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2월 7일 화요일

마가복음 9장 2-9절 “산 위에서, 산 아래로”

산상변모주일, 2016년 2월 7일, 부산진교회 청년예배 설교, 정대진 목사
마가복음 9장 2-9절 “산 위에서, 산 아래로”

2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3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 4 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 예수와 더불어 말하거늘 5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6 이는 그들이 몹시 무서워하므로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함이더라 7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8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뿐이었더라 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경고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오늘 함께 읽은 본문 말씀에는 예수님께서 12제자들 중 당신과 특별히 더 가깝게 지냈던 세 명의 제자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오르시는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본문이 그들의 이름을 기록한 방식입니다. 우리말 번역에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헬라어 성경 원전을 보면 제자들 각각의 이름 앞에, “정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따라서 2절 말씀 앞부분을 좀 더 원문에 가깝게 직역하면 “엿새 후에 예수께서 ‘그’ 베드로를 그리고 ‘그’ 야고보를 그리고 ‘그’ 요한을 데리시고” 높은 산으로 가셨습니다.

그렇다면 마가복음의 저자는 왜 일반적인 방법으로 제자들의 이름을 적지 않고 굳이 명확히 강조해서 언급했을까요? 그것은 바로 앞에 기록된, 6일 전에 있었던 매우 중요한 사건과 본문 말씀이 무척 긴밀하게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질문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때부터 비로소 주님께서는 당신이 고난을 겪으시고 죽임 당하신 후에 다시 살아나신다는, 복음의 핵심을 말씀하셨기 때문에 복음서에서 이 대화는 무척 중요한 장면입니다.

이와 같은 주님의 말씀은 제자들에게 굉장한 충격을 안겨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셔서 왕좌에 오르시고 자신들은 그 곁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리라 기대했던 그들의 부푼 꿈을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발언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그때 얼마나 놀랐고 또 불쾌했던지 불과 조금 전에 주님은 그리스도시라는 위대한 고백을 했던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잡고 거칠게 따질 정도였습니다.


마가복음 9장 2절은 예수님께서 바로 “그” 베드로는 물론이고 곁에서 침묵으로 마음을 함께 한 “그” 야고보와 “그” 요한을 데리고 산에 오르셨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럼으로써 6일 전의 그 긴장과 갈등이 여전히 본문 말씀 아래에 도도히 흐르고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한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어색함과 서운함 가운데 높은 산 위에 오르시고 어떤 모습을 보이셨을까요? 3절 말씀 읽겠습니다.

3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

산 위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주님의 변화를 3절에서 구체적으로 묘사하며 아무리 깨끗이 빨래해도 나올 수 없는 찬란한 빛이 예수님으로부터 뿜어져 나왔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이 때 “광채”로 옮겨진 헬라어 <스틸본타>는 신약성경에서 단 한 번 본문 말씀에만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정리 하자면, 예수님께서는 그 모습이 제자들 앞에서 완전히 변하셨는데 그 때 주님으로부터 발하는 빛은 흔히 볼 수 있는 일반적인 빛이 아니라 신약성경의 다른 그 어떤 단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너무나 신비롭고 독특한 광채였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변화된 예수님 곁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습니다. 다함께 4절 말씀 읽겠습니다.

4 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 예수와 더불어 말하거늘

주님 가까이에 모세와 엘리야가 갑자기 등장한 것 자체가 굉장히 신비로운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으십니까? 제자들은 사진도 없던 그 시대에 말로만 들었던 모세와 엘리야를 어떻게 알아보았을까요? 이런 상상을 한 번 해보시길 바랍니다. 만약 모세와 엘리야가 지금 우리 눈앞에 있다고 했을 때 과연 그들을 알아볼 수 있을까요? 그것은 전혀 불가능합니다. 성경에 그들의 생김새를 묘사한 몇 가지 문장만 알고 있을 뿐, 그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생겼는지 전혀 알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어떻게 그 두 사람의 정체를 단 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그 둘의 등장뿐만 아니라 모습 자체가 모세와 엘리야라는 사실을 도저히 의심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신비아래 존재감을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구약의 수많은 위대한 인물들 가운데 “모세”와 “엘리야” 이 두 사람이 함께 나타났다는 사실역시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신명기 18장에 따르면 모세는 하나님께서 자신과 같은 예언자를 이스라엘 가운데서 세우겠다고 말씀했습니다. 실제로 이 말씀에 따라 이스라엘에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수많은 예언자들이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와 같은 참된 예언자가 자신들 사이에 나타날 것을 여전히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세가 다시 나타나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드러내 보여줄 것을 간절히 기대 했습니다.

또한 엘리야 역시 모세처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 ‘미래’에 대한 희망을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구약성경의 가장 마지막 책인 말라기 4장 5절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훗날 그들에게 “엘리야”를 보내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와 마찬가지로 엘리야 역시 언젠가 다시 오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엘리야가 메시아의 오심을 바르게 알려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주님 오실 길을 예비한 세례자 요한을 가리켜서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엘리야”라고 기록했습니다.

이렇게 “모세와 엘리야”는 언젠가 다시 오셔서 참 된 메시아가 누군지 똑똑히 알려줄 사람으로 오랫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간절히 기다렸던 예언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마침내 제자들 앞에, 그것도 이 세상에 다시없을 화려하고 찬란한 광채를 비추시는 주님 곁에서 분명히 나타났습니다.

이것이 과연 그들에게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수님께서는 왜 당신의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도리어 화를 내며 원망한 바로 “그” 어리석은 제자들, 그 베드로와 그 야고보와 그 요한을 데리고 산으로 가셔서 이 놀라운 관경을 보여주셨을까요? 그것은 그들의 의심과 실망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분명히 예언자들이 수 천 년 간 외쳤던 바로 그 메시아임을,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영광 가운데 드러내시며 그들의 믿음을 다시 일으켜 세워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알아갈 때, 늘 기쁘고 즐거울 수만은 없습니다. 만약 그렇다고 말한다면 그건 거짓말입니다. 복음의 핵심인 십자가는 사람들의 욕망과 정면으로 부딪히며 언제나 많은 이들을 불편하게 하고 당황시키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고난과 죽음을 말씀하시는 주님께 거칠게 따져 물었던 베드로의 모습은 우리 모두의 솔직한 마음을 대신한 행동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바로 “그 제자들”에게 당신의 참되고 찬란한 영광을 드러내신 주님을 따라 우리역시 산 위로 올라가야 합니다.

산 밑에서는 결코 넓고 멀리, 제대로 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서 있는 곳의 정확한 위치와 풍경을 온전히 알기 위해서는 높은 산 위로 올라가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저마다의 문제들을 마냥 끌어안고만 있고 여러 혼란들 속에 멍하니 앉아만 있을 때는 절대로 그 모든 어려움과 갈등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일상의 자리에서 잠시 벗어나 주님의 영광이 아름답게 빛나는 곳을 묵묵히 바라봐야만 합니다.

바로 이것을 위해 우리가 이 예배의 자리에 함께 모였습니다. 물론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해서 지금 당장 우리 눈앞에 신비로운 일들이 화려하게 펼쳐지지 않습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이 예배당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배는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신비로 말미암아 2천년의 위대한 역사를 통해 다듬어진 소중한 은총의 도구입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말씀과 기도와 찬양으로 고백하며 우리의 삶을 초월하는 주님의 사랑과 영광을 믿음의 공동체 가운데 함께 바라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기 때문에 예배를 더욱 소중히 여기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이 예배를 통해 다른 곳에서는 결코 마주할 수 없는, 십자가와 부활에 담긴 주님의 생명을 온전히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꼭 주일이 아니더라도 매일 저마다의 영광의 산 위에 오르길 바랍니다. 비록 각자의 분주한 삶 때문에 분명 쉽지는 않지만 마음속에 혼란과 괴로움이 넘칠 때 수요기도회나 금요기도회에 참석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꼭 교회가 아니더라도, 예수님의 구원을 묵상할 수 있는 자신 만의 참된 안식의 장소를 갖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제 경우, 혼자 도보여행 하는 것을 무척 좋아합니다. 경치 좋은 곳을 한참 걷다보면 복잡한 생각들이 어느 정도 정리되고 하나님의 섭리와 창조질서를 충분히 묵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쁜 카페에 앉아 좋은 커피나 차를 마시며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것도 우리의 영혼에 참 유익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마저 어렵다면 딱히 어떤 특별한 곳에 가지 않더라도 하루 중에 단 1분이라도 핸드폰을 잠시 꺼두고, 방에 들어가 혼자 조용히 머물며 주님의 영광을 묵상하길 바랍니다. 단언하건데, 그런 각자의 산 위의 시간들이 여러분들의 내면을 참으로 건강하고 풍요롭게 할 줄 믿습니다.


동시에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은 주님께서는 우리가 “산 위에만” 머물러 있는 걸 원치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5-6절 말씀 읽겠습니다.

5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6 이는 그들이 몹시 무서워하므로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함이더라

예수님의 놀라운 광채와 그 곁에 선 모세와 엘리야를 바라본 베드로는 도저히 그 흥분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영광스런 산 위에 머물러 있는 것이 좋다고 하면서 주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위해 각각 천막을 치고 거기에 계속 머물러 사는 게 어떠냐고 예수님께 건의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 하나님께서 구름 가운데 나타나시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순간, 제자들의 눈앞에 펼쳐졌던 신기한 관경들이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마음 깊이 진정 담아 두어야할 진리를 당신의 행동과 말씀으로 보이고 일러주셨습니다. 9절 말씀 다함께 읽겠습니다.

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경고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산 위에 머물러 계시지 않으시고 제자들을 데리고 산 아래로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기 전까지 그들이 그곳에서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말라고 엄하게 경고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예수님의 행동이 쉽게 이해되십니까? 한 번 상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그 모습 그대로 영광스런 찬란한 광채에 둘러 싸여 산 위에 가만히 머물러 계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렇다면 예수님은 더 이상 가난하고 힘들게 살 필요 없이 사람들의 찬양과 경배만을 받으며 얼마든지 편하고 여유롭게 살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님께 전혀 손해가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굳이 산 아래로 내려 가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본문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사건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가복음 9장 17-18절 말씀 제가 읽겠습니다.

17 무리 중의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말 못하게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 18 귀신이 어디서든지 그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해지는지라 내가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달라 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산 아래로 내려갔을 때 마주한 사람은 바로 귀신들려 극심한 고통에 시달려야 했던 한 아이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아이로부터 귀신을 내쫓으셨습니다. 바로 여기에 예수님께서 산 위에서, 산 아래로 내려가신 이유가 담겨 있습니다. 산 아래로 가야만 그 곳에 있는 귀신들린 어린 아이처럼 주님이 필요한 힘들고 지친 사람들 곁에 머물 수 있고, 산 아래로 가야만 십자가를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거듭 바라며 당부합니다. 주님의 찬란한 영광을 소망하며 주일 예배를 비롯한 저마다의 영적 산 위에 올라 하나님의 신비를 경험하는 것을 소중히 여기시길 바랍니다. 거기에 우리의 영혼을 살리는 참 생명의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주님께서는 우리가 산 위에만 머물러 있는 것을 결코 원치 않음을 반드시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그렇다면 절대로 예수님과 더불어 십자가를 질 수 없고,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 세상 속에 실현하고자 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온전한 길 위에 바로 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일날 예배를 사모하며 교회에 모이는 이유는 더욱 당당히 교회 밖을 향해 흩어지기 위함임을 항상 마음 깊이 새기길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사람들을 향해 참된 사랑의 말을 나누기 위함임을 언제나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열심히 성경을 묵상해야 하는 이유는 그 말씀을 저마다 삶의 언어로 바르게 번역하기 위함임을 늘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이렇듯 우리는 산에서 내려가기 위해 올라가는 사람들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 소중한 진리를 잊어버린 채 산 아래에만 주저앉아 있거나 산 위에만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마치 십자가 없는 부활, 혹은 부활 없는 십자가처럼 철저히 뒤틀리고 그을린 병든 신앙에 사로잡혀 있음을 뜻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크고 넓은 뜻을 더욱 알아감으로 당황해하고 힘겨워하는 우리를 산 위로 이끄시어 놀랍고도 위대한 영광을 보여주는 분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따라서 온 우주 가운데 유일한, 주님만의 찬란한 빛이 머무는 산 위를 향해 눈길을 두길 바랍니다. 동시에 그 빛을 가슴 깊이 품고 산 아래, 어둡고 가난한 이들을 향해 나아가시길 소망합니다.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 위에 오르신 후, 부활하신 몸으로 산 아래 제자들을 향해 나타나신 예수님의 찬란한 사랑이 그런 우리의 모든 걸음 가운데 언제나 함께하시고 날마다 이끌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기도: 영광의 하나님
예수님의 유일한 광채를 사모하고 주님만을 바라보며 저마다의 산 위에 오르기 원합니다. 동시에 산 위에만 머무르고자 하는 우리의 어리석음을 바로 잡아주시고 기꺼이 산 아래, 주님의 사랑이 필요한 이들을 향해 내려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산 아래로 내려가기 위해, 산 위로 오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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