 아니라, 참된 진리를 추구하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지하철이나 광장을 지나는 불특정 다수에게 무례한 언어로 전도하여 오히려 복음전파를 방해하는 이들, 교회안의 높은 직분을 명예 수단으로만 이용하는 사람들은 결코 교회 외부에 있지 않습니다. 그들 역시도 분명 우리와 같은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들의 신앙에 열심을 내면 낼수록 도리어 하나님 나라의 생명과 평화와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는 안타까운 모습들을 우리는 그리 어렵지 않게 마주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토록 바울이 강경하게 꾸짖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들일까요? 이를 19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19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이 말씀을 좀 더 쉽게 풀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들은 자기네 뱃속을 하느님으로 삼고 자기네 수치를 오히려 자랑으로 생각하며 세상 일에만 마음을 쓰는 자들입니다.”(공동번역)


여기에 보면 “십자가의 원수들”의 특징들이 나와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근본적인 “그들의 신은 배”라는 말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몸의 중심 부위인 “배”를 하나님으로 여긴다는 것이 과연 어떤 뜻일까요? 우선 1차적으로 탐식 혹은 성적인 방족으로 해석할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 상황 등을 고려한다면 이들은 어떤 음식을 먹어도 되는 지, 아닌지를 철저히 따지는, 즉 음식에 대한 율법에 지나치게 매달린 사람들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겉으로 보이는 율법 준수에 과도하게 집착하며 그것을 구원의 절대적인 기준으로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어리석음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도리어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결국 그들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아닌 땅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더구나 그들은 자연스레 예수님을 모세와 다윗과 같은 비범하고 화려한 영웅적 인물로 여겼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자연스럽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심지어 주님의 고난을 부정하여 마침내 복음의 “원수”가 되는 비극에 이르렀습니다.

자신의 배를 신으로 여기며 ‘무엇을 먹을지 말지’로 대표되는, 겉으로만 드러내려는 신앙과 영웅적 그리스도를 고대하는 믿음은 한 없이 초라하고 비참한 모습으로 십자가 위에서 구원을 이룬 예수님과 절대로 양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겸손히 그리고 아픈 마음으로 스스로를 향해 되 물어야 합니다. 혹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말하면서도, 그리고 그분의 십자가를 함께 지기 원한다면서도 정작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의 길을 걷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보이신 그 철저한 낮아짐과 약함을 통한 구원의 신비를 받아들이고 이를 자랑스러워하기 보다는 우리의 신앙을 쉽게 눈에 띄고 화려한 무언가를 통해 증명하려하지는 않으십니까? 성공을 향한 광기어린 무한경쟁과 탐욕을 신앙의 이름으로 그럴듯하게 포장하려 하지는 않으십니까?


이러한 왜곡된 신앙을 향해 바울은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외치고 있습니다. 다함께 20절 말씀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여기서 “시민권”으로 번역된 단어는 헬라어로 “폴리튀마”인 데, 좀 더 본뜻과 가깝게 옮기면 “국가”라는 뜻입니다. 이는 당시 로마제국의 정복 정책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로마는 식민지에 로마시민들과 퇴역 군인들이 모여 사는 거주지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바로 “폴리튀마”입니다. 특별히 빌립보 교회가 위치한 도시, 빌립보가 로마의 대표적인 식민지였기 때문에 교인들이 보다 이해하기 쉽도록 신약에서 유일하게 본문에만 이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이러한 ‘폴리튀마’는 외국에 존재하는 우리나라 대사관을 생각하시면 더욱 이해하기 쉽습니다. 예를 들어 일본 동경에 있는 한국 대사관은 그 것이 존재하는 위치와 관계없이 대한민국 소속의 치외법권으로서 대한민국과 자국민의 이익에 우선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바울은 바로 그리스도인의 ‘폴리튀마’, 즉 ‘궁극적인 소속의 국가’가 바로 하늘에 있고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때, “하늘”은 단순히 자연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시는 영역”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비록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무대는 분명 이 땅이지만 결코 이 세상의 법칙과 질서를 따르는 것이 아닌 하나님 나라 소속으로, ‘하늘의 폴뤼튀마’를 살아가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 나라로부터 오시는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린다고 편지합니다.

매우 중요한 사실은 여기서 “구원하는 자”로 번역된 헬라어 “소테르”는 바울이 그리 자주 사용하는 단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는 사복음서 중에서도 오직 누가만이 유일하게 사용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이 ‘소테르’는 신격화된 황제의 은혜를 뜻하는 정치적인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로마 황제는 제국에 속한 시민들의 건강과 재산을 외적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주는 소테르, 즉 “구원자”로 온 제국에 선전되었습니다. 누가는 자신의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가난한 이들의 편에 서서 로마제국에 맞선 정치적의미를 강조하며 자연스럽게 이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로마 황제가 말하는 구원과 평화가 얼마나 위선적이고 거짓된 것인지를 폭로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도 바울은 구원에 이르는 길을 로마제국의 화려하고 거대한 힘과 모습과 흡사한 것으로 변질시키며 십자가 신앙을 왜곡하는 이들에 의해 흔들리는 빌립보 교회를 향해 그리스도인들이 진정 속한 곳이 하나님 나라임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바울은 이 세상의 제국주의적 질서가 아닌 그것을 뒤 엎는 예수 그리스도께 참된 구원이 있음을 강렬히 호소하고 있습니다.


일본 도쿄돔 근처에는 재일동포들이 세운 “재일본 한국YMCA”가 있습니다. 이곳은 1906년에 세워져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오랜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 있습니다. 바로 3.1운동의 촉발시킨 “2.8 독립선언”입니다. 1919년 2월 8일, 일본 유학 중인 조선기독청년들이 YMCA 강당에 모여 독립선언을 외치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일본 제국주의의 심장부에서 그들의 폭력적 통치를 거부하며 조선독립을 외칠 수 있었을까요? 대체 이들은 어떻게 일본 유학생이라는 당시 최고의 엘리트로서의 기득권을 잃고 모진 투옥과 고문을 감수할 놀라운 용기를 낼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비록 지금 일본에서 일본어를 쓰며 공부하고 살아가고 있지만 자신들의 모국은 조선이이며, 일왕이 아닌 예수님을 따르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라는 정체성을 분명히 고수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담대히 일본의 수도 동경 한복판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대한민국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처럼 로마제국의 통치 아래 있지도 않고, 그 옛날 2.8독립선언을 외친 조선 유학생들처럼 군국주의 야욕을 차츰 불태우던 일본에 살고 있지도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 못지않게 야수와 같은 탐욕적인 시대정신은 어김없이 우리를 향해 덮쳐와 십자가로 대표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생명으로부터 우리를 갈라 놓으려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교회 밖에서 기독교 문화와 완전 무관한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크고 강한 교회” 혹은 “그리스도인의 세속적 성공에 대한 집착”등 교회 안에서 가장 기독교다운 모습으로 위장하고 있음을 유의하셔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우리의 진정한 시민권이 이 땅이 아닌 하나님 나라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물론 이것은 이 세상의 모든 삶과 일상이 무의미하고 무가치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이 세계의 근본적인 질서는 필연적으로 인간의 욕망에 맞닿을 수밖에 없고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통치와는 매우 다르며 또한 교회 안에 변형된 모습으로 수시로 범람함을 반드시 깨닫고 주의하시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에게 있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그 분께서 지신 십자가는 과연 어떤 의미로 여러분의 삶에 다가 오십니까? 십자가의 무게를 가볍게 여기며 그 자리에 은근슬쩍 화려한 성공과 성취를 가져다 놓았던 복음 왜곡의 역사를 이제 멈추기 원합니다. 이 거룩한 사순절을 보내며,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 죽임 당하신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희생과 좌절을 가슴 깊이 묵상하며 하나님 나라 시민의 긍지를 지켜나가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 우리의 낮은 몸을 변화시키셔서,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처럼 되게 하십니다.

끝으로, 본문 4장 1절 말씀을 새번역 성경으로 읽으며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고 사모하는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나의 기쁨이요 나의 면류관인 사랑하는 여러분, 이와 같이 주님 안에 굳건히 서 계십시오.”


기도: 보이는 세계 권력을 넘어서는 보이지 않는 참된 왕이신 하나님
때때로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보이신 주님의 위대한 사랑과 구원의 길을 거부하며 그와 정반대되는 화려한 성공과 성취를 신앙의 이름으로 포장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어느새 알지 못한 사이에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곤 했던 우리의 연약함과 죄를 말씀을 통해 깨닫고 회개합니다. 참된 시민권이 오직 하늘에 있음을 기억하며 이 시대의 탐욕의 질서를 결연히 거부하며 살아가겠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은혜와 평화를 따르고 전하는 용기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하늘로부터 다시 오시어 우리를 새롭게 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봉헌기도
참된 구원의 하나님
우리에게 세상과 전혀 다른 참된 시민권을 주신 은혜를 가슴 깊이 찬양 드리며 한 주간 저마다 분주한 삶 속에서 구별한 예물을 드립니다. 사랑 안에 받으시어 늦겨울, 주님의 다스림을 간절히 구하는 이들을 위해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왕이신 주님.
우리 예담 청년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각자 말 못할 여러 아픔과 사정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 고통과 고민 가운데 힘겨운 시간들을 보내는 청년들도 있습니다. 이들을 주님의 따뜻한 평화로 품으시어 하나님 나라를 넓혀가는 일꾼들로 세워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보냄의 말씀

목사: 사랑하는 여러분 평안히 돌아가십시오. 복음의 말씀을 들었으니 우리의 진정한 시민권이 하늘에 있음을 명심하며 살아가십시오. 다시 오실 만왕의 왕 예수님께서 우리를 참으로 새롭게 하십니다.

회중: 아멘, 신앙이란 포장 아래 실상 십자가와 무관한 거짓에 휩쓸리곤 했던 어리석음을 회개합니다. 진정한 힘과 구원이 오직 죽임 당하신 어린양께만 있음을 믿으며 살아가겠습니다. 주님! 우리를 십자가의 은혜 아래 하늘의 길로 이끌어 주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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