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2월 7일 화요일

누가복음 15장 1-3, 25-32절 “마땅한 기쁨”

사순절 네 번째 주일, 2016년 3월 6일, 부산진교회 청년 설교, 정대진 목사 
누가복음 15장 1-3, 25-32절 “마땅한 기쁨”



1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3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본문 말씀이 포함된 11-32절에 담긴 이야기는 교회를 조금이라도 다녀보신 분들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내용입니다. 죄 많고 방탕한 아들을 끝까지 기다리고 한 없이 넓은 품으로 맞아들이는 아버지의 사랑이야기가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의 사랑을 매우 극적이고 감동적으로 그려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이 이야기는 부흥사들이 극적인 설교의 소재로 자주 사용합니다. 또한 서구 유럽의 기독교 문화에 큰 영감을 주어 네덜란드의 거장 렘브란트의 유명한 그림은 물론이고 여러 예술 작품에 “탕자의 비유” 혹은 “탕자의 이야기”로서 자주 인용되었습니다. 이렇듯 자격 없는 아들을 끝까지 사랑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본문 말씀이 담고 있는 매우 중요한 주제임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이 이야기의 핵심 내용이며 또한 흔히 “탕자의 비유”로 불리는 소제목이 적절한지에 대한 여부는 깊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누가복음 15장의 제일 앞에 있는 석 절의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1-3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1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3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이 석절 말씀에는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의 중심성격과 그로 말미암은 긴장이 확연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1절은 분명히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그 곁에 가까이 모여 들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것은 누가만의 독특한 기록이 아니라 사복음서 모두 증언하는 내용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가르침과 이적을 동시대 사람들이 우러러보고 선망하는 이들에 집중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눈길과 손길을 차별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향하는 것을 넘어 ‘세리와 죄인들’로 대표되는 그 사회의 가장 미움과 멸시의 대상인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하였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동시대 지성인들의 일반적인 사상에 편승해서 무난한 수준의 가르침을 전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당신의 놀랍고도 신비한 이적을 예루살렘의 부유층만을 위해 사용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십자가를 지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그 시대의 기득권과 더불어 상당한 권력과 재물을 누리며 호화로운 삶을 살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형”이라는 극형으로 처참한 죽음을 겪으신 까닭은 그와 정반대로 그 사회의 주류 시대정신을 거스르는 파격적인 가르침, 즉 약자에 대한 존중과 부패한 기득권층의 몰락을 선언하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오랜 시간 누적된 전통적인 유대교 신앙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드넓은 사랑과 은혜를 외쳤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주님의 곁에는 유대교 율법과 정치권력의 온기로부터 벗어난 소외된 이들이 가득 몰려들었고, 반대로 전통과 권력의 수호자들이 그런 주님과 주님을 따르는 이들을 분노의 눈길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한 이들이 대표적으로 1-2절에서 각각 “세리와 죄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 앞에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지금껏 어떤 이들을 가까이 했고, 또 친해지려 하고 있는 지를 돌이켜 봐야 합니다. 때때로 우리가 소위 성공한 이들의 도움을 받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고 그 자체를 결코 비난할 일도 아닙니다. 그러나 만약 힘 있고 부유한 이들하고만 어울리려 한다면, 그래서 예수님께서 더욱 가까이 하신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함부로 무시하고 그들을 게으르다고 비난한다면 그것은 결코 건강한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을 빙자해서 성공을 탐닉하는 부패한 욕망에 지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어울려 친하게 지내시는 것을 두고 수군거리는 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보시며, 그들에 대한 비유들을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잃어버림”을 주제로 한 세 가지 비유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는 잃어버린 양, 다른 하나는 잃어버린 동전에 대한 이야기이고 마지막으로 그 비유들의 주제를 더욱 심화시킨 것이 바로 오늘 본문이 포함된 “잃어버린 아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 비유를 듣는 1차적인 청자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라는 사실을 명심한다면 이 비유를 어떻게 읽는 것이 바람직할까요? 아버지 품에 다시금 안긴 방탕한 둘째 아들이 아닌 그러한 아버지와 아들을 불만에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는 큰 아들을 중심으로 이 이야기를 이해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본문에 등장하는 큰 아들의 비틀리고 왜곡된 마음가짐을 통해 예수님을 정죄하고 사형시킨 이들의 실체를 거듭 확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 안의 그와 똑같은 잘못된 신앙을 바로 잡아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본문 속 큰 아들의 가장 큰 잘못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너무도 간단하고도 분명합니다. 바로 아버지께서 베푸신 기쁨과 생명의 잔치에 참여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왜 아버지의 잔치에 함께 하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그가 보기에 잔치의 이유와 주인공의 자격이 전혀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생각하는, 마땅히 잔치를 제공받아야하는 주인공의 자격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아버지의 명령을 얼마나 복종하는 지에 대한 여부 입니다. 다함께 29-30절 말씀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29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이 두 구절을 통해 자기 자신과 동생에 대한 큰 아들의 이해가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 기준은 바로 “아버지의 명령”입니다. 먼저 29절에 보면 그가 자신을 달래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토로합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반면 30절에 보면 동생에 대해서는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버린 이 아들’ 이라고 말합니다. 

즉, “아버지의 명령”을 그 누구보다도 성실히 수행한 자신에게는 그에 걸맞은 성대한 잔치가 주어지지 않았지만 그와 정반대로 “아버지의 명령”은 커녕 보편적인 도덕도 지키지 않은 망나니 같은 동생에게는 풍성한 잔치가 베풀어지는 것에 그는 분노하였습니다. 

여러분은 과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본문 속 큰 아들의, 이와 같은 불만을 두고 부당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를 선뜻 틀렸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당연하게도 부모님의 말씀을 잘 따르는 자녀가 그렇지 않은 자녀보다 훨씬 더 바람직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 속에 등장한 큰 아들의 분노가 상당부분 이해가 가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일반적인 생각에는 중대한 오류가 숨겨져 있습니다. 바로 자녀에 대한 부모의 마음을 제3자의 눈으로 판단했다는 점입니다. 부모님의 말을 잘 안 듣는 불효자를 두고 타인이 비난할 수는 있어도 그런 자녀를 향한 부모의 사랑은 함부로 평가할 수 없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향해 어떠한 “명령” 혹은 “훈계”를 하는 까닭은 그것을 지키는지 그렇지 않은 지를 두고 아들의 효심을 판단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통해 아들, 딸을 바로잡고 또 건강하고 참된 삶을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부모는 당신의 자녀들이 ‘말을 잘 들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말씀을 남긴다.’는 이 전후 관계를 분명히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녀를 향해 부모가 정말 바라는 것은 전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는 완전무결한 모범생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실수와 잘못으로 가득한 부족한 모습 그대로 당신에게 나아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두 아들의 극명한 차이가 드러납니다. 둘째 아들은, 누가 뭐래도 아버지에게 극악한 불효를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는 아버지가 베푸는 성대한 잔치의 주인공이 될 자격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다시금 아버지 품에 돌아와 완전히 안겼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러한 둘 째 아들의 아버지에 대한 “돌아옴”은 첫째 아들의 숨겨진 위선과 그릇된 욕망을 폭로합니다. 비록 그는 그동안 아버지와 함께 오랫동안 생활하였을지언정 거기에 진정성이 없었음이 여실히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평소 자신의 속내를 제 아무리 그럴듯하게 속여 왔던 사람들일지라도 그에게 중대한 이해관계가 얽힌 순간 본심이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오늘 본문 속 큰 아들의 모습이 그러합니다. 29절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29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여기에 보면 아버지에 대한 큰 아들의 “대답”이 기록돼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아버지여!”라는 지극히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호칭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은 그의 분노와 섭섭함이 아버지를 향한 호칭도 지워버릴 만큼 그를 압도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여기서 “섬겨”로 번역된 헬라어 <두울뤼오>는 “노예”를 뜻하는 <두울로스>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노예처럼 일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큰 아들의 본심은 과연 무엇일까요? 이러한 단어 선택을 통해, 그가 지금껏 보여준 충성과 복종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존경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 그저 무거운 의무감의 결과였음을 알려줍니다. 또한 그 답답한 책임감 때문에 그간 자기 자신을 노예와 같다고 남몰래 불평불만에 가득했음을 보여줍니다. 

이 역시 그동안 그의 판단과 행동의 핵심 근거가 “명령”임을 보여줍니다. 그는 아버지가 자신에게 맡긴 여러 집안일들과 책임들 속에 담긴 그를 향한 신뢰와 사랑을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마치 노예를 부리는 주인의 명령처럼 여겼습니다. 그렇기에 큰 아들은 돌아온 자신의 동생을 반겨 맞지 않고, 마치 자신과 아무 상관없다는 듯, 그를 “이 아들”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처지를 두고 격한 분노를 표출할 뿐,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 함께 잔치를 즐기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 비유의 목적과 의도가 다름 아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의 모순과 오류를 폭로하는데 있다는 사실을 거듭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는 이유로 경멸에 가득한 눈으로 쏘아붙이는 그들의 위선적 행태가 이 이야기 속 큰 아들의 모습과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 대해 간략히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이들은 소속과 성향이 매우 다른, 심지어 서로에 대해 적대적인 사람들입니다. 간략히 정리하자면 서기관들은 오늘날로 따지면 신학자로서 성경을 연구하는 기존 유대교 신앙 주류에 속하는 사람들입니다. 반면 바리새인들은 로마 식민지배라는 민족적 위기와 절망 속에서 급진 개혁운동을 벌이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한 마디로 비주류로서 율법에 대한 순결주의와 철두철미한 복종을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두 부류의 사람들 사이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열정입니다. 비록 성경을 대하고 이해하는 방식은 서로 전혀 다르지만 율법의 권위를 지극히 높이며 그것을 모든 삶과 생각의 절대적인 기준으로 대하는 것은 동일했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예수라는 공통의 적 앞에 함께 손을 잡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문자 그대로 지키는 것에 전혀 관심 없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당시 사람들이 듣기에 충격적으로 성경을 재해석하였을 뿐만 아니라 ‘세리와 죄인들’을 비롯하여 율법을 어기는 더러운 사람들과 주저 없이 친구가 되셨습니다. 

따라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마치 비유 속 큰 아들이 죄 많고 방탕한 작은 아들을 위해 잔치를 여는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화를 냈듯이 그들 눈에 한 없이 추악하고 더러운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매일같이 먹고 마시는 주님의 모습을 도무지 납득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우리가 세리와 죄인들을 향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이러한 곱지 않는 시선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닙니다. 어찌 보면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그들의 매서운 눈길에는 오만과 폭력이 담겨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가혹한 식민 지배체제 속에서 근근이 하루하루를 버텨나가는 대부분의 서민들에게 있어 율법에 대한 완벽한 준수는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금과옥조로 여기는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 간단치가 않습니다. 바벨론 포로기를 거치면서 모세 율법에 세부적인 시행규칙까지 가득 더해져 너무도 까다로워 졌기 때문입니다. 복음서 곳곳에 기록된, ‘식사 전 손 씻는 문제’와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문제’를 두고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이 첨예한 긴장을 빗은 장면들은 바로 여기서 기인합니다. 

그러나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안정된 수입이 없고 규칙적으로 회당에 참석해 말씀을 전해들을 여유가 없는 이들이 그 복잡한 규칙들을 물이 부족한 사막지대에서 제대로 지킬 수 있었겠습니까? 가혹한 노동환경 속에서 피치 못하게 율법을 어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그런 그들을 두고 유대교 지도자들은 따뜻한 위로와 격려는커녕 율법 준수여부만을 두고 정죄하고 비난하기 일쑤였습니다. 

그리하여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 의해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들은 점점 더 고립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누가복음에서 노동여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율법을 지킬 수 없고 극빈민층을 이루었던 목동들에게 가장 먼저 성탄의 기쁜 소식이 들려졌다고 기록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토록 율법의 전문가를 자처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가장 중대한 잘못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들은 비록 율법의 세부적인 내용은 지나칠 정도로 잘 알고 그것을 강박에 가깝게 지켰지만 정작 말씀의 핵심 내용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무관심하고 외면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이러한 모순을 비유를 통해 신랄하게 꾸짖고 계십니다. 

비유 속 큰 아들은 비록 아버지의 말씀은 열심히 노예처럼 따르고 지켰지만 정작 아버지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율법을 열성적으로 지켰지만 오히려 그 말씀을 전해주신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에는 무관심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 결과 아버지의 마땅한 기쁨에 함께 하지 않는 그 어리석음과 오만함을 주님께서는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러한 비유 속 큰 아들과 본문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이켜 보며 회개해야 합니다. 혹시 우리는 기독교 신앙을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과 정의가 아닌 화석처럼 굳은 몇 가지 전통과 교리로 제한하려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것을 두고 다른 사람들을 함부로 비난하고 그들의 신앙을 무시하며 저급한 우월감에 빠져 있지 않습니까?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는 ‘술·담배 금지’와 ‘새벽기도’등 여러 가지 “아버지의 명령들”이 존재합니다. 물론 우리는 여러 신앙전통들을 함부로 무시하지 말고 소중히 간직해야 합니다. 이 모두가 본래 선한 의도와 목적아래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누군가 술, 담배를 하는 상황에 대한 이해와 고려는 전혀 없이 단지 그 행위 자체만으로 쉽게 비난 한다면, 그리고 새벽에 일어날 수 없는 고단한 삶에 대한 배려 없이 그의 게으름을 탓하며 자신의 꾸준한 새벽기도회 참석에 우쭐거린다면 우리는 본문 속 예수님의 준엄한 꾸짖음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목회자의 한 사람으로서 저는 당연히 여러분이 좀 더 많이 성경을 읽고 좀 더 열심히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유치하게 “얼마나 많이” 성경 읽고 기도했는지를 두고 여러분을 평가할 마음을 조금도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내밀한 관계를 겉으로 보이는 경건행위의 양으로 평가하고 그것을 가지고 자학할 때, 그것은 곧 ‘노예 종교’로의 전락과 변질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결코 스토킹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의 여자 친구 혹은 남자 친구와 매일 꾸준히 통화를 하고 매주 꾸준히 만나 데이트를 하고 선물을 주고받는 것은 관계를 건강하게 발전시키는 매우 중요한 성실함과 성의입니다. 그런데 만약 상대가 진정성 없이 강박적으로 전화를 걸고 만나는 것 자체에만 신경 쓴다면 어떻게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원치 않는데 집 앞에서 하루 종일 기다린다면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그것은 스토킹이지 결코 바람직한 관계가 아닙니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진실한 마음으로 꾸준하게 경건생활을 이어가는 것은 너무도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과도한 의무감에 스스로를 속이고 남에게 드러내기 위해 겉으로 보이는 신앙생활에만 열을 올리는 것은 절대로 옳지 않습니다. 그 대신 하나님의 대한 낯선 개념들에 마음을 열고 성경 문자를 넘어서는 하나님 나라의 도도한 물길에 전 존재를 내맡기실 바랍니다. 그렇게 우리를 늘 기다리시는 주님의 넓고 깊은 눈길을 바라보시길 원합니다.

그 때, 우리는 제 아무리 이 악물며 철저히 노예처럼 말씀에 복종한다하더라도 여전히 연약하고 부족한 우리를 너그러이 따뜻하게 품어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마음 깊이 깨닫고 그 앞에 무릎 꿇을 수 있습니다. 또한 그제야 비로소 아버지 하나님의 마땅한 기쁨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베푸시는 구원과 생명의 잔치에 함께하여 모든 사람들을 차별 없이 초청하는 은혜의 길을 따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오늘 우리를 향해 들려주시는 예수님의 이야기 속 큰 아들의 어리석음을 통해 스스로를 돌이켜 보시기 바랍니다. 이를 통해, 막연한 의무감과 딱딱하게 굳은 종교적 전통에 얽매이지 말고 늘 모든 죄인들을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참 사랑에 더욱 눈 뜨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넓고 깊은 사랑 안에 안기어 주님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 이해할 수 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다독이시는 하나님 
비유 속 큰 아들의 어리석음과 오만이 곧 우리의 모습임을 회개합니다. 주님을 따름이 낡은 문장에 얽매인 일방적인 복종이 아닌 바르고 건강한 “관계”임을 명심하며 남루한 모습으로 먼 길 걸어 돌아오는 이들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품고 더불어 기뻐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봉헌기도: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시는 아버지 하나님
우리의 그 어떤 실수와 잘못에도 항상 묵묵히 두 팔을 맞아 품어주시는 그 놀라운 사랑에 감사와 찬양을 드리며 한 주간 구별한 삶의 예물을 드립니다. 기쁘게 받으시어, 주님께 돌아오는 이 시대의 세리와 죄인들을 위해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우리 청년들의 그늘진 마음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저마다 신음하는 상실감을 따뜻이 품어주시옵소서. 병든 몸을 회복시켜주시고 정리되지 못한 내면의 질서를 바로 잡아 주시옵소서. 가족 안에 더욱 평화 내려 주시고 기도하며 계획하는 모든 진로를 선하게 이끌어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보냄의 말씀
목사: 사랑하는 여러분, 평안히 돌아가십시오. 복음의 말씀을 들었으니 하나님의 따뜻한 품으로 나아가 마땅한 즐거움과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십시오. 우리 주님께서 항상 우리를 바라보시며 기다려 주십니다.

회중: 아멘.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향해 베푸시는 잔치에 함께 하지 못하고 어리석은 전통과 편협한 믿음 안에 갇혀 있었던 어리석음을 회개합니다. 모든 사람들을 차별 없이 품으시는 예수님의 뜻을 전하며 살아가겠습니다. 주님! 그 드넓은 마음 안에서 항상 자유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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