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순절 후 열 세 번째 주일, 2016년 8월 14일, 부산진교회 청년설교, 정대진 목사
누가복음 11장 45-54절 "진리와 마주할 때"
45 한 율법교사가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까지 모욕하심이니이다 46 이르시되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 47 화 있을진저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드는도다 그들을 죽인 자도 너희 조상들이로다 48 이와 같이 그들은 죽이고 너희는 무덤을 만드니 너희가 너희 조상의 행한 일에 증인이 되어 옳게 여기는도다 49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가 일렀으되 내가 선지자와 사도들을 그들에게 보내리니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며 또 박해하리라 하였느니라 50 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되 51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과연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 52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교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서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 53 거기서 나오실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거세게 달려들어 여러 가지 일을 따져 묻고 54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을 책잡고자 하여 노리고 있더라
현재 한국교회를 가장 어지럽히는 이단은 중 하나는 “신천지” 입니다. 특별히 제 고향교회의 경우 대전에서 가장 큰 신천지 교회가 걸어서 10분도 안 걸리는 무척 가까운 거리에 있어서 여러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해서 결코 잊을 수 없는 매우 인상 깊은 일을 20대 중반에 겪은 적이 한 번 있었습니다.
어느 날 제가 그 신천지 교회 앞을 지나치다가 그 곳 정문을 지나가기 전에 어느 남녀 한 쌍이 그 곳에서 밖으로 나와서 골목에 주차된 차량 옆에 다가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더니 그 둘은 자동차 와이퍼에 꽂혀 있던 어느 교회 전도지를 뽑았습니다. 그것은 공교롭게도 당시 제가 전도사로 섬겼던 고향교회의 전도지였습니다.
예기치 않게 그 모든 것을 다 지켜보고 급한 약속이 있어서 발걸음을 서둘러 그들을 지나쳐 갔습니다. 그러자 그 중 여자 분이 뒤에서 저를 불러 세웠습니다. 그리고 좀 전에 그들이 행한 모든 것을 제가 다 알고 있는 걸 모른 채 이렇게 말을 걸어왔습니다.
“저, 저희는 OO 교회에서 나왔는데요. 혹시 시간 있으시면 잠깐 얘기 좀 하실 수 있으세요?”
그러면서 제게 이러저러한 질문들을 꺼내려 하였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저는 살며시 웃으며 이렇게 말 하였습니다.
“저, 저는 그 교회 전도사인데요.”
그러자 그들은 상당히 당황스러워 하며 말을 머뭇거린 후 이내 다른 곳으로 바삐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여기서 한 번 생각해볼 부분이 있습니다. 그 두 사람은 분명히 신천지에서 열심히 교육 받은 데로 아주 많은 말들을 유창하게 풀어놓을 준비를 잔뜩 하였을 겁니다. 하지만 그들이 이처럼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제 앞에서 황급히 사라진 이유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가짜 임에도 불구하고 진짜를 속이려 하였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일을 겪으면서 한 가지 분명히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마치 어둠은 빛과 대립할 수 없고 힘없이 물러나듯 아무리 그럴싸하게 진리로 위장한다 할지라도 거짓은 결코 진리와 마주하지 못하고 그 앞에서 그저 침묵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말씀에는 이처럼 참과 거짓의 명확한 구분과 대치가 매우 극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진리 이신 예수님, 그리고 말씀을 왜곡하여 이용하는 거짓 율법교사들 입니다.
본문 말씀은 누가복음 11장 37절부터 시작된 이야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는 어느 바리새인의 초청으로 점심을 함께 드셨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손을 씻지 않은 것을 보고 그 바리새인이 무척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유대인들은 구약의 율법들을 지키기 위해서 여러 가지 하위 조항들을 만들어 열심히 지키고 있었는데 식사 전에 손을 씻는 것 역시 그것들 중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즉 손을 씻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있어 단순히 청결 문제를 넘어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함을 지키는 중요한 신앙 행위였습니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에게 메시아로 추앙받고 있는, 그래서 자신의 집으로 모셔 식사를 하고 있는 예수님께서 이처럼 사소한 율법도 지키지 않는 모습을 보며 그 바리새인은 그만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의 생각으로는 율법을 지키지 않는 예수님을 경건한 유대인으로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그의 생각을 아시고 몹시 분노하시면서 그를 비롯한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화 있을진저”라고 단호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닥칠 세 가지 화, 즉 재앙들을 선언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바로 앞에 벌어진 사건이었습니다. 그러자 이 때 그 자리에 함께 했던 어느 율법교사 한 사람이 투덜거리며 예수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45절 제가 읽겠습니다.
45 한 율법교사가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까지 모욕하심이니이다
율법교사는 앞서 예수님께서 열거한 바리새인들을 향한 ‘화’들이 자신들에게도 동일하게 해당되는 것임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자존심을 내세우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당대 이스라엘 사회의 최고 지성인으로서 율법을 읽고 그것을 해석하여 유대인들의 삶을 지도하는 굉장한 권위를 가진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신들과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며 같은 신학을 공유하는 바리새인들의 경건 생활을, 그들이 보기에 불량한 신앙을 가진 예수님께서 감히 평가절하 하는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진정한 말씀의 종들이며 오직 자기들의 신념만이 참 진리라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화’의 선포를 이제 바리새인에게서 율법 교사를 향해 돌려 퍼붓기 시작하십니다. 46절, 52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46 이르시되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
52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교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서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
이 두 절의 말씀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들은 너희 자신이 진짜라고 믿고 있지만 실은 너희는 철저히 거짓이고 가짜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그들을 향해 위험을 무릅쓰고 주저 없이 거짓 예언자라고 분명히 단언하셨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며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자신들의 욕망을 위해 끊임없이 제멋대로 말씀을 끌어당기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제국의 압제라는 외부적 위기 속에서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철저히 뭉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들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이들이 바로 율법 교사들입니다. 성전이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한다면 그러한 하나님의 뜻을 가장 명확히 드러내주는 것이 바로 그들의 손에 쥐어진 구약 율법인 까닭입니다.
율법 교사들은 그러한 구약에 있어 단연 최고의 전문가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그럴듯한 명분 아래 동족을 억압하며 그릇된 이득을 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누구도 감히 말씀에 대한 그들의 권위에 저항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진리는 다른 누구도 아닌, 주님의 말씀을 가장 잘 안다고 자부하는 이들에 의해서 철저히 왜곡되고 거짓으로 전락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스스로를 진정한 말씀의 선포자로 자처하는 이들이 오히려 거짓 예언자로 변질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와 같은 복음 왜곡의 끔찍한 현실을 매섭게 꾸짖으시며 분노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역사를 더듬어 올라 그들 조상들의 옛 이야기를 하십니다. 창세 이후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마음을 품고 당신의 말씀을 바르게 증거 할 예언자들을 끊임없이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예언자들은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거짓 예언자들의 거센 저항에 부딪혀야 했으며 수도 없이 많은 모욕과 핍박을 당했고 심지어 목숨까지 잃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아벨부터 사가랴 까지 이스라엘 역사는 거짓 예언자들에 의해 죽임 당한 참 예언자들의 피로 얼룩져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당신 앞에 있는 율법 교사들을 향하여 ‘너희들도 너희 조상들과 다름없이 참 예언자들의 피에 굶주려 하는 거짓 예언자’라고 거침없이 책망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거짓의 또 다른 특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거짓은 진리와 마주할 때 죽이려 한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거짓은 결코 진리와 공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거짓이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진리를 없애는 것임을 거짓은 본능적으로 자각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을 신구약 성경과 교회의 역사는 너무도 생생하게 우리에게 증언합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주님은 참 예언자를 넘어 진리 그 자체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 속 율법 교사들과 같은 거짓 예언자들은 주님의 참된 말씀과 마주 하며 분노에 차올랐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들은 마침내 힘을 합하여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예수님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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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권력자들의 이와 같은 “십자가 처형”은 역사 속에서 계속 반복되어 왔습니다. 그 한 예를 여러분께 소개해 드리고 싶습니다. 바로 엘살바도르의 “로메로 신부”의 이야기 입니다.
중남미에 위치한 엘살바도르는 "구원자 하느님"이라는 나라 이름의 걸맞게 스페인 식민지 시절부터 전통적인 가톨릭 국가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곳 교회는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를 이루기 보다는 부자와 군대의 편에 서서 절대 다수의 민중들을 극심하게 착취하는데 동조하였습니다. 그래서 매우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신앙을 가진 로메로 신부 1977년 엘살바도르의 수도 산살바도르의 대주교로 선임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대주교가 되고 불과 2주 뒤에 절친한 친구인 그란데 신부가 암살을 당했습니다. 그가 가난한 이들의 편에 서서 부패한 기득권과 맞서 싸웠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 로메로 신부는 그전과 전혀 다른 삶의 길을 걸었습니다. 군대에 의해 억울하게 죽임당한 사람들의 이름을 미사 때 외치고 "실종자 어머니 모임"을 만들고 "엘살바도르 시민 인권 위원회"를 조직하여 민중을 억압한 폭력 사건들을 기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당연히도 그를 지지했던 기득권층들이 집요하게 그에게 협박과 회유를 했습니다. 하지만 로메로 신부가 미국에게 엘살바도르의 군대에 무기를 지원하지 말라고 요청한 일이 드러나자 그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로메로 신부는 1980년 3월 24일 병원 성당에서 말기암 환자들을 위한 미사를 집전하다가 암살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앞서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며 이런 강론을 남긴 적이 있습니다.
“그들이 나를 죽이는 데 성공한다면, 당신은 내가 그들을 용서하고 축복하며 죽었다고 신자들에게 전해도 좋습니다. 그래서 저들이 시간을 낭비했다는 확신을 갖기만을 바랍니다. 한 주교는 죽지만 하느님의 교회, 즉 민중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이 마지막 문장을 오늘 말씀과 관련하여 이렇게 바꾸고 싶습니다.
“한 예언자는 죽지만,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셨지만, 하나님의 진리와 복음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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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권력자들의 이와 같은 “십자가 처형”은 역사 속에서 계속 반복되어 왔습니다. 그 중에서 한 순교자의 이야기를 염창선 박사님의 글을 토대로 여러분께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그는 바로 사도요한의 제자인 폴리캅입니다.
로마 안토니우스 피우스 황제 시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칭송받았던 화려한 항구도시 서머나에는 10여 일간 기독교인들에 대한 처참한 박해가 있었습니다. 당시 로마 시민들은 기독교인들을 황제를 숭배하지 않는 ‘무신론자’로 간주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일부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것이 신성 모독 행위라고 분노하며 기독교인들에 대한 학살에 동조하였습니다.
따라서 군중들은 매일같이 원형 경기장에 빼곡히 모여 굶주린 맹수들에게 잡아먹히는 성도들을 향해 “무신론자에게 죽음을, 무신론자에게 죽음을!”라고 외치며 열광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서머나 교회의 목회자인 폴리캅이 체포되어 이제 화형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약 70년경에 태어나서 사도요한에게 복음을 배우고 그에 의해 서머나 교회에 임명된 당대 최고의 신앙지도자로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런 그에게 총독은 이제 나이를 생각해서,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로마황제에게 경배하여 목숨을 건지라고 설득했습니다. 그러자 폴리캅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내가 86년 동안 그분을 섬겨왔지만 그분은 내게 절대로 해를 입히신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나의 왕이요 나의 구주이신 그분을 욕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화형대 앞에 서서 하늘을 우러러 보며 다음과 같은 기도를 드린 후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오, 하나님, 우리에게 당신을 알려준 사랑받으시고 찬양받으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시여! 오, 천사들의 하나님, 권세와 창조의 하나님, 당신 앞에서 살아가는 모든 의인들의 하나님, 당신을 찬양하나이다. 오늘 이 순간에 나를 귀하게 여기셔서 수많은 순교자들 중에서 영혼과 육체가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하도록 그리스도의 잔에 참여하오니, 오늘 수많은 순교자들 중에서 당신 앞에 기름지고 살진 번제가 되게 하옵소서.
거짓이 없으시고 참되신 하나님이 전에 예언하신 대로 성취하셨고, 오늘은 그것을 준비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 영원하신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모든 것에 찬양과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성령 안에서 아들과 함께 당신에게 영광이 지금부터 영원까지 함께하시옵소서. 아멘!”
이때가 서기 155년 경, 사순절 어간인 2월 23일이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순교는 당시 수많은 이들에게 충격과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서머나 교회 교인들은 그의 신앙과 삶을 후세에 기리고자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를 비롯한 순교자들의 이야기는 고대 교회에서 사순절 성찬 때마다 낭독되어서 복음을 따르며 전하는 삶은 곧 죽음의 위협과 직면한다는 사실을 신자들에게 일깨우며 각자의 믿음을 돌아보는 전통을 남겨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와 같은 명확한 진리 앞에 스스로를 향해 정직히 질문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말씀 앞에 감격과 애통함으로 우리 자신의 그릇된 욕망을 죽이고 있습니까? 아니면 혹시 불쾌함과 노여움으로 진리를 죽이려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제가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 대부분의 남학생들이 장난스럽게 하는 행동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학교에서 신는 유명 신발 브랜드의 로고를 그려 넣는 것입니다. 심지어 흰 고무신에다 나이키 상표를 그려 넣고 다니는 대학생들을 본 기억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슬리퍼 혹은 고무신에 제 아무리 그럴듯하게 유명 상표를 그려 넣었다 한들 그것을 가리켜 ‘가짜’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그저 장난스럽게 만든 ‘다른’ 신발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만약에 어떤 누군가가 고의적으로 자신의 이득을 취하기 위해 정교하게 나이키 운동화 모양으로 흉내 내어 신발을 만든다면 그 신발은 ‘다른’ 나이키 운동화가 아니라 ‘가짜’ 나이키 운동화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만약에 어떤 누군가가 성경 구절을 인용 하고 기독교인들의 겉모습을 흉내 낸다 할지라도 누가 봐도 교회와 전혀 무관한 삶을 산다면 그는 그저 ‘다른’ 종교인에 불과합니다. 허나 아무리 열심히 교회에 출석하고 거룩한 모습을 보인다 할지라도 그 모든 것이 실은 자신의 그릇된 욕망을 이루기 위함이고 그 중심에 하나님이 없다면 그는 변질된 가짜 성도 지나지 않습니다.
창세 이래로 주님의 이름을 가장 심하게 먹칠한 이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가장 잘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 그 누구보다 신앙 전통을 제일 열심히 지킨다고 자신했던 사람들이 정작 하나님의 가장 본질적인 뜻과 말씀을 왜곡했을 때 그들은 진리의 가장 커다란 대적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마치 우유와 같은 고영양 식품일수록 그것이 부패할 때 가장 끔찍한 독극물로 변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진리가 변질될 때 그것이 지독한 악취를 풍기는 역겨운 사회악이 되는 것을 우리는 오늘날도 뉴스를 통하여 쓰라린 가슴으로 여실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우리가 말씀 아래에서 스스로를 낮추지 아니하고 그 위에 군림하려 할 때 그것은 곧 심각한 진리의 변질이며 이것은 곧 복음을 죽이려하는 무모한 시도임을 본문을 통해 엄중히 경고하고 계십니다.
이처럼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과 진리를 없애려 하는 어리석은 몸부림의 끊임없는 연속이었습니다. 실제로 어리석은 인간은 십자가 위에서 마침내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고 말았다고 자만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결코 죽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의 생명은 기어이 죽음을 이기시고 우리 앞에 더욱 찬란하게 드러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본문 50절과 51절을 통하여 진리를 위해 흘린 모든 피들에 대한 책임을 불의한 세상에 반드시 묻겠다고 분명히 선언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을 죽이려하는 무모한 몸짓을 포기하고 그 분의 말씀 앞에 항복을 선언해야 합니다. 우리가 언제 어디서나 주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참 진리의 주인 되신 그분을 믿고 따르기 때문에 비록 지금은 십자가와 같은 거친 고난이 우리를 삼키려 할 지라도 그분과 함께, 그분과 더불어 부활의 위대한 영광아래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됨을 우리의 모든 것을 다하여 분명히 증거해야만 합니다.
허나 그럼에도 우리가 때때로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들의 잘못된 길을 걸을 때, 예수님께서는 “화가 있을지어다.”라며 동일하게 책망하십니다. 하지만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선포하신 재앙은 우리를 파멸로 몰아넣는 저주가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돌이켜 참 생명을 누리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애원과 탄식의 목소리라는 사실 말입니다. 그 말씀 앞에 겸손히 귀 기울이며 더 이상 죽음과 저주의 길이 아닌 생명과 진리의 길로 돌이켜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복음이 극심하게 왜곡됐던 시대 시대마다 비록 거친 손바닥이지만 주님의 손을 결코 놓지 않았던 믿음의 조상들을 본받아 하나님의 가슴앓이를 멈추게 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어느 날 제가 그 신천지 교회 앞을 지나치다가 그 곳 정문을 지나가기 전에 어느 남녀 한 쌍이 그 곳에서 밖으로 나와서 골목에 주차된 차량 옆에 다가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더니 그 둘은 자동차 와이퍼에 꽂혀 있던 어느 교회 전도지를 뽑았습니다. 그것은 공교롭게도 당시 제가 전도사로 섬겼던 고향교회의 전도지였습니다.
예기치 않게 그 모든 것을 다 지켜보고 급한 약속이 있어서 발걸음을 서둘러 그들을 지나쳐 갔습니다. 그러자 그 중 여자 분이 뒤에서 저를 불러 세웠습니다. 그리고 좀 전에 그들이 행한 모든 것을 제가 다 알고 있는 걸 모른 채 이렇게 말을 걸어왔습니다.
“저, 저희는 OO 교회에서 나왔는데요. 혹시 시간 있으시면 잠깐 얘기 좀 하실 수 있으세요?”
그러면서 제게 이러저러한 질문들을 꺼내려 하였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저는 살며시 웃으며 이렇게 말 하였습니다.
“저, 저는 그 교회 전도사인데요.”
그러자 그들은 상당히 당황스러워 하며 말을 머뭇거린 후 이내 다른 곳으로 바삐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여기서 한 번 생각해볼 부분이 있습니다. 그 두 사람은 분명히 신천지에서 열심히 교육 받은 데로 아주 많은 말들을 유창하게 풀어놓을 준비를 잔뜩 하였을 겁니다. 하지만 그들이 이처럼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제 앞에서 황급히 사라진 이유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가짜 임에도 불구하고 진짜를 속이려 하였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일을 겪으면서 한 가지 분명히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마치 어둠은 빛과 대립할 수 없고 힘없이 물러나듯 아무리 그럴싸하게 진리로 위장한다 할지라도 거짓은 결코 진리와 마주하지 못하고 그 앞에서 그저 침묵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말씀에는 이처럼 참과 거짓의 명확한 구분과 대치가 매우 극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진리 이신 예수님, 그리고 말씀을 왜곡하여 이용하는 거짓 율법교사들 입니다.
본문 말씀은 누가복음 11장 37절부터 시작된 이야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는 어느 바리새인의 초청으로 점심을 함께 드셨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손을 씻지 않은 것을 보고 그 바리새인이 무척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유대인들은 구약의 율법들을 지키기 위해서 여러 가지 하위 조항들을 만들어 열심히 지키고 있었는데 식사 전에 손을 씻는 것 역시 그것들 중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즉 손을 씻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있어 단순히 청결 문제를 넘어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함을 지키는 중요한 신앙 행위였습니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에게 메시아로 추앙받고 있는, 그래서 자신의 집으로 모셔 식사를 하고 있는 예수님께서 이처럼 사소한 율법도 지키지 않는 모습을 보며 그 바리새인은 그만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의 생각으로는 율법을 지키지 않는 예수님을 경건한 유대인으로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그의 생각을 아시고 몹시 분노하시면서 그를 비롯한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화 있을진저”라고 단호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닥칠 세 가지 화, 즉 재앙들을 선언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바로 앞에 벌어진 사건이었습니다. 그러자 이 때 그 자리에 함께 했던 어느 율법교사 한 사람이 투덜거리며 예수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45절 제가 읽겠습니다.
45 한 율법교사가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까지 모욕하심이니이다
율법교사는 앞서 예수님께서 열거한 바리새인들을 향한 ‘화’들이 자신들에게도 동일하게 해당되는 것임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자존심을 내세우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당대 이스라엘 사회의 최고 지성인으로서 율법을 읽고 그것을 해석하여 유대인들의 삶을 지도하는 굉장한 권위를 가진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신들과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며 같은 신학을 공유하는 바리새인들의 경건 생활을, 그들이 보기에 불량한 신앙을 가진 예수님께서 감히 평가절하 하는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진정한 말씀의 종들이며 오직 자기들의 신념만이 참 진리라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화’의 선포를 이제 바리새인에게서 율법 교사를 향해 돌려 퍼붓기 시작하십니다. 46절, 52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46 이르시되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
52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교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서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
이 두 절의 말씀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들은 너희 자신이 진짜라고 믿고 있지만 실은 너희는 철저히 거짓이고 가짜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그들을 향해 위험을 무릅쓰고 주저 없이 거짓 예언자라고 분명히 단언하셨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며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자신들의 욕망을 위해 끊임없이 제멋대로 말씀을 끌어당기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제국의 압제라는 외부적 위기 속에서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철저히 뭉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들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이들이 바로 율법 교사들입니다. 성전이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한다면 그러한 하나님의 뜻을 가장 명확히 드러내주는 것이 바로 그들의 손에 쥐어진 구약 율법인 까닭입니다.
율법 교사들은 그러한 구약에 있어 단연 최고의 전문가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그럴듯한 명분 아래 동족을 억압하며 그릇된 이득을 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누구도 감히 말씀에 대한 그들의 권위에 저항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진리는 다른 누구도 아닌, 주님의 말씀을 가장 잘 안다고 자부하는 이들에 의해서 철저히 왜곡되고 거짓으로 전락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스스로를 진정한 말씀의 선포자로 자처하는 이들이 오히려 거짓 예언자로 변질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와 같은 복음 왜곡의 끔찍한 현실을 매섭게 꾸짖으시며 분노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역사를 더듬어 올라 그들 조상들의 옛 이야기를 하십니다. 창세 이후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마음을 품고 당신의 말씀을 바르게 증거 할 예언자들을 끊임없이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예언자들은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거짓 예언자들의 거센 저항에 부딪혀야 했으며 수도 없이 많은 모욕과 핍박을 당했고 심지어 목숨까지 잃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아벨부터 사가랴 까지 이스라엘 역사는 거짓 예언자들에 의해 죽임 당한 참 예언자들의 피로 얼룩져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당신 앞에 있는 율법 교사들을 향하여 ‘너희들도 너희 조상들과 다름없이 참 예언자들의 피에 굶주려 하는 거짓 예언자’라고 거침없이 책망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거짓의 또 다른 특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거짓은 진리와 마주할 때 죽이려 한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거짓은 결코 진리와 공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거짓이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진리를 없애는 것임을 거짓은 본능적으로 자각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을 신구약 성경과 교회의 역사는 너무도 생생하게 우리에게 증언합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주님은 참 예언자를 넘어 진리 그 자체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 속 율법 교사들과 같은 거짓 예언자들은 주님의 참된 말씀과 마주 하며 분노에 차올랐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들은 마침내 힘을 합하여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예수님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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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권력자들의 이와 같은 “십자가 처형”은 역사 속에서 계속 반복되어 왔습니다. 그 한 예를 여러분께 소개해 드리고 싶습니다. 바로 엘살바도르의 “로메로 신부”의 이야기 입니다.
중남미에 위치한 엘살바도르는 "구원자 하느님"이라는 나라 이름의 걸맞게 스페인 식민지 시절부터 전통적인 가톨릭 국가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곳 교회는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를 이루기 보다는 부자와 군대의 편에 서서 절대 다수의 민중들을 극심하게 착취하는데 동조하였습니다. 그래서 매우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신앙을 가진 로메로 신부 1977년 엘살바도르의 수도 산살바도르의 대주교로 선임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대주교가 되고 불과 2주 뒤에 절친한 친구인 그란데 신부가 암살을 당했습니다. 그가 가난한 이들의 편에 서서 부패한 기득권과 맞서 싸웠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 로메로 신부는 그전과 전혀 다른 삶의 길을 걸었습니다. 군대에 의해 억울하게 죽임당한 사람들의 이름을 미사 때 외치고 "실종자 어머니 모임"을 만들고 "엘살바도르 시민 인권 위원회"를 조직하여 민중을 억압한 폭력 사건들을 기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당연히도 그를 지지했던 기득권층들이 집요하게 그에게 협박과 회유를 했습니다. 하지만 로메로 신부가 미국에게 엘살바도르의 군대에 무기를 지원하지 말라고 요청한 일이 드러나자 그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로메로 신부는 1980년 3월 24일 병원 성당에서 말기암 환자들을 위한 미사를 집전하다가 암살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앞서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며 이런 강론을 남긴 적이 있습니다.
“그들이 나를 죽이는 데 성공한다면, 당신은 내가 그들을 용서하고 축복하며 죽었다고 신자들에게 전해도 좋습니다. 그래서 저들이 시간을 낭비했다는 확신을 갖기만을 바랍니다. 한 주교는 죽지만 하느님의 교회, 즉 민중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이 마지막 문장을 오늘 말씀과 관련하여 이렇게 바꾸고 싶습니다.
“한 예언자는 죽지만,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셨지만, 하나님의 진리와 복음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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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권력자들의 이와 같은 “십자가 처형”은 역사 속에서 계속 반복되어 왔습니다. 그 중에서 한 순교자의 이야기를 염창선 박사님의 글을 토대로 여러분께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그는 바로 사도요한의 제자인 폴리캅입니다.
로마 안토니우스 피우스 황제 시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칭송받았던 화려한 항구도시 서머나에는 10여 일간 기독교인들에 대한 처참한 박해가 있었습니다. 당시 로마 시민들은 기독교인들을 황제를 숭배하지 않는 ‘무신론자’로 간주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일부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것이 신성 모독 행위라고 분노하며 기독교인들에 대한 학살에 동조하였습니다.
따라서 군중들은 매일같이 원형 경기장에 빼곡히 모여 굶주린 맹수들에게 잡아먹히는 성도들을 향해 “무신론자에게 죽음을, 무신론자에게 죽음을!”라고 외치며 열광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서머나 교회의 목회자인 폴리캅이 체포되어 이제 화형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약 70년경에 태어나서 사도요한에게 복음을 배우고 그에 의해 서머나 교회에 임명된 당대 최고의 신앙지도자로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런 그에게 총독은 이제 나이를 생각해서,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로마황제에게 경배하여 목숨을 건지라고 설득했습니다. 그러자 폴리캅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내가 86년 동안 그분을 섬겨왔지만 그분은 내게 절대로 해를 입히신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나의 왕이요 나의 구주이신 그분을 욕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화형대 앞에 서서 하늘을 우러러 보며 다음과 같은 기도를 드린 후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오, 하나님, 우리에게 당신을 알려준 사랑받으시고 찬양받으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시여! 오, 천사들의 하나님, 권세와 창조의 하나님, 당신 앞에서 살아가는 모든 의인들의 하나님, 당신을 찬양하나이다. 오늘 이 순간에 나를 귀하게 여기셔서 수많은 순교자들 중에서 영혼과 육체가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하도록 그리스도의 잔에 참여하오니, 오늘 수많은 순교자들 중에서 당신 앞에 기름지고 살진 번제가 되게 하옵소서.
거짓이 없으시고 참되신 하나님이 전에 예언하신 대로 성취하셨고, 오늘은 그것을 준비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 영원하신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모든 것에 찬양과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성령 안에서 아들과 함께 당신에게 영광이 지금부터 영원까지 함께하시옵소서. 아멘!”
이때가 서기 155년 경, 사순절 어간인 2월 23일이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순교는 당시 수많은 이들에게 충격과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서머나 교회 교인들은 그의 신앙과 삶을 후세에 기리고자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를 비롯한 순교자들의 이야기는 고대 교회에서 사순절 성찬 때마다 낭독되어서 복음을 따르며 전하는 삶은 곧 죽음의 위협과 직면한다는 사실을 신자들에게 일깨우며 각자의 믿음을 돌아보는 전통을 남겨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와 같은 명확한 진리 앞에 스스로를 향해 정직히 질문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말씀 앞에 감격과 애통함으로 우리 자신의 그릇된 욕망을 죽이고 있습니까? 아니면 혹시 불쾌함과 노여움으로 진리를 죽이려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제가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 대부분의 남학생들이 장난스럽게 하는 행동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학교에서 신는 유명 신발 브랜드의 로고를 그려 넣는 것입니다. 심지어 흰 고무신에다 나이키 상표를 그려 넣고 다니는 대학생들을 본 기억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슬리퍼 혹은 고무신에 제 아무리 그럴듯하게 유명 상표를 그려 넣었다 한들 그것을 가리켜 ‘가짜’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그저 장난스럽게 만든 ‘다른’ 신발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만약에 어떤 누군가가 고의적으로 자신의 이득을 취하기 위해 정교하게 나이키 운동화 모양으로 흉내 내어 신발을 만든다면 그 신발은 ‘다른’ 나이키 운동화가 아니라 ‘가짜’ 나이키 운동화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만약에 어떤 누군가가 성경 구절을 인용 하고 기독교인들의 겉모습을 흉내 낸다 할지라도 누가 봐도 교회와 전혀 무관한 삶을 산다면 그는 그저 ‘다른’ 종교인에 불과합니다. 허나 아무리 열심히 교회에 출석하고 거룩한 모습을 보인다 할지라도 그 모든 것이 실은 자신의 그릇된 욕망을 이루기 위함이고 그 중심에 하나님이 없다면 그는 변질된 가짜 성도 지나지 않습니다.
창세 이래로 주님의 이름을 가장 심하게 먹칠한 이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가장 잘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 그 누구보다 신앙 전통을 제일 열심히 지킨다고 자신했던 사람들이 정작 하나님의 가장 본질적인 뜻과 말씀을 왜곡했을 때 그들은 진리의 가장 커다란 대적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마치 우유와 같은 고영양 식품일수록 그것이 부패할 때 가장 끔찍한 독극물로 변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진리가 변질될 때 그것이 지독한 악취를 풍기는 역겨운 사회악이 되는 것을 우리는 오늘날도 뉴스를 통하여 쓰라린 가슴으로 여실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우리가 말씀 아래에서 스스로를 낮추지 아니하고 그 위에 군림하려 할 때 그것은 곧 심각한 진리의 변질이며 이것은 곧 복음을 죽이려하는 무모한 시도임을 본문을 통해 엄중히 경고하고 계십니다.
이처럼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과 진리를 없애려 하는 어리석은 몸부림의 끊임없는 연속이었습니다. 실제로 어리석은 인간은 십자가 위에서 마침내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고 말았다고 자만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결코 죽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의 생명은 기어이 죽음을 이기시고 우리 앞에 더욱 찬란하게 드러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본문 50절과 51절을 통하여 진리를 위해 흘린 모든 피들에 대한 책임을 불의한 세상에 반드시 묻겠다고 분명히 선언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을 죽이려하는 무모한 몸짓을 포기하고 그 분의 말씀 앞에 항복을 선언해야 합니다. 우리가 언제 어디서나 주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참 진리의 주인 되신 그분을 믿고 따르기 때문에 비록 지금은 십자가와 같은 거친 고난이 우리를 삼키려 할 지라도 그분과 함께, 그분과 더불어 부활의 위대한 영광아래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됨을 우리의 모든 것을 다하여 분명히 증거해야만 합니다.
허나 그럼에도 우리가 때때로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들의 잘못된 길을 걸을 때, 예수님께서는 “화가 있을지어다.”라며 동일하게 책망하십니다. 하지만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선포하신 재앙은 우리를 파멸로 몰아넣는 저주가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돌이켜 참 생명을 누리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애원과 탄식의 목소리라는 사실 말입니다. 그 말씀 앞에 겸손히 귀 기울이며 더 이상 죽음과 저주의 길이 아닌 생명과 진리의 길로 돌이켜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복음이 극심하게 왜곡됐던 시대 시대마다 비록 거친 손바닥이지만 주님의 손을 결코 놓지 않았던 믿음의 조상들을 본받아 하나님의 가슴앓이를 멈추게 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설교 후 기도
오늘도 이 거짓된 세대를 향해 “화 있을지어다.”라고 외치시는 하나님. 이 시간 그 말씀에 담긴 주님의 눈물과 탄식에 더욱 귀 기울이기 원합니다. 그리하여 복음의 말씀을 왜곡시키는 어리석은 길에서 돌이켜 진리를 바르게 믿고 따르는 참된 제자로 우리 모두를 붙잡아 주시옵소서.
거짓에 맞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오늘도 이 거짓된 세대를 향해 “화 있을지어다.”라고 외치시는 하나님. 이 시간 그 말씀에 담긴 주님의 눈물과 탄식에 더욱 귀 기울이기 원합니다. 그리하여 복음의 말씀을 왜곡시키는 어리석은 길에서 돌이켜 진리를 바르게 믿고 따르는 참된 제자로 우리 모두를 붙잡아 주시옵소서.
거짓에 맞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참고자료>
http://www.catholic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60
http://www.ddanzi.com/index.php?mid=ddanziNews&search_target=tag&search_keyword=%EC%B9%B4%ED%86%A8%EB%A6%AD&document_srl=897907
http://www.kmc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19789
봉헌기도
참 진리의 하나님
거짓에 맞서 복음의 길을 따르게 하신 은혜에 감사와 찬양을 드리며 삶으로 구별한 예물을 드립니다. 기쁘게 받으시어 진실을 알리기 위해 힘써 노력하는 이들을 위해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좀처럼 그치지 않는 폭염 가운데 몸과 마음 항상 건강히 지켜 주시옵소서. 어디로 가야할 지 무얼 해야 할지 모르는 혼란 가운데 진리의 불빛을 찾아 가게 하시고 곁에 있는 이들을 포용하며 품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보냄의 말씀
목사: 사랑하는 여러분 평안히 돌아가십시오. 복음의 말씀을 들었으니 진리 앞에 스스로를 낮추며 살아가십시오. 거짓에 맞서 죽음을 이기신 주님의 생명이 우리와 늘 함께 합니다.
예담: 아멘, 말씀 앞에 엎드리기 보다는 복음을 거부하며 왜곡하려 하였던 죄를 회개합니다. 예수님께서 거짓 스승들을 향해 외치신 재앙의 의미를 가슴깊이 새기며 항상 진리 앞에 깨어 살아가겠습니다. 주님! 지혜의 영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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