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2월 7일 화요일

이사야 43장 1-7절 “어디를 지나든지”

사순절 다섯 번째 주일, 2016년 3월 13일, 부산진교회 청년예배 설교, 정대진 목사
이사야 43장 1-7절 “어디를 지나든지”

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3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 4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5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쪽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쪽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6 내가 북쪽에게 이르기를 내놓으라 남쪽에게 이르기를 가두어 두지 말라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며 7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가만히 지난 한 주간의 동선을 그려보시길 바랍니다. 어떤가요? 보통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삶아감의 넓이는 그리 크지 않습니다. 이제 새 학기가 시작 됐기 때문에, 학교에 다니는 청년들은 학교를 오가느라 정신없을 겁니다. 또한 그 이상으로 직장에 다니는 청년들 역시 대부분 직장과 집을 오가느라 분주하실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스스로를 삶의 자리에서 좀처럼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하는 '굳건한 정착민'으로 여기기 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호기롭게 직장과 가정을 박차고 떠나 세계 곳곳을 누비며 의미 있는 일들을 하는 여러 사람들을 존경과 동경의 눈으로 바라보기도 합니다. 그리고 각종 여행관련 방송에 등장하는 연예인들과 여행 작가들을 부러워하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정착민 입니다. 좀처럼 마음대로 일상의 굴레에서 쉽게 벗어나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면에서 우리는 분명 정착민 입니다. 하지만 이는 절반의 진실입니다. 적어도 우리는 '지리적인' 입장에서 정착민일 뿐 또 다른 면에서는 확실히 유목민이기 때문입니다. 



납득하기 어려우시다면 여러분이 무얼 위해 그토록 하루하루 쳇바퀴를 돌았는지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비록 제 자리를 맴도는 듯 하지만 실상 그것을 통해 생의 어떤 방향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쉽게 예를 들겠습니다. 이 자리에 모인 대부분의 청년들은 고등학교 졸업이라는 어마어마한 과정을 통과 했습니다. 그리고 상당수 지체들은 대학입학이라는 관문을 통과했습니다. 또한 적지 않은 청년들이 지금 취직을 준비하고 있고 또 힘겹게 직장을 다니는 삶의 과정을 지나고 있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취직해서 승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하고 가정을 이뤄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보통 아이를 낳고 부모가 되고, 또 그 자녀들의 자립과 결혼을 도와야합니다. 이 외에도 우리 삶에는 여러 다양한 과제들이 항상 눈앞에 던져지곤 합니다. 이렇듯 우리 생은 나아가야할 방향을 바라보고 또 그 길을 우직이 걸어가 무사히 목적지에 다다르는 일의 반복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정착민이면서 동시에 유목민입니다. 노년의 야곱이 자신의 나이를 묻는 이집트 파라오의 질문에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 이니이다."라고 답한 것은 단지 그가 양과 염소를 돌보는 유목민들의 족장이어서가 아닙니다. 마음을 한 곳에 머물 겨를 없이 끊임없이 사막 길을 나그네처럼 오가는 것이 곧 인생의 본질이라는 그만의 값지고 힘겨운 성찰의 결과이고 이는 곧 우리 모두에게도 동일 해당되는 일입니다. 


문제는 그러한 우리네 '나그네 길'이 그리 평탄치가 않다는 사실입니다. 날마다 볕 좋고 공기 맑은 아름다운 숲길이나 강변만을 지날 수 있다면 참 감사하고 행복하겠지만 우리 모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듯이 야곱과 흡사한 '험악한 세월'을 보내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끝도 없을 것 같은 사막 위를 날카로운 뙤약볕 아래를 숨을 헐떡이며 걷기도 하고 칠흑 같은 밤길 위를 손을 휘적거리며 지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인생의 험한 길 속을 헤쳐 나갈 때 우리 내면 깊이 자리 잡는 감정은 바로 "두려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생은 한 마디로 ‘두려움을 뚫고 지나가는 나그네 길’이라고 조금 거창하게 정의할 수 있습니다. 흙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본질상 깨어지고 으스러져 다시 흙으로 돌아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한 마디로 두려움과 결코 떨어질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반드시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향해, 당신의 참 이스라엘 백성 되는 모든 피조물들을 향해 분명한 어조로 이렇게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그렇다면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단지 듣기 좋은 말 몇 마디로 우리 마음에 값싼 위로를 주시려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먼저 1절에 기록된 하나님에 대한 호칭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함께 1절 말씀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다소 긴 문장으로 번역된 1절 앞부분을 히브리식 반복 강조 표현을 살려 직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그 분은 너희의 창조자이며 형성자이다.”



이 때 "창조"로 옮긴 히브리어 단어의 원형 <바라>는 창세기 1장1절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에 사용되는 단어와 같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이 단어는 오직 하나님만을 주어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예언자를 통해, 본문의 배경이 되는 바벨론 포로로 잡힌 이스라엘뿐 아니라 오늘 우리를 향해 당신께서 우리의 "창조자"이심을 명확히 말씀 하십니다. 이렇듯 주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지으셨기에 우리가 감히 두려움을 떨쳐버릴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두려움 속에 떨 수밖에 없는 우리의 약한 마음과 내면을 그 누구보다 잘 아는, 우리를 총체적으로 지으신 창조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와 같은 하나님의 창조를 구체적으로 세밀히 묘사한 다른 동사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곧 "구속"과 "지명하여 부름"입니다. 보다 쉽게 풀면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죽음과 절망으로 부터 구해 내시려 대가를 지불하셨습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항상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그 누구도 우주 먼지처럼 광활한 허공 위를 쓸쓸히 떠돌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존엄과 영광 가운데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피조물인 우리를 그저 당신의 필요와 즐거움을 위한 수단과 대상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우리가 처한 모든 두려움으로부터 건지시기 위해 당신을 스스로를 내 던지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재와 인격을 기억하시며 이름을 불러 주십니다. 



그러므로 예언자는 이와 같은 찬란한 은혜를 더욱 높은 차원으로 발전시켜 7절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7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우리는 이와 같은 이사야 43장 1,7절에 담긴 놀랍고도 절절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고백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를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지으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부르시고 구원하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창조주 하나님의 당신의 백성들을 향한 사랑 선언은 그들이 처한 나그네 길에 대입되어 더욱 그 실체가 명료하게 드러납니다. 2절 말씀 다함께 읽으시겠습니다. 


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이 말씀은 이사야 43장이 놓인 문맥과 상황을 고려할 때, 직접적으로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어 고향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여정 속에서 사막 길의 대표적 위험요소인 "물과 불"로부터의 안전을 약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이미 과거 그들의 조상들로부터 내려오는 역사적 사건, 즉 "출애굽"에 대한 회상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미 앞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 홍해바다를 안전히 건너게 하셨고, 또 불기둥으로 보호하셨던 분이심을 그들에게 거듭 기억하게 하고 계십니다. 


이를 보다 자세히 이해하기 위해 고대 중동사회에서의 물과 불의 위험성을 정확히 유념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과학기술이 오늘날과 비교할 때 극히 미미했던 그 시대는 자연재해에 절대적으로 취약했습니다. 우리나라에 아직까지도 무속 신앙이 강하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 지역 대부분은 해안가 혹은 섬 지방 입니다. 오늘날 조선, 항해 기술이 월등히 발전했음에도 불구하고 바다를 건넌다는 것은 압도적인 자연의 위력 앞에 거대한 공포를 이겨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수천 년 전 고대 사회에서 물을 건넌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인가를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신구약성서의 대부분은 지리적으로 사막을 배경으로 합니다. 즉, 물을 구하기가 굉장히 어렵고 귀한 곳입니다. 한편 밤이 되면 낮과 전혀 반대되는 맹추위가 몰려오기에 불을 지피는 것이 무척 중요하고 꼭 필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잠시라도 불을 소홀히 다뤄 그것이 다른 곳에 옮겼을 때, 불이 삽시간에 번지기는 쉽지만 그것을 끄기는 너무나 어려웠습니다. 



따라서 고대 중동 사람들에게 있어 불은 물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무척 까다롭고 다스리기 어려운 크나큰 두려움이 대상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물과 불”이라는, 그러한 공포의 구체적 실체를 명확히 언급하십니다. 그리고 과거 출애굽 여정에도 그러하셨듯이 이제 바벨론에서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가는 그들의 걸음 속 그 모든 위험으로부터 안전히 지켜주시어 두려움을 이겨내게 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으로 하여금 두려움에 떨게 하는 저마다의 구체적인 '물과 불'은 과연 무엇입니까? 섬뜩한 이빨을 드러내며 금세라도 여러분을 삼킬 것처럼 달려드는 인생의 파도는 무엇입니까? 적의로 가득한 붉은 눈으로 여러분을 노려보는 삶의 불길은 무엇입니까?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앞날 때문에 막막하고 불안하지 않으십니까? 이성교제와 결혼 문제로 걱정되고 염려하고 있진 않으십니까? 누구에게도 쉽게 말 못할 가정과 대인관계 문제로 남몰래 아파하고 괴로워하고 계시지는 않으십니까? 


그런 여러분에게 오늘 말씀에 의지하여 다시 한 번 권면합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어떤 물과 불속에도 가만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반드시 구해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나가야할 길로 올바르게 인도해 주십니다. 




이렇듯 우리의 인생 여정에서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까닭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창조주이시며 신실한 인도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를 본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5, 6절 말씀 다함께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5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쪽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쪽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6 내가 북쪽에게 이르기를 내놓으라 남쪽에게 이르기를 가두어 두지 말라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며 

하나님께서는 5절에서 거듭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시며 동서남북 온 사방에서 예루살렘으로 당신의 백성들을 불러 모을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렇게 아무리 먼 땅 끝에서라도 기어이 모아들일 사람들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바로. "내 아들들", "내 딸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 된 우리를 단순히 마음에 쏙 드는 최상급의 작품으로만 대하지 않으셨습니다. 사실 피조물 된 우리 입장에서 그 정도만으로도 너무나 과분한 복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보다 훌쩍 더 나아가 감당 못할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당신의 아들, 딸로 삼으신 것입니다. 


부모에게 있어 이웃집의 착하고 예쁜 아이와 우리 집 얄미운 자녀의 차이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부모로서의 무한한 사랑의 대상이 되느냐 그렇지 않느냐 입니다. 옆집 아이가 아무리 사랑스러워도 그 아이를 위해 모든 걸 희생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아들, 딸로 부르시고 모아들이십니다. 그렇기에 그분의 말도 안 되는, 우리를 향한 바보 같은 십자가 사랑이 가능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군악대에서 군 복무를 했습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일과는 각종 군 행사 때 사용할 행진곡을 연습하는 일이었습니다. 특별히 제가 근무했던 부대의 사령관은 무려 별을 네 개나 달고 계신 분이었기에 그분이 참석하시는 행사 전날에는 매우 긴장하며 악보를 외웠습니다. 그리고 그런 날에는 평소 좀처럼 연습실에서 뵙기 힘들었던 군악대장님이 손수 연습을 지도하시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매우 인상적인 일이 있었는데, 군악대장님께서 자신의 초등학생 외동딸을 데리고 연습실에 찾아오셨습니다. 급한 사정으로 딸을 맡아둘 곳이 딱히 없어서 그러셨던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무척 근엄한 얼굴로 지휘봉을 움직이며 늘 그러했듯이 저희 부대의 연주를 마음에 안 들어 하며 인상을 찌푸렸습니다. 그러다 결국 참지 못하시고 목소리를 높이시며 저희 부대원들을 크게 꾸짖었습니다. 그리고 잠깐 정적이 흘렀는데 그 때 전혀 예상하지 못한 목소리가 연습실 한 쪽에서 툭하고 튀어 나왔습니다.


"아빠! 너무 심한 거 아니야?"

바로 군악대장님의 어린 딸, 주희의 앳된 목소리였습니다. 그러자 의외로 딸바보였던 군악대장은 평소 보기 힘든 멋쩍은 미소를 보이셨고, 저희들은 일시에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그리고 그 덕에 나머지 연습을 무난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번 생각해 볼 부분이 있습니다. 그 날, 그 곳에서 군악대장님의 말과 행동을 "너무하다."고 생각한 사람은 비단 주희만이 아니었습니다. 그 자리에 있었던 모든 부대원들이 똑같이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연습 도중에 대장님을 향해 부대원 중 한 명이 주희와 똑같은 어투로, 그것도 이등병이 자리에서 일어나 "대장님! 너무 심한 거 아니에요?" 라고 말한다면 그 병사는 어떻게 될까요? 최소 영창은 기본이고 나머지 군 생활은 분명 어둠의 연속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같은 말을 주희가 했을 때는 전혀 불이익이 없었고 오히려 마음이 풀어졌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바로 사랑하는 "딸"이 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부모님과 아들, 딸들 사이의 관계의 신비가 담겨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했다면 얼마든지 불쾌할 수 있는 동일한 말과 행동이라도 아들, 딸이라면 도리어 미소 짓게 만듭니다. 심지어 자녀들의 그 어떤 그릇된 잘못도 너그러이 품어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바로 부모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우리를 당신의 아들, 딸로 삼아 주시며, 진정한 아버지가 되어 주심을 말씀을 통해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랍고 위대한 은혜입니까? 더욱이 우리는 본문 속 이스라엘의 상황을 다시금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왜 그들을 바벨론에서 다시 불러 모으셨을 까요?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하나님을 대항하고 그분의 뜻을 업신여겨 받은 심판으로 나라를 잃고 포로가 되어 뿔뿔이 흩어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 말씀에서 당신의 백성들을 사랑하는 아들딸로 여기며 불러 모으신 하나님의 모습 이면에는 당신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무시하는 인간의 어리석음과 죄악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한없이 사랑하시는 까닭은 절대로 우리가 사랑 받음직해서가 아닙니다. 너무도 어리석고 부족하지만, 사랑받을 이유가 전혀 없는 죄와 폭력으로 가득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당신 곁으로 불러 모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거니는 인생의 여정은 곧 우리가 언제 어느 곳을 지나든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곁으로 나아가는 길 위에 있음을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따라서 그 어떤 순간에도 "두려워 하지 말라" 이르시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시며 담대히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모두 정착민이자 유목민입니다. 그리하여 일생을 교만과 불만, 편안과 불안 사이를 혼란스레 오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두려움 가운데 우리의 창조주이시고 신실한 인도자이시며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어디를 지나든지 주님의 피조물이자 자녀 된 기쁨과 감사를 안고 삶의 여정을 이어가는 모두가 되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기도 : 우리를 지으시고 아들, 딸로 불러 모으시며 날마다 안전하게 인도하시는 하나님.

우리의 삶은 정착을 뛰어넘는 나그네 길임을 명심하며 항상 주님과 함께 걷게 하여 주시옵소서. 온갖 물과 불의 위협 속에서도 쉽게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말게 하시고 우리를 지으시고 당신 곁으로 이끄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그 모든 두려움을 이길 용기를 얻게 하여 주시옵소서.
어디를 지나든지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봉헌: 아버지 하나님

한 주간도 우리의 두려움을 물리쳐 주시고 어느 때, 어느 곳이나 항상 함께 하신 은혜를 높여 찬양하며 구별한 예물을 드립니다. 기쁘게 받으시어 염려와 불안으로 고통당하는 당신의 자녀들을 위해 사용하여 주시길 구합니다.
예담 청년들의 몸과 마음을 늘 건강히 지켜 돌보아 주시길 기도합니다. 특별히 인생길 가운데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괴로워하며 고민하는 청년들, 지금 내가 준비하는 방향이 맞는 것인지 혼란스러워 하는 청년들, 용기와 희망을 잃고 좌절하는 청년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고 주님의 돌보심과 이끄심 가운데 힘을 얻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보냄의 말씀

목사: 사랑하는 여러분 평안히 돌아가십시오. 복음의 말씀을 들었으니 두려워 말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십시오. 어디를 지나든지 항상 함께 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늘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회중: 아멘. 주님의 이끄심을 참으로 신뢰하지 못하고 무의미한 두려움과 걱정에 사로잡히곤 했던 믿음 없음을 회개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창조주이시고 인도자 되시며 아버지이심을 언제나 잊지 않고 살아가겠습니다. 주님! 저희가 어디를 지나든지 주님께로 향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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