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2월 8일 수요일

디모데전서 6장 11-16절 "너 하나님의 사람아"

오순절 후 열 아홉 번째 주일, 2016년 9월 25일, 부산진교회 청년예배설교, 정대진 목사
디모데전서 6장 11-16절 "너 하나님의 사람아"

11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 13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언을 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내가 너를 명하노니 1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15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16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


설교를 시작 하며 시 한 편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 디트리히 본 회퍼

나는 누구인가?
남들은 종종 내게 말하기를
감방에서 나오는 나의 모습이
어찌나 침착하고 명랑하고 확고한지
마치 성에서 나오는 영주 같다는데


나는 누구인가?
남들은 종종 내게 말하기를
간수들과 대화하는 내 모습이
어찌나 자유롭고 사근사근하고 밝은지
마치 내가 명령하는 것 같다는데
 
나는 누구인가?
남들은 종종 내게 말하기를
불행한 나날을 견디는 내 모습이
어찌나 한결같고 벙글거리고 당당한지
늘 승리하는 사람 같다는데
 
남들이 말하는 내가 참 나인가?
나 스스로 아는 내가 참 나인가?
새장에 갇힌 새처럼 불안하고 그립고 병약한 나
목 졸린 사람처럼 숨을 쉬려고 버둥거리는 나

빛깔과 꽃, 새소리에 주리고
따스한 말과 인정에 목말라하는 나
방자함과 사소한 모욕에도 치를 떠는 나
좋은 일을 학수고대하며 서성거리는 나
멀리 있는 벗의 신변을 무력하게 걱정하는 나
기도에도, 생각에도, 일에도 지쳐 멍한 나
풀이 죽어 작별을 준비하는 나인데
 
나는 누구인가?
이것이 나인가? 저것이 나인가?
둘 다인가?
사람들 앞에서 허세를 부리고,
자신 앞에선 천박하게 우는소리 잘하는 겁쟁이인가?
내 속에 남아있는 것은
이미 거둔 승리 앞에서 꽁무니를 빼는 패잔병 같은가?
 
나는 누구인가?
으스스한 물음이 나를 조롱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당신은 아시오니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오, 하나님!


이 시는 나치 정권에 저항하며 히틀러 암살 작전에 참가한 독일의 디트리히 본 회퍼 목사님이 사형 당하기 불과 몇 달 전 감옥에서 쓴 시입니다. 그의 숭고한 삶과 겹치며 더욱 깊은 울림을 주는 이 시는 우리의 올바른 정체성은 다른 사람이 바라보는 나, 혹은 내가 생각하는 나가 아닌 “하나님의 것”임을 새삼 절절히 깨닫게 해 줍니다.

우리는 평생 “나는 누구인가?” 라는 무거운 질문을 등에 짊어지고 살아갑니다. 인생의 항해를 저마다 “나”라는 이름의 배를 타고 나아가지만 정작 “나”라는, 그 배의 뚜렷한 실체를 잘 모른 채 막막함과 불안함을 가지고 삶을 이어 나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 안 숨거나 나에게 속으며” 살아갈 때가 참 많이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나는 지금 어디로 가는가?”를 묻는 것 못지않게 “내가 누군지?”를 쉬지 않고 질문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입니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을 찾고 항상 소중히 간직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따라서 잊지마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진정한 정체성이 있습니다. 존재의 근원이 주님께 있음을 온전히 믿고 고백하는 것, 그리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임을 항상 명심하는 것. 바로 여기에 나 자신을 올바로 이해하는 가장 본질적인 길이 담겨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아들처럼 아끼고 사랑하는 디모데에게 보내는 첫 번째 편지를 쓰며 그 끝 무렵에 그를 가리켜 “너 하나님의 사람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유념해야할 것은 이러한 호칭을 듣는 대상인 디모데가 주님을 모르는 불신자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그는 바울의 뒤를 이어 에베소 교회를 섬겼던 젊은 목회자였습니다. 따라서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디모데 스스로가 이미 그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바울이 엄숙하게 이를 강조했던 까닭은 이것이 분명 “거듭 들어야할”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항상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너무나 뻔하고 식상하게 들릴지라도 이 진리 안에 담긴 놀라운 은혜를 계속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의 소유가 되도록 자신의 생명을 모두 내던진 예수님의 사랑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지금 처한 상황과 여건과는 전혀 관계없이 하나님의 사람인 내가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존재인지를 거듭거듭 깨달아 아시길 바랍니다.


이를 위해 우리를 소유하신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다시금 깊게 곱씹을 필요가 있습니다. 15-16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15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16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나열하며 짧은 찬양을 드리고 있습니다. 정리해보자면, 그 언젠가 자신의 모습을 완전히 드러내실 하나님은 진정한 왕이시며 찬란한 영광 안에 빛나는 분이십니다. 저는 이 말씀을 더욱 간략히 “오직 하나님만이 하나님이시다.”로 요약하고 싶습니다.

아마 (대부분의 성도님들께서는) 이와 같은 찬양 내용에 별 저항 없이 쉽게 수긍하실 겁니다. 특히 어릴 때부터 교회에서 자란 분들은 더더욱 15-16절에 기록된, 주님에 대한 묘사를 어렵지 않게 동의하실 겁니다. 하지만 여기서 스스로에게 냉정하게 물어야 합니다. 우리가 부담 없이 쉽게 찬양하는 이유는 그만큼 하나님의 존재를 막연하고 모호하게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주님의 드높은 능력과 영광이 지금 당장 나의 실생활과 무관하기 때문에 아무 거리낌 없이 그것을 노래하는 건 아닐까요?

따라서 우리가 본문을, 더 나아가 성경 전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안에 담긴 신앙 고백들이 당시 중동의 패권을 지배한 거대한 제국과의 긴장 안에서 나왔음을 반드시 유념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디모데를 향해 편지 하며 새삼스레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찬양했던 까닭은 그만큼 그 시대에 하나님이 아닌 것들이 하나님을 대신했기 때문입니다.

먼저, 신으로 숭배 받는 로마 황제들은 물론이고 풍요와 성공을 약속하는 다른 이방 신들이 사람들의 마음에서 하나님의 자리를 빼앗았습니다. 더욱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그것들이 유혹하는 돈과 권력이 주님의 자리를 대신 차지 했습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도 차츰차츰 하나님 대신에 욕망을 따르는 이들이 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만이 하나님이시다!”라는 바울의 찬양은 우리의 실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크고 강력한 그 어떤 무엇도, 심지어 무시무시한 정치권력과 많은 돈도 절대로 주님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결연한 다짐과 선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앞서 우리의 정체성이 “하나님의 사람”임을 늘 명심할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이 정체성에 담긴 막중한 소명을 깨달아 아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이기에, 온 우주 가운데 유일하게 찬양 받으실 진정한 왕이자 영광의 주님께 속한 사람들이기에 결코 다른 힘과 권력을 숭배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절대로 “성공과 풍요의 사람”이 아닙니다. “인기와 명예의 사람”도 아닙니다. 온 세상을 구하시려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 십자가의 처절한 실패와 절망을 부활의 생명과 희망으로 바꾸신 하나님. 당신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어 가시는 바로 그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또한 바울은 그와 같은 하나님의 사람인 디모데를 향해 다시 오실 예수님의 이름을 걸고 엄숙한 명령을 내렸습니다. 다함께 11-12절 말씀 읽겠습니다.

11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 

이 두 절의 말씀은 “피하라”와 “취하라”, 두 개의 동사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먼저 “피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때 피해야할 대상인 “이것들”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 본문 바로 앞에 기록된 10절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새번역 성경으로 제가 읽겠습니다.

10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좇다가, 믿음에서 떠나 헤매기도 하고, 많은 고통을 겪기도 한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들이 지켜야할 첫 번째 정체성을 명확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돈을 사랑하는 것을 피하는 것”입니다. 오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저는 여러분이 가난하게 사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가능한 많은 돈을 모으고 여유롭게 사시길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하지만 “돈을 사랑하고 추종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설령 아무리 많은 헌금을 하고 때때로 형식적인 기부를 한다 할지라도 삶의 결정적인 순간마다 하나님보다 돈을 선택한다면 그것은 그 누구보다 돈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필요이상 많은 돈을 움켜쥐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짓밟고 이용하며 심지어 신앙마저도 도구로 사용하려 한다면 그것은 그 무엇보다 돈을 따르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소유에 연연하지 않고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나누는 일에 인색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연약한 우리는 돈을 자기 손에 들고 있으면서도 그 돈에 이끌리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 어렵습니다. 12절에 기록된 바와 같이 그것은 “믿음의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행해야할 두 번째 명령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영생을 취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경에서 “생명”을 뜻하는 헬라어가 단어 여럿 있음을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프쉬케>와 <조에>입니다. 제가 부득이 헬라어를 인용하는 것을 너그럽게 양해 부탁드립니다. (신약성경을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한 내용이기 때문에 꼭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먼저 프쉬케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육체적 생명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한글 성경에서 흔히 “영생”으로 번역되는 <조에>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우리 말 뜻보다는 예수님을 죽음에서 다시 일으키신 “진정한 생명” 혹은 “참 생명”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영생을 취한다.”는 것은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은 진정한 생명을 붙잡고 살아감을 뜻합니다. 더 구체적으로는 우리 안에 살아계신 생명의 영이신 성령님과 함께 호흡하며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이 세상과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을 지켜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로 이것을 위해 우리는 구원을 받고 그리스도인으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주님께서는 단순히 사람들을 교회 안으로 많이 끌어 모으고 기독교라는 종교의 힘을 늘려서 권력을 휘두르게 하려고 우리를 살리지 않으셨습니다. 참된 왕이신 하나님의 다스림을 믿고 그 분의 능력과 영광을 바라보며, 비록 소박하지만 의연한 일상의 헌신을 통해 주님의 나라를 이 땅 가운데 넓혀 가도록 우리를 일으켜 세워주셨습니다.


지난 추석 연휴에 예기치 않게 시간이 많이 생겨서 영화 대부(The godfather) 3부작을 모두 집에서 보았습니다. 그 중 대부3에서 매우 인상적인 장면이 있었습니다. 진솔하고 훌륭한 성품과 신앙을 가진 람베르토 신부가 로마 바티칸에서 이탈리아계 미국 마피아의 보스인 마이클 꼴레오네가 대화를 나누는 중에 작은 분수로 이동했습니다. 그러더니 그 안에 잠겨 있던 돌맹이 하나를 들어 이렇게 말합니다.

“이 돌을 보십시오. 아주 오랜 시간 물속에 있었지만 물이 전혀 그 안에 스며들지 않았습니다.”

Look at this stone. It has been lying in the water for a very long time, but the water has not penetrated it.

이어서 돌을 깨뜨린 후 이렇게 말합니다.

“보십시오. (이 안이) 완전히 말라있습니다. 같은 일이 유럽 사람들에게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수세기 동안 그들은 기독교에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파고들어 그들 안에 호흡하지 않았습니다.”

Look. Perfectly dry. The same thing has happened to men in Europe. For centuries they have been surrounded by Christianity, but Christ has not penetrated. Christ doesn't breathe within them.

영화를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대부”시리즈에서 가톨릭 성례전이 매우 중요한 배경으로 등장합니다. 주인공이 속한 마피아는 적어도 공식적이고 외부적으로는 독실한 기독교 신앙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그들은 살인을 비롯한 온갖 범죄를 서슴지 않고 저질렀습니다. 비록 그들은 기독교에 둘러싸여 살긴 했지만 정작 주님의 생명을 자신들 안에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조금 극단적이긴 예이긴 하지만, 이 영화를 보며 오늘날 한국 그리스도인들 아니 저 자신의 모습을 가슴 아프게 돌이켜 보았습니다. 아주 어릴 때부터 교회에서 뛰놀며 기독교 문화에 젖어 자라 왔고 목사가 되어 온갖 거룩한 척은 다 하지만 주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생명으로 호흡하며 살아가고, 또 그것을 삶으로 전하는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감히 자신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에 대해 많이 아는 사람,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를 열심히 하는 사람이기 보다는 오늘날, 주님께서 찾으시는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시길 간절히 축복합니다. 물론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매순간 힘겨운 결단을 요구하며 때때로 우리를 포기하고 지치게 만듭니다. 

교회 전승에 따르면 디모데는 에베소 사람들이 열정적으로 숭배하는 풍요의 여신, “아르테미스”에게 바치는 제사 도중에 그녀가 헛된 우상에 지나지 않음을 외치다가 결국 사람들이 분노하며 휘두른 곤봉에 맞아 순교했습니다. 여러분에게 겁을 주려고 이 이야기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오늘날, “돈”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우상에 맞서 믿음의 싸움을 이어가는 것이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님을 늘 명심하시길 원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절대로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 선한 싸움에 주님께서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고 끝내 이기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져 우리를 이미 소유하셨습니다. 그렇게 우리를 붙잡으시며 생명 깊숙이 찾아오신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진정한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모두가 되길 간절히 소망하며 축복합니다.


설교 후 기도
능력과 영광의 하나님
오직 주님만이 우리가 섬기고 따를 진정한 왕이심을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그 믿음 가운데 돈을 사랑함을 멀리하고 진정한 생명으로 호흡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를 소유하시려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생명을 기꺼이 내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봉헌기도 
왕이신 하나님
우리를 주님의 사람으로 부르신 은혜를 높이며 한 주간 삶으로 구별한 예물을 드립니다. 기쁘게 받으시어 하나님 나라를 넓히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가는 이들을 위해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예담 청년들을 축복하며 기도합니다. 여러 이유와 환경으로 지친 몸과 마음에 힘을 주시고 헤아릴 수 없는 위로로 함께 하여 주시옵소서. 특별히 앞으로 한 해 동안 임원으로서 예담교회를 섬길 지체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필요한 능력과 지혜를 채워주시고 일 년간 충분한 보람과 감사를 누리고 나누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보냄의 말씀
목사: 사랑하는 여러분, 평안히 돌아가십시오. 복음의 말씀을 들었으니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십시오. 만왕의 왕이신 주님의 빛과 영광이 여러분과 항상 함께 하십니다.

예담: 아멘! 하나님이 아닌 욕망의 다스림에 굴복하였던 죄악을 회개합니다. 주님의 명령을 따라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며 살아가겠습니다. 주님! 참 생명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축도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복을 주시고, 여러분을 지켜주십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얼굴을 여러분을 향해 비춰 주시고,
여러분을 은혜롭게 하십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얼굴을 여러분을 향해 드시어, 
여러분에게 평화 주십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님의 사귐이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 나가는
예담 청년들과 항상 함께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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