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세 번째 주일, 2016년 4월 10일, 부산진교회 청년예배 설교, 정대진 목사
사무엘상 14장 43-52절 "사는 날 동안에"
43 사울이 요나단에게 이르되 네가 행한 것을 내게 말하라 요나단이 말하여 이르되 내가 다만 내 손에 가진 지팡이 끝으로 꿀을 조금 맛보았을 뿐이오나 내가 죽을 수밖에 없나이
다 44 사울이 이르되 요나단아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내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45 백성이 사울에게 말하되 이스라엘에 이 큰 구원을 이룬 요나단이 죽겠나이까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옵나니 그의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할 것은 그가 오늘 하나님과 동역하였음이니이다 하여 백성이 요나단을 구원하여 죽지 않게 하니라 46 사울이 블레셋 사람들 추격하기를 그치고 올라가매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 곳으로 돌아가니라 47 사울이 이스라엘 왕위에 오른 후에 사방에 있는 모든 대적 곧 모압과 암몬 자손과 에돔과 소바의 왕들과 블레셋 사람들을 쳤는데 향하는 곳마다 이겼고 48 용감하게 아말렉 사람들을 치고 이스라엘을 그 약탈하는 자들의 손에서 건졌더라 49 사울의 아들은 요나단과 이스위와 말기수아요 그의 두 딸의 이름은 이러하니 맏딸의 이름은 메랍이요 작은 딸의 이름은 미갈이며 50 사울의 아내의 이름은 아히노암이니 아히마아스의 딸이요 그의 군사령관의 이름은 아브넬이니 사울의 숙부 넬의 아들이며 51 사울의 아버지는 기스요 아브넬의 아버지는 넬이니 아비엘의 아들이었더라 52 사울이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과 큰 싸움이 있었으므로 사울이 힘 센 사람이나 용감한 사람을 보면 그들을 불러모았더라
다 44 사울이 이르되 요나단아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내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45 백성이 사울에게 말하되 이스라엘에 이 큰 구원을 이룬 요나단이 죽겠나이까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옵나니 그의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할 것은 그가 오늘 하나님과 동역하였음이니이다 하여 백성이 요나단을 구원하여 죽지 않게 하니라 46 사울이 블레셋 사람들 추격하기를 그치고 올라가매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 곳으로 돌아가니라 47 사울이 이스라엘 왕위에 오른 후에 사방에 있는 모든 대적 곧 모압과 암몬 자손과 에돔과 소바의 왕들과 블레셋 사람들을 쳤는데 향하는 곳마다 이겼고 48 용감하게 아말렉 사람들을 치고 이스라엘을 그 약탈하는 자들의 손에서 건졌더라 49 사울의 아들은 요나단과 이스위와 말기수아요 그의 두 딸의 이름은 이러하니 맏딸의 이름은 메랍이요 작은 딸의 이름은 미갈이며 50 사울의 아내의 이름은 아히노암이니 아히마아스의 딸이요 그의 군사령관의 이름은 아브넬이니 사울의 숙부 넬의 아들이며 51 사울의 아버지는 기스요 아브넬의 아버지는 넬이니 아비엘의 아들이었더라 52 사울이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과 큰 싸움이 있었으므로 사울이 힘 센 사람이나 용감한 사람을 보면 그들을 불러모았더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속의 사울은 지금 전쟁을 지휘하고 있는 중입니다. 인간이 경험하는 가장 비참한 비극이 꿈틀거리는 전쟁터 한 복판에 있다는 것, 게다가 그 모든 결과에 책임을 져야하는 왕으로서 군대를 이끈다는 것은 분명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의 긴장과 고통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와 같은 깊은 혼돈 속에서 사울은 당시 많은 중동 왕들이 그러하듯이 전투를 앞두고 제사장을 통해 ‘신탁’(神託)을,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기 원했습니다.
하지만 사울이 바랐던 하나님의 음성은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이러한 주님의 침묵이 이스라엘 군대 지휘관 중에 누군가 분명히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그 누군가에 대한 엄중한 저주를 선포하며 장교들을 모아놓고 제비를 뽑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제비뽑기의 결과, 그 범인은 놀랍게도 다른 누구도 아닌 사울의 큰 아들 요나단으로 밝혀졌습니다.
이러한 충격적인 사건의 내막은 다음과 같습니다. 숱한 위기 상황 속에서 이미 제정신이 아닌 사울은 한 가지 이상한 명령을 자신의 군대에 내렸습니다. 그것은 바로 블레셋으로부터 승리를 거두기 전까지 아무 음식도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어느 누구보다 극한의 체력을 소모하는 군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기본적인 욕구의 충족입니다. 특별히 안정적인 식량 보급은 전쟁의 승패를 결정적으로 좌우하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제 아무리 뛰어난 지휘관과 강한 무기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제대로 먹지 못한다면 그 어떤 군대라도 백전백패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사울은 이스라엘 군대를 향해 오히려 ‘금식령’을 선포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와 같은 금식을 어기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사울이 단순히 왕명을 내린 것이 아니라 제사장적 권위를 제멋대로 도둑질해서 신앙적 율법을 선포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런 까닭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눈앞에 달콤한 꿀이 흐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먹지 못하고 절대 권력에 대한 두려움뿐만 아니라 그 위에 더해진 신앙적 공포 가운데 떨며 갈등과 굶주림 속에서 괴로워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그 때, 그러한 사울의 명령을 듣지 못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사울의 아들 요나단입니다. 요나단은 그 순간 이스라엘 군대와 함께 있지 않고 자신의 부하와 함께 단 둘이서 게릴라전을 펼쳐 블레셋 군인 20명을 죽이는 혁혁한 전과를 거두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 일어난 일을 알리가 없는 그는 수풀 안에 있는 꿀을 지팡이로 찍어다가 먹었습니다. 결국 요나단은 이로 말미암아 원하지도, 예기치도 않게 왕명을 어긴 불경건한 죄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그렇게 제비뽑기를 통하여 자신의 장남이 공개적으로 죄인으로 지목받았음에도 사울은 끝까지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44절에 보면 사울은 아버지로서 아들에게 결코 해서는 안 될 말을 하고 있습니다.
44 사울이 이르되 요나단아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내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와 같은 독기어린 말을 하는 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십니까? 설령 자신의 아들이 맞아 죽을죄를 지었어도 그것을 감싸주는 게 아버지의 마땅한 사랑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사울은 그러지는 못할망정 아무런 죄 없는 아들을 공개적으로 그것도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까지 저주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그러한 요나단의 결백을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이 변호하였습니다. 요나단에게 심판을 선언하는 사울의 말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것은 엄연한 반역행위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위험을 무릅쓰면서 용기 있게 이렇게 말합니다. 45절 말씀 다함께 읽겠습니다.
45 백성이 사울에게 말하되 이스라엘에 이 큰 구원을 이룬 요나단이 죽겠나이까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옵나니 그의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할 것은 그가 오늘 하나님과 동역하였음이니이다.
사울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요나단은 죄인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과 철저히 함께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하지만 욕망에 눈먼 사울만은 그를 천하의 극악한 죄인으로 몰아 붙였습니다.
본문의 이러한 사건을 통하여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사울의 내면세계는 무엇입니까? 사울은 권력을 지키고 왕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자신을 위해 충성하는 힘없는 백성들은 물론이고 하나 밖에 없는 맏아들과 심지어는 하나님마저도 이용 대상이자 걸림돌로 여기는 사람으로 변해버리고 말았습니다. 한 때 겸손하고 신실하게 주님을 섬기며 백성들을 사랑하고 희생했던 사울왕의 추악한 변질을 우리는 여기서 가슴 아프게 확인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다음 바로 이어지는 말씀에서는 흥미롭게도 그러한 사울이 누린 세속적 번영들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47, 48절에 보면 사울이 향하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49절에 보면 왕위를 계승할 든든한 세 아들을 두고 안정적으로 권력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알 게 됩니다. 사실 이것은 우리의 통속적인 신앙 상식과는 배치됩니다.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듯이 46절까지 말씀에서는 분명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훼손된, 비 신앙적인 행동을 거듭하는 사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울이 실패와 좌절을 겪기는커녕 오히려 왕으로서 남 부러울 것 없는 화려한 성공과 승리를 누리고 있음을 본문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신앙과 경건의 생명력은 세속적인 성공과는 결코 무관합니다. 설령 우리가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풍요를 한껏 누리고 있다 할지라도, 그리고 그것을 아무리 그럴듯한 종교적 언어와 행동으로 포장한다 할지라도 오히려 그 때야말로 하나님을 가장 대적하는 죄인일 수 있다는 사실을 오늘 본문 속 사울의 모습을 통하여 반드시 깨달아야 합니다.
이는 반대로 다른 이들이 겪는 실패와 좌절이 결코 그의 불경건을 뜻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그 누구도 감히 다른 이들의 신앙을 함부로 평가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사울은 그만 그 중요한 진리를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한 때 순박한 청년이었던 그가 왕관을 머리에 쓰고 손에 권력을 쥔 후 어느새 주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알게 모르게 자기 스스로를 하나님으로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그 자신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들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을 끔찍한 고통과 절망 속으로 몰아넣었음을 성경은 우리에게 엄중히 경고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상 역사가는 이와 같은 사울의 생애를 본문 52절에서 간단히 요약하고 있습니다.
52 사울이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과 큰 싸움이 있었으므로 사울이 힘 센 사람이나 용감한 사람을 보면 그들을 불러모았더라
바로 여기에 역사가 가진 무서운 힘이 숨어 있습니다. 우리는 역사 속의 인물들을 복잡한 수식어들로 기억하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평가할 때 단 하나의 결정적 사건, 혹은 단 한 줄의 문장이면 충분합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은 사울이 자신의 평생에 강력한 군대를 만드는 일에 온 힘을 다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찌 보면 가볍게 지나칠 수 있는 모습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행동들은 왕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매우 심각한 죄악입니다. 신명기 17장에는 이스라엘이 훗날 왕정을 시작할 것을 염두에 두고 왕이 마땅히 지켜야할 하나님의 명령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 16절을 보면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16 그는 병마를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병마를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하지 말 것이니
이것은 한 마디로 군사력 증강에 관심을 두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오늘날로 따지면 최신형 무기와 방위체계 도입에 몰두하지 말라는 엄중한 경고입니다. 이 말씀은 얼핏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왕으로서 자신이 다스리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강한 무기를 많이 갖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왜 하나님께서는 그처럼 도무지 납득하기 어려운 율법을 이스라엘 왕들을 향해 남기셨을까요?
그것은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이는 왕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통치원리는 결단코 힘과 폭력이 아닌 오직 주님의 정의와 평화임을 왕들이 더욱 믿고 순종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 까닭에 주님께서는 이 말씀에 더해 신명기 17장 18, 19절에 이스라엘 왕은 반드시 율법책을 옮겨 적어 자기 옆에 두고 읽으면서 자기를 택하신 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배우고 또한 모든 계명을 실천하라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그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모세율법은 이스라엘의 구원이 결코 그들의 의지와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철저한 은혜로 말미암았음을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조금 길지만 신명기 4장 32~35절 말씀을 새번역 성경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32 당신들이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이 이 땅 위에 사람을 창조하신 날부터 이제까지, 지나간 때를 깊이 생각하여 보십시오. 하늘 이 끝에서 저 끝에 이르기까지, 온 세계를 깊이 생각하여 보십시오. 그리고 이런 큰 일을 본 적이 있는지, 들은 적이 있는지 물어 보십시오. 33 당신들처럼, 불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도 살아 남은 백성이 있습니까? 34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이집트에서 당신들이 보는 앞에서 하신 것처럼, 온갖 시험과 표징과 기사와 전쟁과 강한 손과 펴신 팔과 큰 두려움으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의 억압에서 이끌어 내시려고 애쓰신, 그러한 신이 어디에 있습니까? 35 그러나 당신들에게 이것을 나타내셨으니, 그것은 주님이 곧 하나님이시고, 그분 밖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알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국가 공동체와 그들의 왕이 다른 나라들과 그들의 권력자들로부터 철저히 구별되는 가장 커다란 차이점입니다. 주님의 백성들은 출애굽으로 상징되는 이스라엘의 구원과 모든 승리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이심을 고백합니다. 그렇기에 구별된 백성들과 왕은 온 세상이 욕망에 취해 갈구하는 온갖 성공과 풍요를 하나님 나라를 위해 기꺼이 포기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울은 주님과 그분의 말씀을 업신여겼습니다. 또한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을 정의와 공평에 따라 약자들을 돕는데 사용하지 않고 오직 스스로의 욕망을 위해서만 사용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추악한 독재자로 역사에 기록되고 말았습니다.
어찌 보면 사울은 역사상 그 누구 못지않게 화려한 성공을 거둔 사람입니다. 평범한 청년이 이스라엘 역사상 최초의 왕이 되는 어마어마한 영광을 누렸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을 두 손에 움켜쥐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점차 높은 곳을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그리고 많은 것을 가지면 가질수록 그는 어느새 하나님을 자신에게서 불필요한 존재로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그에게는 자기 자신만이 진정, 왕이며 하나님인 까닭입니다.
반면 그가 저주했던 그의 아들 요나단은 정 반대의 신실한 삶을 살았음을 성경은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나단은 사울의 맏아들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왕으로서 요구되는 덕목들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훌륭한 인격과 실력을 두루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즉, 그는 두말할 것도 없이 당연한 권력 계승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일생을 결코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허비하지 않았습니다.
요나단은 하나님께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세우길 원하시는 왕이 자신이 아닌 다윗임을 깨달았을 때 기꺼이 그에게 권력을 양보하며 그를 지켜 주었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매우 어리석고 미련하게 보이는 일이었지만 그는 다윗을 위해 자신의 모든 지위를 주저없이 포기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이 자기 자신의 성공과 욕망보다 비교할 수도 없이 더욱 소중하다는 것을 분명히 믿고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울과 요나단은 비록 부자지간 이었지만 그들은 사는 날 동안에 전혀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아버지 사울은 평생 자기 자신만을 위해 무엇이든 움켜쥐려고 몸부림쳤지만 아들 요나단은 하나님을 위해 스스로를 내어 놓는 것을 결코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둘은 시간이 흘러 같은 날, 같은 곳 길보아 산위에서 똑같이 숨을 거두었습니다.
하지만 살아계신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요나단이 살아온 날들은 사울이 살아온 날들에 비하면 무척 초라하였지만 그는 진실로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고 말입니다.
우리 역시 언젠가 시간이 흘러 이 세상과 이별할 때 반드시 누군가의 기억 한 켠에 자리 잡게 될 것입니다. 그 때 여러분은 그 누군가에게 과연 어떤 모습으로 기억되기 원하십니까? 더 나아가 하나님으로부터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날 동안이 어떠했다고 인정받기 원하십니까?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들과 삶의 자리들 그리고 우리 손에 쥐어진 모든 것들을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사용한다면, 그리하여 끊임없이 다른 이들을 짓밟아 올라서고 힘을 모으는 데만 애쓴 다면 그것은 바로 지난 날 사울이 걸었던 바로 그 어리석은 길을 똑같이 따라 걸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또 다른 사울들의 등장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지금 이 순간도 이 시대의 요나단을 바로 우리 가운데 찾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과감히 선택해야만 합니다. 분명 사람들로부터 왕이라 일컬음 받았고 또한 스스로도 자신을 왕으로 여겼지만 결코 진정한 왕일 수 없었던 사울 대신, 왕이 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참된 왕이신 주님의 뜻을 따라 왕의 자리를 주저 없이 포기한 요나단의 길을 우리는 기꺼이 따라가야 합니다.
이것은 또한 참 하나님이심에도 기꺼이 참 사람이 되시어 십자가에 오르셨던 예수님의 걸음과 일치합니다. 요나단의 그 처절한 희생은 곧 주님의 십자가와 맞닿아 있습니다. 따라서 요나단의 죽음이 허무한 비극으로 끝나지 않았듯이, 섬김과 나눔의 길을 꾸준히 걸어갈 때 부활의 하나님께서 또한 우리 역시 진정한 생명과 희망으로 새롭게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요나단의 삶을 통해 늘 명심해야할 부활신앙입니다.
마침 다음 주 총선을 앞두고 이와 관련하여 여러분께 꼭 부탁드립니다. 반드시 투표하시길 바랍니다. 우리 예담교회 페이스북 그룹에 저 개인적으로 투표인증 이벤트를 실시 중입니다. 비록 적은 금액이지만 제가 상품권을 걸고 여러분께 투표를 독려하는 까닭은 선거란 단순히 정치적인 행사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사회적 책임을 실현하는 매우 중요한 신앙고백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가 투표 안한다고 해서 지옥 가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은 지옥을 만드는 일에 동조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손에 투표용지가 들려지기까지 수 천 년 동안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견고한 절대권력에 맞서 싸우며 저마다의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희생이 역사 속에서 되살아나 민주주의의 꽃을 피었고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투표권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소중한 은혜의 결실을 결코 허무하게 포기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어느 정당과 후보를 지지하든 상관없습니다. 각자의 신중한 판단아래 충분히 고민하시고 다음 주 수요일에 꼭 투표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인증샷을 페이스북에 올리면 제가 추첨해서 5명에게 5천원 상당의 기프티콘을 드리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활 신앙을 늘 가슴에 품으며 그 깊고 넓은 의미를 항상 곱씹으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향하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고 호화로운 풍요를 누리는 오늘날의 사울들이 끊임없이 우리를 멸시하고 조롱한다 할지라도, 때때로 우리 자신조차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스스로의 모습이 너무도 비참하고 초라하게 느껴질지라도 쉽게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주님의 참된 위로와 승리가 이 시대의 요나단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모든 사는 날 동안에 항상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기도: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
우리의 모든 구원과 승리는 오직 주님의 것임을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하나님, 우리가 감히 주님의 자리를 빼앗으려는 죄를 짓지 않게 하시고 다만 우리의 사는 날 동안에 잠잠히 진리의 길을 걷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께서 우리의 손에 쥐어준 그 무언가가 아닌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하여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우리가 우리를 향하는 다른 눈길들이 아닌 오직 주님의 따스한 은혜 아래서 참된 부활의 생명을 풍성히 누리게 하여주시길 원합니다.
다음 주 수요일에는 국회의원을 뽑는 총선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피 묻은 손으로 우리에게 주신 투표권을 소중히 사용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을 참으로 두려워하며 주님 나라의 생명과 정의와 평화를 위해 헌신하는 일꾼들이 세워져 대한민국을 새롭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 높은 곳에서 저 낮은 십자가로 향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지만 사울이 바랐던 하나님의 음성은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이러한 주님의 침묵이 이스라엘 군대 지휘관 중에 누군가 분명히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그 누군가에 대한 엄중한 저주를 선포하며 장교들을 모아놓고 제비를 뽑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제비뽑기의 결과, 그 범인은 놀랍게도 다른 누구도 아닌 사울의 큰 아들 요나단으로 밝혀졌습니다.
이러한 충격적인 사건의 내막은 다음과 같습니다. 숱한 위기 상황 속에서 이미 제정신이 아닌 사울은 한 가지 이상한 명령을 자신의 군대에 내렸습니다. 그것은 바로 블레셋으로부터 승리를 거두기 전까지 아무 음식도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어느 누구보다 극한의 체력을 소모하는 군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기본적인 욕구의 충족입니다. 특별히 안정적인 식량 보급은 전쟁의 승패를 결정적으로 좌우하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제 아무리 뛰어난 지휘관과 강한 무기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제대로 먹지 못한다면 그 어떤 군대라도 백전백패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사울은 이스라엘 군대를 향해 오히려 ‘금식령’을 선포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와 같은 금식을 어기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사울이 단순히 왕명을 내린 것이 아니라 제사장적 권위를 제멋대로 도둑질해서 신앙적 율법을 선포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런 까닭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눈앞에 달콤한 꿀이 흐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먹지 못하고 절대 권력에 대한 두려움뿐만 아니라 그 위에 더해진 신앙적 공포 가운데 떨며 갈등과 굶주림 속에서 괴로워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그 때, 그러한 사울의 명령을 듣지 못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사울의 아들 요나단입니다. 요나단은 그 순간 이스라엘 군대와 함께 있지 않고 자신의 부하와 함께 단 둘이서 게릴라전을 펼쳐 블레셋 군인 20명을 죽이는 혁혁한 전과를 거두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 일어난 일을 알리가 없는 그는 수풀 안에 있는 꿀을 지팡이로 찍어다가 먹었습니다. 결국 요나단은 이로 말미암아 원하지도, 예기치도 않게 왕명을 어긴 불경건한 죄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그렇게 제비뽑기를 통하여 자신의 장남이 공개적으로 죄인으로 지목받았음에도 사울은 끝까지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44절에 보면 사울은 아버지로서 아들에게 결코 해서는 안 될 말을 하고 있습니다.
44 사울이 이르되 요나단아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내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와 같은 독기어린 말을 하는 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십니까? 설령 자신의 아들이 맞아 죽을죄를 지었어도 그것을 감싸주는 게 아버지의 마땅한 사랑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사울은 그러지는 못할망정 아무런 죄 없는 아들을 공개적으로 그것도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까지 저주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그러한 요나단의 결백을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이 변호하였습니다. 요나단에게 심판을 선언하는 사울의 말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것은 엄연한 반역행위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위험을 무릅쓰면서 용기 있게 이렇게 말합니다. 45절 말씀 다함께 읽겠습니다.
45 백성이 사울에게 말하되 이스라엘에 이 큰 구원을 이룬 요나단이 죽겠나이까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옵나니 그의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할 것은 그가 오늘 하나님과 동역하였음이니이다.
사울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요나단은 죄인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과 철저히 함께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하지만 욕망에 눈먼 사울만은 그를 천하의 극악한 죄인으로 몰아 붙였습니다.
본문의 이러한 사건을 통하여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사울의 내면세계는 무엇입니까? 사울은 권력을 지키고 왕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자신을 위해 충성하는 힘없는 백성들은 물론이고 하나 밖에 없는 맏아들과 심지어는 하나님마저도 이용 대상이자 걸림돌로 여기는 사람으로 변해버리고 말았습니다. 한 때 겸손하고 신실하게 주님을 섬기며 백성들을 사랑하고 희생했던 사울왕의 추악한 변질을 우리는 여기서 가슴 아프게 확인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다음 바로 이어지는 말씀에서는 흥미롭게도 그러한 사울이 누린 세속적 번영들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47, 48절에 보면 사울이 향하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49절에 보면 왕위를 계승할 든든한 세 아들을 두고 안정적으로 권력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알 게 됩니다. 사실 이것은 우리의 통속적인 신앙 상식과는 배치됩니다.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듯이 46절까지 말씀에서는 분명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훼손된, 비 신앙적인 행동을 거듭하는 사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울이 실패와 좌절을 겪기는커녕 오히려 왕으로서 남 부러울 것 없는 화려한 성공과 승리를 누리고 있음을 본문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신앙과 경건의 생명력은 세속적인 성공과는 결코 무관합니다. 설령 우리가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풍요를 한껏 누리고 있다 할지라도, 그리고 그것을 아무리 그럴듯한 종교적 언어와 행동으로 포장한다 할지라도 오히려 그 때야말로 하나님을 가장 대적하는 죄인일 수 있다는 사실을 오늘 본문 속 사울의 모습을 통하여 반드시 깨달아야 합니다.
이는 반대로 다른 이들이 겪는 실패와 좌절이 결코 그의 불경건을 뜻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그 누구도 감히 다른 이들의 신앙을 함부로 평가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사울은 그만 그 중요한 진리를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한 때 순박한 청년이었던 그가 왕관을 머리에 쓰고 손에 권력을 쥔 후 어느새 주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알게 모르게 자기 스스로를 하나님으로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그 자신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들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을 끔찍한 고통과 절망 속으로 몰아넣었음을 성경은 우리에게 엄중히 경고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상 역사가는 이와 같은 사울의 생애를 본문 52절에서 간단히 요약하고 있습니다.
52 사울이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과 큰 싸움이 있었으므로 사울이 힘 센 사람이나 용감한 사람을 보면 그들을 불러모았더라
바로 여기에 역사가 가진 무서운 힘이 숨어 있습니다. 우리는 역사 속의 인물들을 복잡한 수식어들로 기억하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평가할 때 단 하나의 결정적 사건, 혹은 단 한 줄의 문장이면 충분합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은 사울이 자신의 평생에 강력한 군대를 만드는 일에 온 힘을 다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찌 보면 가볍게 지나칠 수 있는 모습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행동들은 왕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매우 심각한 죄악입니다. 신명기 17장에는 이스라엘이 훗날 왕정을 시작할 것을 염두에 두고 왕이 마땅히 지켜야할 하나님의 명령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 16절을 보면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16 그는 병마를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병마를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하지 말 것이니
이것은 한 마디로 군사력 증강에 관심을 두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오늘날로 따지면 최신형 무기와 방위체계 도입에 몰두하지 말라는 엄중한 경고입니다. 이 말씀은 얼핏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왕으로서 자신이 다스리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강한 무기를 많이 갖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왜 하나님께서는 그처럼 도무지 납득하기 어려운 율법을 이스라엘 왕들을 향해 남기셨을까요?
그것은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이는 왕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통치원리는 결단코 힘과 폭력이 아닌 오직 주님의 정의와 평화임을 왕들이 더욱 믿고 순종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 까닭에 주님께서는 이 말씀에 더해 신명기 17장 18, 19절에 이스라엘 왕은 반드시 율법책을 옮겨 적어 자기 옆에 두고 읽으면서 자기를 택하신 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배우고 또한 모든 계명을 실천하라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그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모세율법은 이스라엘의 구원이 결코 그들의 의지와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철저한 은혜로 말미암았음을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조금 길지만 신명기 4장 32~35절 말씀을 새번역 성경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32 당신들이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이 이 땅 위에 사람을 창조하신 날부터 이제까지, 지나간 때를 깊이 생각하여 보십시오. 하늘 이 끝에서 저 끝에 이르기까지, 온 세계를 깊이 생각하여 보십시오. 그리고 이런 큰 일을 본 적이 있는지, 들은 적이 있는지 물어 보십시오. 33 당신들처럼, 불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도 살아 남은 백성이 있습니까? 34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이집트에서 당신들이 보는 앞에서 하신 것처럼, 온갖 시험과 표징과 기사와 전쟁과 강한 손과 펴신 팔과 큰 두려움으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의 억압에서 이끌어 내시려고 애쓰신, 그러한 신이 어디에 있습니까? 35 그러나 당신들에게 이것을 나타내셨으니, 그것은 주님이 곧 하나님이시고, 그분 밖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알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국가 공동체와 그들의 왕이 다른 나라들과 그들의 권력자들로부터 철저히 구별되는 가장 커다란 차이점입니다. 주님의 백성들은 출애굽으로 상징되는 이스라엘의 구원과 모든 승리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이심을 고백합니다. 그렇기에 구별된 백성들과 왕은 온 세상이 욕망에 취해 갈구하는 온갖 성공과 풍요를 하나님 나라를 위해 기꺼이 포기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울은 주님과 그분의 말씀을 업신여겼습니다. 또한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을 정의와 공평에 따라 약자들을 돕는데 사용하지 않고 오직 스스로의 욕망을 위해서만 사용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추악한 독재자로 역사에 기록되고 말았습니다.
어찌 보면 사울은 역사상 그 누구 못지않게 화려한 성공을 거둔 사람입니다. 평범한 청년이 이스라엘 역사상 최초의 왕이 되는 어마어마한 영광을 누렸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을 두 손에 움켜쥐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점차 높은 곳을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그리고 많은 것을 가지면 가질수록 그는 어느새 하나님을 자신에게서 불필요한 존재로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그에게는 자기 자신만이 진정, 왕이며 하나님인 까닭입니다.
반면 그가 저주했던 그의 아들 요나단은 정 반대의 신실한 삶을 살았음을 성경은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나단은 사울의 맏아들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왕으로서 요구되는 덕목들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훌륭한 인격과 실력을 두루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즉, 그는 두말할 것도 없이 당연한 권력 계승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일생을 결코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허비하지 않았습니다.
요나단은 하나님께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세우길 원하시는 왕이 자신이 아닌 다윗임을 깨달았을 때 기꺼이 그에게 권력을 양보하며 그를 지켜 주었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매우 어리석고 미련하게 보이는 일이었지만 그는 다윗을 위해 자신의 모든 지위를 주저없이 포기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이 자기 자신의 성공과 욕망보다 비교할 수도 없이 더욱 소중하다는 것을 분명히 믿고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울과 요나단은 비록 부자지간 이었지만 그들은 사는 날 동안에 전혀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아버지 사울은 평생 자기 자신만을 위해 무엇이든 움켜쥐려고 몸부림쳤지만 아들 요나단은 하나님을 위해 스스로를 내어 놓는 것을 결코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둘은 시간이 흘러 같은 날, 같은 곳 길보아 산위에서 똑같이 숨을 거두었습니다.
하지만 살아계신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요나단이 살아온 날들은 사울이 살아온 날들에 비하면 무척 초라하였지만 그는 진실로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고 말입니다.
우리 역시 언젠가 시간이 흘러 이 세상과 이별할 때 반드시 누군가의 기억 한 켠에 자리 잡게 될 것입니다. 그 때 여러분은 그 누군가에게 과연 어떤 모습으로 기억되기 원하십니까? 더 나아가 하나님으로부터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날 동안이 어떠했다고 인정받기 원하십니까?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들과 삶의 자리들 그리고 우리 손에 쥐어진 모든 것들을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사용한다면, 그리하여 끊임없이 다른 이들을 짓밟아 올라서고 힘을 모으는 데만 애쓴 다면 그것은 바로 지난 날 사울이 걸었던 바로 그 어리석은 길을 똑같이 따라 걸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또 다른 사울들의 등장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지금 이 순간도 이 시대의 요나단을 바로 우리 가운데 찾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과감히 선택해야만 합니다. 분명 사람들로부터 왕이라 일컬음 받았고 또한 스스로도 자신을 왕으로 여겼지만 결코 진정한 왕일 수 없었던 사울 대신, 왕이 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참된 왕이신 주님의 뜻을 따라 왕의 자리를 주저 없이 포기한 요나단의 길을 우리는 기꺼이 따라가야 합니다.
이것은 또한 참 하나님이심에도 기꺼이 참 사람이 되시어 십자가에 오르셨던 예수님의 걸음과 일치합니다. 요나단의 그 처절한 희생은 곧 주님의 십자가와 맞닿아 있습니다. 따라서 요나단의 죽음이 허무한 비극으로 끝나지 않았듯이, 섬김과 나눔의 길을 꾸준히 걸어갈 때 부활의 하나님께서 또한 우리 역시 진정한 생명과 희망으로 새롭게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요나단의 삶을 통해 늘 명심해야할 부활신앙입니다.
마침 다음 주 총선을 앞두고 이와 관련하여 여러분께 꼭 부탁드립니다. 반드시 투표하시길 바랍니다. 우리 예담교회 페이스북 그룹에 저 개인적으로 투표인증 이벤트를 실시 중입니다. 비록 적은 금액이지만 제가 상품권을 걸고 여러분께 투표를 독려하는 까닭은 선거란 단순히 정치적인 행사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사회적 책임을 실현하는 매우 중요한 신앙고백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가 투표 안한다고 해서 지옥 가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은 지옥을 만드는 일에 동조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손에 투표용지가 들려지기까지 수 천 년 동안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견고한 절대권력에 맞서 싸우며 저마다의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희생이 역사 속에서 되살아나 민주주의의 꽃을 피었고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투표권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소중한 은혜의 결실을 결코 허무하게 포기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어느 정당과 후보를 지지하든 상관없습니다. 각자의 신중한 판단아래 충분히 고민하시고 다음 주 수요일에 꼭 투표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인증샷을 페이스북에 올리면 제가 추첨해서 5명에게 5천원 상당의 기프티콘을 드리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활 신앙을 늘 가슴에 품으며 그 깊고 넓은 의미를 항상 곱씹으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향하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고 호화로운 풍요를 누리는 오늘날의 사울들이 끊임없이 우리를 멸시하고 조롱한다 할지라도, 때때로 우리 자신조차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스스로의 모습이 너무도 비참하고 초라하게 느껴질지라도 쉽게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주님의 참된 위로와 승리가 이 시대의 요나단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모든 사는 날 동안에 항상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기도: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
우리의 모든 구원과 승리는 오직 주님의 것임을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하나님, 우리가 감히 주님의 자리를 빼앗으려는 죄를 짓지 않게 하시고 다만 우리의 사는 날 동안에 잠잠히 진리의 길을 걷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께서 우리의 손에 쥐어준 그 무언가가 아닌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하여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우리가 우리를 향하는 다른 눈길들이 아닌 오직 주님의 따스한 은혜 아래서 참된 부활의 생명을 풍성히 누리게 하여주시길 원합니다.
다음 주 수요일에는 국회의원을 뽑는 총선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피 묻은 손으로 우리에게 주신 투표권을 소중히 사용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을 참으로 두려워하며 주님 나라의 생명과 정의와 평화를 위해 헌신하는 일꾼들이 세워져 대한민국을 새롭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 높은 곳에서 저 낮은 십자가로 향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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