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현절 후 네 번째 주일, 2017년 1월 29일, 부산진교회 청년예배 설교, 정대진 목사
역대하 24장 15~22절 "여호야다가 죽은 후에"
기원
하나님. 연휴 가운데 주님을 예배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인 자녀들의 마음을 돌보아 주시고 정의와 긍휼과 겸손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그리고 진심으로 고백하며 회개하는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성경 – 역대하 24장 15~22절
15 여호야다가 나이가 많고 늙어서 죽으니 죽을 때에 백삼십 세라 16 무리가 다윗 성 여러 왕의 묘실 중에 장사하였으니 이는 그가 이스라엘과 하나님과 그의 성전에 대하여 선을 행하였음이더라 17 여호야다가 죽은 후에 유다 방백들이 와서 왕에게 절하매 왕이 그들의 말을 듣고 18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겼으므로 그 죄로 말미암아 진노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하니라 19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선지자를 보내사 다시 여호와에게로 돌아오게 하려 하시매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경고하였으나 듣지 아니하니라 20 이에 하나님의 영이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감동시키시매 그가 백성 앞에 높이 서서 그들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스스로 형통하지 못하게 하느냐 하셨나니 너희가 여호와를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너희를 버리셨느니라 하나 21 무리가 함께 꾀하고 왕의 명령을 따라 그를 여호와의 전 뜰 안에서 돌로 쳐죽였더라 22 요아스 왕이 이와 같이 스가랴의 아버지 여호야다가 베푼 은혜를 기억하지 아니하고 그의 아들을 죽이니 그가 죽을 때에 이르되 여호와는 감찰하시고 신원하여 주옵소서 하니라
설교 전 기도(성령님의 조명을 구하는 기도)
하나님.
성령님께서 비추시는 빛을 따라 진리를 향해 나아가길 원합니다.
이 시간 우리의 마음을 깨우시어 주님의 뜻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설교 - “여호야다가 죽은 후에”
사람은 누구나 양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천사와 악마 그리고 성자와 강도가 내면에 공존 하는 게 인간의 본성입니다. 이것은 당연하게도 권력자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마냥 좋은 왕도 완전히 나쁘기만 한 왕도 없습니다. 모든 왕들은 그의 통치기간 동안 빛과 그림자가 언제나 함께하기 마련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남유다의 왕 요아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열왕기하 11장과 역대하 22, 23장은 그가 태어나기 전후 복잡한 정치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북왕국의 최악의 폭군인 아합의 딸이자 남왕국 여호람 왕의 아내인 아달랴는 아들 아하시야가 갑자기 목숨을 잃자 손자들을 죽여 권력을 손에 쥐었습니다. 그렇게 이스라엘 역사상 유일한 여왕으로서 7년간 폭력과 억압으로 독재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하지만 간난 아기인 왕자 요아스가 그 비극의 와중에 고모 여호사브앗 덕에 목숨을 건졌습니다. 그리고 마침 그녀의 남편, 즉 요아스의 고모부인 여호야다는 제사장이었기 때문에 성전에 숨어서 자랄 수 있었습니다. 그 후 6년 뒤에 여호야다가 혁명을 일으켜 아달랴를 몰아낸 후 요아스는 불과 7살의 나이에 왕이 되어 무려 40년 동안이나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따라서 남 유다 왕 요아스에게 있어 제사장 여호야다는 나라를 구한 민족의 영웅인 것은 물론이고 자신의 목숨을 구해주고 대신 보살펴준 아버지나 다름없는 존재였습니다. 때문에 그는 여호야다로부터 상당히 좋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역대하 24장 2절 제가 읽겠습니다.
2 제사장 여호야다가 세상에 사는 모든 날에 요아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으며
‘주님께서 보시기에 정직했다.’는 칭찬은 결코 아무나 들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이 자체만으로도 굉장한 호평입니다. 실제로 열왕기하와 역대하 모두 그의 훌륭한 업적들을 기록하였는데 그중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예루살렘성전 복구”입니다. 요아스에 앞서 권력을 차지한 아달랴는 아버지 아합과 마찬가지로 바알을 숭배하였습니다. 그래서 당연히도 야훼 신앙을 핍박하였는데 그 핵심인 성전을 가만히 두었을 리 없었습니다. 때문에 성전이 상당히 파괴된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요아스는 자신의 통치력을 집중하여 성전수리에 매달렸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성전은 하나의 거대한 종교시설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가 실체적으로 드러난 곳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파괴된 성전을 회복시키는 것은 곧 이스라엘 백성들의 무너진 신앙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다른 정책들을 기회비용으로 지불하며 포기하는 결단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요아스의 모습은 분명 주님께서 보시기에 정직한, 칭찬받아 마땅한 올바른 통치였습니다.
하지만 앞서 제가 읽어드린 역대하 24장 2절에 담긴 스산한 분위기를 눈치 채신 분들이 많으실 겁니다. 역대하 역사가는 요아스에 대해 단순명료하게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했다는 평가만을 내리지 않고 그 앞에 “제사장 여호야다가 세상에 사는 모든 날에”라는 단서를 붙였습니다. 실제로 요아스 왕은 여호야다가 곁에서 신앙으로 교훈할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통치 후반부에 보여주었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 17절 말씀은 “여호야다가 죽은 후에”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 때 요아스의 나이는 적어도 서른은 넘겼고 왕으로서도 20년이 훌쩍 넘은 기간을 보냈습니다. 따라서 그 시점의 그는 어른이었을 뿐만 아니라 상당히 숙련된 정치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차츰 여호야다의 조언들에 질렸던 까닭인지 그가 죽은 후,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하였습니다. 본문 17, 18절 말씀 다함께 읽겠습니다.
17 여호야다가 죽은 후에 유다 방백들이 와서 왕에게 절하매 왕이 그들의 말을 듣고 18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겼으므로 그 죄로 말미암아 진노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하니라
그동안 여호야다의 눈치를 살피던 신하들이 요아스에게 다가와 아세라 숭배를 건의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는 단순한 개종문제가 아닙니다. 고대 제정일치 사회에서 종교는 곧 통치이념을 뜻합니다. 간략히 정리하자면 야훼 신앙은 희년을 비롯한 여러 율법을 통해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로 대표되는 약자를 위한 정치를 표방합니다. 반면에 풍요와 번영을 추구하는 바알, 아세라 종교는 철저히 지주들의 이익을 대변합니다. 그래서 권력자들에게 유리하고 매력적인 신앙을 제공하였고 그 까닭에 요아스는 더 이상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아세라를 섬겼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요아스를 일깨우기 위해 여러 예언자들을 보내셨지만 예루살렘의 기득권들은 더 이상 진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마침내 여호야다의 아들인 제사장 스가랴를 통해 엄중히 경고하셨습니다. 20절 말씀 제가 읽겠습니다.
20 이에 하나님의 영이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감동시키시매 그가 백성 앞에 높이 서서 그들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스스로 형통하지 못하게 하느냐 하셨나니 너희가 여호와를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너희를 버리셨느니라 하나
그러자 요아스와 그 주변 권력자들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를 돌로 쳐 공개사형을 시켰습니다. 이에 대해 본문 22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22 요아스 왕이 이와 같이 스가랴의 아버지 여호야다가 베푼 은혜를 기억하지 아니하고 그의 아들을 죽이니 그가 죽을 때에 이르되 여호와는 감찰하시고 신원하여 주옵소서 하니라
앞서 살펴보았듯이 요아스에게 여호야다는 단순한 고모부가 아니었습니다. 실상 아버지나 다름없는, 오히려 보통의 아버지들 이상의 은혜를 입은 은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은인인 제사장 여호야다가 되찾아준 권력을 이용해 아무런 죄가 없는, 오히려 아버지와 똑같이 진리를 외쳤다는 이유로 그의 아들을 살해 하였습니다. 게다가 그 둘은 사촌지간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때 요아스는 더 이상 주님께서 보시기에 정직하지 않은 악인으로 돌변하였음을 분명히 알게 됩니다. 통치 전반에 열정을 쏟아 성전을 수리한 그 선한 왕은 이제 온데간데없습니다. 대신 권력에 취해 생명을 우습게 여기며 평범한 백성들을 학대하는 폭군만이 예루살렘 왕궁에 남아있을 따름입니다.
이렇듯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해, 이름만 가린다면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통치전반과 후반이 완전히 바뀐 요아스를 발견합니다. 그러므로 이 지점에서 엄중히 질문해야 합니다. 과연 무엇이 그렇게 요아스를 변하게 한 것일까요? 이를 깨닫기 위해 본문 17, 18절 말씀 다시 한 번 다함께 읽겠습니다.
17 여호야다가 죽은 후에 유다 방백들이 와서 왕에게 절하매 왕이 그들의 말을 듣고 18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겼으므로 그 죄로 말미암아 진노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하니라
요아스가 변절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바로 여호야다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그의 곁에서 말씀을 가르치며 진리로 일깨워줄 어른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이는 바꿔 말하자면 그가 그동안 “신앙의 자립”을 이루지 못한 채 여호야다에게만 의존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본문을 통해 신앙의 자립이 갖는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나 홀로 잘나서 믿음을 가지고 지금 이 자리에 오신 분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꼭 부모님이 아니더라도 친구와 선후배 혹은 교회학교 선생님이나 목회자 등 여러분에게 신앙을 전해주고 또 성숙하도록 도와준 많은 고마운 분들이 계시기 때문에 저마다의 신앙을 지금까지 지켜올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분들에게 빚진 마음을 잊지 말고 늘 보답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신앙의 자립을 위해 몸부림 쳐야 합니다. 부모님역시 하나님을 오해할 위험에 항상 노출된 연약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목회자들 역시 순도 100%의 진리를 완벽히 이해하고 전할 수 없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아무리 훌륭한 신앙을 가진 어른이나 유명한 신앙프로그램과 선교단체의 훈련이라 할지라도 우리 각자의 신앙을 전부 책임질 수 없음을 꼭 명심하며 각자의 삶의 언어로 신앙을 새롭게 해석하며 뿌리 내려야 합니다. 그래야만 본문 속 요아스의 오류를 반복하지 않고 어떤 유혹과 시련도 의연하게 헤쳐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저는 운전면허는 일찌감치 취득했지만 자동차를 유지할 여건과 환경이 되지 않아서 오랫동안 운전은 하지 않은, 흔히 말하는 “장롱면허”였습니다. 그러다 재작년 해외 한인교회에서 귀국하고 돌아와 부목사 사역을 이어가기 위해 적지 않은 돈과 시간을 들여 도로연수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아직 서툴긴 했지만 어딜 가든 운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이곳에 내려왔습니다. 그러나 부산에서 운전한다는 것은 결코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도로 위에서 많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때문에 기존에 있던 구형 네비게이션을 처분하고 조금 무리를 해서 최신형 네비게이션을 구입했습니다. 그 덕에 운전을 좀 더 수월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복잡한 부산지리도 많이 익숙해져서 작년보다는 큰 어려움 없이 운전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분명 다른 무엇보다 최신형 네비게이션의 도움이 컸고 지금도 많이 의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가 운전하는 내내 네비게이션만 쳐다보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행동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처음과 같은 빈도로 네비게이션을 사용한다면 아직도 운전이 미숙하다는 의미입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가급적 네비게이션에 의지하지 않고 운전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그것이 쓸모없어서가 아니라 스스로 더욱 안전하게 운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네비게이션의 존재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저마다의 곁에 두신 여호야다들, 여러 모양의 신앙의 선배와 스승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분명 한국교회의 신앙 전통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그것은 일종의 믿음의 네비게이션과 같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신앙을 물려준 부모님과 선생님 그리고 선배들을 존경해야 합니다. 그러나 제 아무리 훌륭한 네비게이션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흘낏 바라보며 참고할 대상이지 그 자체가 길이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각자의 신앙 전통이 알려주는 가르침 자체는 충분히 존중하되 그것을 딛고 일어나 믿음의 자립을 이루는 일에 항상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에게 전해진 전통의 올바른 역할입니다. 바로 이 사실을 잊은 채 자신만의 신앙을 굳게 세우지 못한 결과 요아스는 결국 말년에 신앙을 잃고 하나님 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교훈을 본문 말씀을 통해 분명히 깨달으며 스스로의 믿음을 점검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요아스가 처음에 보여준, 하나님 앞에 선하고 정직한 모습을 삶의 마지막 까지 지켜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양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평생 믿음과 불신, 희생과 욕망 사이에서 방황하며 살아갑니다. 그런 우리 곁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저마다의 신앙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준 이들, 각자의 여호야다에게 거듭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의 믿음을 그들에게 마냥 의존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고 실천하며 우뚝 서 가는 신앙 자립을 이루어 나가시길 바랍니다. 그런 우리에게 진리의 성령님께서 늘 함께하시고 돌보시며 격려해 주실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남유다의 왕 요아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열왕기하 11장과 역대하 22, 23장은 그가 태어나기 전후 복잡한 정치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북왕국의 최악의 폭군인 아합의 딸이자 남왕국 여호람 왕의 아내인 아달랴는 아들 아하시야가 갑자기 목숨을 잃자 손자들을 죽여 권력을 손에 쥐었습니다. 그렇게 이스라엘 역사상 유일한 여왕으로서 7년간 폭력과 억압으로 독재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하지만 간난 아기인 왕자 요아스가 그 비극의 와중에 고모 여호사브앗 덕에 목숨을 건졌습니다. 그리고 마침 그녀의 남편, 즉 요아스의 고모부인 여호야다는 제사장이었기 때문에 성전에 숨어서 자랄 수 있었습니다. 그 후 6년 뒤에 여호야다가 혁명을 일으켜 아달랴를 몰아낸 후 요아스는 불과 7살의 나이에 왕이 되어 무려 40년 동안이나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따라서 남 유다 왕 요아스에게 있어 제사장 여호야다는 나라를 구한 민족의 영웅인 것은 물론이고 자신의 목숨을 구해주고 대신 보살펴준 아버지나 다름없는 존재였습니다. 때문에 그는 여호야다로부터 상당히 좋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역대하 24장 2절 제가 읽겠습니다.
2 제사장 여호야다가 세상에 사는 모든 날에 요아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으며
‘주님께서 보시기에 정직했다.’는 칭찬은 결코 아무나 들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이 자체만으로도 굉장한 호평입니다. 실제로 열왕기하와 역대하 모두 그의 훌륭한 업적들을 기록하였는데 그중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예루살렘성전 복구”입니다. 요아스에 앞서 권력을 차지한 아달랴는 아버지 아합과 마찬가지로 바알을 숭배하였습니다. 그래서 당연히도 야훼 신앙을 핍박하였는데 그 핵심인 성전을 가만히 두었을 리 없었습니다. 때문에 성전이 상당히 파괴된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요아스는 자신의 통치력을 집중하여 성전수리에 매달렸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성전은 하나의 거대한 종교시설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가 실체적으로 드러난 곳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파괴된 성전을 회복시키는 것은 곧 이스라엘 백성들의 무너진 신앙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다른 정책들을 기회비용으로 지불하며 포기하는 결단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요아스의 모습은 분명 주님께서 보시기에 정직한, 칭찬받아 마땅한 올바른 통치였습니다.
하지만 앞서 제가 읽어드린 역대하 24장 2절에 담긴 스산한 분위기를 눈치 채신 분들이 많으실 겁니다. 역대하 역사가는 요아스에 대해 단순명료하게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했다는 평가만을 내리지 않고 그 앞에 “제사장 여호야다가 세상에 사는 모든 날에”라는 단서를 붙였습니다. 실제로 요아스 왕은 여호야다가 곁에서 신앙으로 교훈할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통치 후반부에 보여주었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 17절 말씀은 “여호야다가 죽은 후에”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 때 요아스의 나이는 적어도 서른은 넘겼고 왕으로서도 20년이 훌쩍 넘은 기간을 보냈습니다. 따라서 그 시점의 그는 어른이었을 뿐만 아니라 상당히 숙련된 정치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차츰 여호야다의 조언들에 질렸던 까닭인지 그가 죽은 후,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하였습니다. 본문 17, 18절 말씀 다함께 읽겠습니다.
17 여호야다가 죽은 후에 유다 방백들이 와서 왕에게 절하매 왕이 그들의 말을 듣고 18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겼으므로 그 죄로 말미암아 진노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하니라
그동안 여호야다의 눈치를 살피던 신하들이 요아스에게 다가와 아세라 숭배를 건의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는 단순한 개종문제가 아닙니다. 고대 제정일치 사회에서 종교는 곧 통치이념을 뜻합니다. 간략히 정리하자면 야훼 신앙은 희년을 비롯한 여러 율법을 통해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로 대표되는 약자를 위한 정치를 표방합니다. 반면에 풍요와 번영을 추구하는 바알, 아세라 종교는 철저히 지주들의 이익을 대변합니다. 그래서 권력자들에게 유리하고 매력적인 신앙을 제공하였고 그 까닭에 요아스는 더 이상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아세라를 섬겼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요아스를 일깨우기 위해 여러 예언자들을 보내셨지만 예루살렘의 기득권들은 더 이상 진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마침내 여호야다의 아들인 제사장 스가랴를 통해 엄중히 경고하셨습니다. 20절 말씀 제가 읽겠습니다.
20 이에 하나님의 영이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감동시키시매 그가 백성 앞에 높이 서서 그들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스스로 형통하지 못하게 하느냐 하셨나니 너희가 여호와를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너희를 버리셨느니라 하나
그러자 요아스와 그 주변 권력자들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를 돌로 쳐 공개사형을 시켰습니다. 이에 대해 본문 22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22 요아스 왕이 이와 같이 스가랴의 아버지 여호야다가 베푼 은혜를 기억하지 아니하고 그의 아들을 죽이니 그가 죽을 때에 이르되 여호와는 감찰하시고 신원하여 주옵소서 하니라
앞서 살펴보았듯이 요아스에게 여호야다는 단순한 고모부가 아니었습니다. 실상 아버지나 다름없는, 오히려 보통의 아버지들 이상의 은혜를 입은 은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은인인 제사장 여호야다가 되찾아준 권력을 이용해 아무런 죄가 없는, 오히려 아버지와 똑같이 진리를 외쳤다는 이유로 그의 아들을 살해 하였습니다. 게다가 그 둘은 사촌지간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때 요아스는 더 이상 주님께서 보시기에 정직하지 않은 악인으로 돌변하였음을 분명히 알게 됩니다. 통치 전반에 열정을 쏟아 성전을 수리한 그 선한 왕은 이제 온데간데없습니다. 대신 권력에 취해 생명을 우습게 여기며 평범한 백성들을 학대하는 폭군만이 예루살렘 왕궁에 남아있을 따름입니다.
이렇듯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해, 이름만 가린다면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통치전반과 후반이 완전히 바뀐 요아스를 발견합니다. 그러므로 이 지점에서 엄중히 질문해야 합니다. 과연 무엇이 그렇게 요아스를 변하게 한 것일까요? 이를 깨닫기 위해 본문 17, 18절 말씀 다시 한 번 다함께 읽겠습니다.
17 여호야다가 죽은 후에 유다 방백들이 와서 왕에게 절하매 왕이 그들의 말을 듣고 18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겼으므로 그 죄로 말미암아 진노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하니라
요아스가 변절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바로 여호야다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그의 곁에서 말씀을 가르치며 진리로 일깨워줄 어른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이는 바꿔 말하자면 그가 그동안 “신앙의 자립”을 이루지 못한 채 여호야다에게만 의존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본문을 통해 신앙의 자립이 갖는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나 홀로 잘나서 믿음을 가지고 지금 이 자리에 오신 분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꼭 부모님이 아니더라도 친구와 선후배 혹은 교회학교 선생님이나 목회자 등 여러분에게 신앙을 전해주고 또 성숙하도록 도와준 많은 고마운 분들이 계시기 때문에 저마다의 신앙을 지금까지 지켜올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분들에게 빚진 마음을 잊지 말고 늘 보답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신앙의 자립을 위해 몸부림 쳐야 합니다. 부모님역시 하나님을 오해할 위험에 항상 노출된 연약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목회자들 역시 순도 100%의 진리를 완벽히 이해하고 전할 수 없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아무리 훌륭한 신앙을 가진 어른이나 유명한 신앙프로그램과 선교단체의 훈련이라 할지라도 우리 각자의 신앙을 전부 책임질 수 없음을 꼭 명심하며 각자의 삶의 언어로 신앙을 새롭게 해석하며 뿌리 내려야 합니다. 그래야만 본문 속 요아스의 오류를 반복하지 않고 어떤 유혹과 시련도 의연하게 헤쳐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저는 운전면허는 일찌감치 취득했지만 자동차를 유지할 여건과 환경이 되지 않아서 오랫동안 운전은 하지 않은, 흔히 말하는 “장롱면허”였습니다. 그러다 재작년 해외 한인교회에서 귀국하고 돌아와 부목사 사역을 이어가기 위해 적지 않은 돈과 시간을 들여 도로연수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아직 서툴긴 했지만 어딜 가든 운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이곳에 내려왔습니다. 그러나 부산에서 운전한다는 것은 결코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도로 위에서 많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때문에 기존에 있던 구형 네비게이션을 처분하고 조금 무리를 해서 최신형 네비게이션을 구입했습니다. 그 덕에 운전을 좀 더 수월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복잡한 부산지리도 많이 익숙해져서 작년보다는 큰 어려움 없이 운전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분명 다른 무엇보다 최신형 네비게이션의 도움이 컸고 지금도 많이 의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가 운전하는 내내 네비게이션만 쳐다보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행동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처음과 같은 빈도로 네비게이션을 사용한다면 아직도 운전이 미숙하다는 의미입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가급적 네비게이션에 의지하지 않고 운전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그것이 쓸모없어서가 아니라 스스로 더욱 안전하게 운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네비게이션의 존재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저마다의 곁에 두신 여호야다들, 여러 모양의 신앙의 선배와 스승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분명 한국교회의 신앙 전통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그것은 일종의 믿음의 네비게이션과 같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신앙을 물려준 부모님과 선생님 그리고 선배들을 존경해야 합니다. 그러나 제 아무리 훌륭한 네비게이션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흘낏 바라보며 참고할 대상이지 그 자체가 길이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각자의 신앙 전통이 알려주는 가르침 자체는 충분히 존중하되 그것을 딛고 일어나 믿음의 자립을 이루는 일에 항상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에게 전해진 전통의 올바른 역할입니다. 바로 이 사실을 잊은 채 자신만의 신앙을 굳게 세우지 못한 결과 요아스는 결국 말년에 신앙을 잃고 하나님 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교훈을 본문 말씀을 통해 분명히 깨달으며 스스로의 믿음을 점검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요아스가 처음에 보여준, 하나님 앞에 선하고 정직한 모습을 삶의 마지막 까지 지켜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양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평생 믿음과 불신, 희생과 욕망 사이에서 방황하며 살아갑니다. 그런 우리 곁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저마다의 신앙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준 이들, 각자의 여호야다에게 거듭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의 믿음을 그들에게 마냥 의존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고 실천하며 우뚝 서 가는 신앙 자립을 이루어 나가시길 바랍니다. 그런 우리에게 진리의 성령님께서 늘 함께하시고 돌보시며 격려해 주실 줄 믿습니다.
설교 후 기도
변함없는 사랑의 하나님
우리 곁의 수많은 여호야다를 통해 위험에서 건지시고 진리로 일깨워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동시에 훌륭한 신앙의 스승들을 뛰어 넘는 신앙의 자립을 이룰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평생에 주님만을 높이며 그 눈길 속에 정직함을 드러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봉헌기도
언제나 우리를 지켜보시며 돌보시는 하나님
우리의 연약한 믿음을 도우시며 생명의 길로 이끄시는 은혜에 감사와 찬양을 드리며 한 주간 삶으로 구별한 예물을 드립니다. 기쁘게 받으시어 주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예담청년들을 위해 축복하며 기도합니다. 설 연휴 기간 먼 길 오가는 여정을 안전히 지켜 주시고 귀한 만남과 교제가운데 함께 하시어 평화로 더욱 가득한 가정되게 하여주시옵소서. 몸과 마음의 건강을 늘 돌보아 주시고 숱한 방황과 혼돈 속에서도 항상 주님의 품에 안겨 가야할 길을 향해 올바로 발걸음을 내딛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파송의 말씀
목사: 사랑하는 여러분 평안히 돌아가십시오. 복음의 말씀을 들었으니 날마다 진리에 귀를 기울이고 신앙의 자립을 이루며 살아가십시오. 생명의 하나님께서 오는 한 주간도 항상 동행하시고 돌보아 주십니다.
예담: 아멘! 다수가 외치는 탐욕의 질서에 마음을 뺏기며 생명과 정의의 길을 거부하였던 어리석음을 반성합니다. 남들의 도움만이 아닌 스스로의 의지와 성찰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 만나가겠습니다. 주님! 날마다 저희를 굽어 살펴 주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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