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2월 8일 수요일

사무엘하 6장 12-23절 “그 날, 미갈이 창밖을 내려다보았을 때”

오순절 후 열 번째 주일, 2016년 7월 24일, 부산진교회 청년예배설교
사무엘하 6장 12-23절 “그 날, 미갈이 창밖을 내려다보았을 때”

12 어떤 사람이 다윗 왕에게 아뢰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궤로 말미암아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 한지라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올라갈새 13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가매 다윗이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리고 14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그 때에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 15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환호하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오니라 16 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그를 업신여기니라 17 여호와의 궤를 메고 들어가서 다윗이 그것을 위하여 친 장막 가운데 그 준비한 자리에 그것을 두매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리니라 18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 드리기를 마치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백성에게 축복하고 19 모든 백성 곧 온 이스라엘 무리에게 남녀를 막론하고 떡 한 개와 고기 한 조각과 건포도 떡 한 덩이씩 나누어 주매 모든 백성이 각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20 다윗이 자기의 가족에게 축복하러 돌아오매 사울의 딸 미갈이 나와서 다윗을 맞으며 이르되 이스라엘 왕이 오늘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 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 그의 신복의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하니 21 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그가 네 아버지와 그의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를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22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 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한지라 23 그러므로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그에게 자식이 없으니라


오늘 본문 말씀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뜨거웠던 축제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전쟁 중에 빼앗긴 법궤를 되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법궤 혹은 언약궤로 불리는 그 아카시아 나무상자는 현대인들의 눈에는 별거 아닌 걸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 언약궤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소중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의 “함께 하심”입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께서 언제 어디서나 함께 계신다는 진리를 너무나 당연히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다윗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들 역시 하나님께서 온 세계를 “다스리심”은 분명히 믿었습니다. 대신, 주님께서 “계시는 곳”은 법궤를 중심으로 한 성막으로 제한적인 이해를 가졌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있어 법궤는 주님의 강력한 임재와 도우심을 명확히 드러내는 상징 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집트 탈출과 광야 여정을 비롯한 이스라엘의 여러 굴곡진 역사 가운데 이 언약궤는 그들의 민족과 신앙의 정체성에 깊이 맞닿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소중한 법궤를 엘리 제사장 시절에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패하며 그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무려 100년 가까운 기나긴 시간을 언약궤 없이 지내야 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로서는 하나님과의 단절과 버림받음을 의미하는 매우 비참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에도 숱하게 겪은 전쟁과 국가 분열 등 각종 위기와 마주하며 그들은 그 무엇보다 언약궤의 귀환을 간절히 고대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님의 은혜가운데 그 고통스러운 나날을 마치고 하나님의 궤가 다시 이스라엘의 중심인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 때 그들이 얼마나 감격스러워 했을지, 앞서 살펴본 맥락 속에 우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 민족 전체는 그날, 주저 없이 기쁨의 축제를 즐겼습니다.


이때, 그런 축제의 중심에 선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다윗입니다. 그는 평민의 아들로 태어나 천대받는 목동으로 자랐지만 주의 종 사무엘을 통해 기름부음 받고 왕이 되어 폭군 사울의 통치를 매듭지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그는 민족의 영웅으로서 충분한 자격을 갖추었는데 거기에 더해 법궤를 다시 찾아오는 결정적인 업적을 이루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날 백성들의 환호를 한 몸에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본문 말씀은 이 때 그가 보여준 특이한 행동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다함께 14-15절 말씀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14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그 때에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 15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환호하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오니라

다윗은 그 장엄한 법궤 귀환의식을 치르며 근엄하게 가마 위에 앉아 무게를 잡고 있지 않았습니다. 백성들과 함께 기쁨의 함성을 지를 뿐만 아니라 힘을 다하여 주님 앞에서 춤을 추었습니다. 여기서 ‘춤을 추다’로 옮긴 히브리어 <므카르케르>는 구약 전체에서 단 두 번, 본문에서 다윗의 춤을 묘사할 때만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이 때 그가 춘 춤이 그만큼 일반적이지 않은, 굉장히 신선한 충격을 그날 함께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 안겨주었음을 의미합니다.

이어서 본문은 또 다른 중요한 인물을 등장시킵니다. 바로 다윗의 아내이자 사울의 딸인 “미갈”입니다. 그녀가 창 밖 너머로 다윗의 춤을 목격하고 어떤 마음을 가졌는지 16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16 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그를 업신여기니라

본문은 이때 미갈의 마음을 한 단어로 묘사합니다. 그것은 바로 “업신여김”입니다. 더 정확히 옮기자면 “경멸”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이런 자신의 생각을 그저 속으로만 품지 않고, 다윗에게 노골적으로 드러내었습니다. 본문 20절을 보면 왕궁으로 돌아온 다윗을 향해 미갈은 다음과 같이 쏘아 붙입니다.

20 다윗이 자기의 가족에게 축복하러 돌아오매 사울의 딸 미갈이 나와서 다윗을 맞으며 이르되 이스라엘 왕이 오늘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 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 그의 신복의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하니

이처럼, 왕의 권위와 체면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고 온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열정적인 춤을 춘 다윗과 그런 그를 향해 냉소와 비난을 퍼부은 미갈은 철저한 대조를 이룹니다. 그래서 오래 시간 많은 사람들이 이 본문 말씀을 인용하면서 다윗의 뜨거운 믿음은 칭찬하고, 반대로 미갈의 차가운 불신앙은 질책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이와 같은 그 둘에 대한 찬사와 정죄가 과연 타당한지를 되물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며 익숙한 해석과 잠깐 거리를 두고 ‘낯설게’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특별히 성경을 기록, 편집한 이들과 오랜 시간 해석을 독점한 이들이 남성들이었다는 사실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유독 여성에게 가혹하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정말 다윗은 후대에 영원토록 높임받기 합당한 인물이고, 그와 달리 미갈은 잘못된 신앙의 표본으로 무시당하는 것이 옳은지를 말씀에 근거해 신중하게 따져 물어야 합니다. 

물론 그렇다 해서 본문에 등장하는 다윗의 춤이 불순한 의도를 가진 정치적인 쇼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의 진정성 자체는 충분히 인정합니다. 또한 미갈의 말과 행동이 분명 미성숙하고 부적절했다 것도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이 둘의 모습을 함부로 판단하기 전에 그 두 사람의 지난 이야기를 한 번 되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시간을 거슬러 다윗이 이제 왕이 되기 직전의 상황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처참하게 목숨을 잃은 후 온 나라는 거대한 혼란에 사로잡혔습니다. 사울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이스보셋이 왕으로 즉위하긴 했지만 이미 상당수 민중들로부터 다윗이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까닭에 민족이 둘로 나뉘어져 팽팽한 긴장과 갈등이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런 혼잡한 상황 속에서 과거 사울왕의 군사령관이었고, 현재 이스보셋 왕을 등에 업고 실질적인 권력을 휘두르고 있던 장군 아브넬은 굉장히 예리하고 정확한 정치적 판단을 내립니다. 그것은 이미 백성들에게 굉장한 신뢰를 얻고 있고 또한 점점 더 힘을 더해가고 있는 다윗이 언젠가 왕이 되는 일은 이제 시간문제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스보셋과의 갈등을 계기로 주저 없이 전령들을 다윗에게 보내 “협상”을 제의합니다. 그리고 그 못지않은 탁월한 정치 감각을 지닌 다윗 역시 이를 즉각 수락하였습니다. 다윗으로서는 끔찍한 내전을 더 이상 연장하지 않고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 온 백성이 열망하는 통일 국가를 이루는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때 협상을 시작하기 위한 조건으로 아브넬을 향해 다윗이 제시한 요구가 무척 흥미롭습니다. 국가권력을 나누는 대가로 그가 제시한 조건은 상식적으로 예상하듯이 많은 전리품이나 강력한 왕권이 아니었습니다. 다름 아닌 한 여자 ‘미갈’ 이었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지금 이 협상은 한가로운 수다를 나누는 자리가 아닌 매우 민감한 정치, 군사적 주제를 논의하는 긴장감 넘치는 상황입니다.

바로 이와 같이 엄중한 역사적인 순간에 다윗은 뜬금없이 불쑥 자신이 빼앗긴 첫 번째 부인을 달라고, 한 때 자기에게 칼을 겨누었던 상대편에게 요청하였습니다. 물론 이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닙니다. 사무엘상 18장 17절 이하의 기록에 따르면 다윗은 사울왕의 둘째 딸인 미갈을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무려 200명이나 되는 블레셋 군인들을 무찔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 아내 미갈은 자신의 젊음과 목숨을 걸고 얻은 소중한 여인이었습니다.

게다가 미갈 역시도 아버지와 남편 사이의 목숨을 건 대립 속에서 딸의 도리를 저버리고 헌신적으로 다윗을 도왔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비극적 상황 속에서 다윗과 미갈은 그 누구보다 애틋한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결국 사울에 의해 도망자 신세가 되어 아내와 생이별을 하였을 때, 다윗의 마음 깊이 사무쳤을 설움과 슬픔은 분명 어마어마하였을 겁니다.

그러므로 그가 마침내 그 모든 험난한 시간을 마치고 왕권을 차지하기 앞서 미갈을 다시 원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지나온 자신의 시련을 그녀를 통해 보상을 얻는 것은 물론이고 또한 왕비의 자리에 앉히며 그동안 미갈에게 진 신세를 보답할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아직 남아 있는 사울을 추종세력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정치적인 이득도 기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때 다윗이 함부로 무시했던, 그러나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녀가 이미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옛 사랑을 되찾고자하는 욕망에 눈 먼 다윗과 그런 그의 수하에 들어감으로써 정치적 기득권을 계속 유지하고 싶어 했던 아브넬, 이 두 남자의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결정으로 말미암아 그녀는 또다시 권력에 의해 가정이 파괴되는 고통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미 허수아비 왕에 지나지 않았던 이스보셋은 아브넬로부터 전해들은 다윗의 요구사항을 들어주기 위해 자신의 누이 미갈에게 군사들을 보냈습니다. 이 장면을 묘사한 사무엘하 3장 15-16절을 공동번역 성경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이스보셋이 사람을 보내어 라이스의 아들 발티엘에게서 미갈을 빼앗아 오는데, 그의 남편은 바후림까지 울면서 따라오다가 아브넬이 돌아가라고 하자 하는 수 없이 돌아갔다.” 

저는 성경 속의 이 단락을 읽을 때마다 매번 가슴이 미어지곤 합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지만 엄격한 남성우월주의가 만연한 고대 서아시아 사회에서 남자의 눈물은 분명 수치였습니다. 그러나 미갈의 두 번째 남편 발디엘이 사랑하는 아내를 빼앗는 부당한 공권력에 맞서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은 그저 울면서 아내를 멀리 배웅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장면을 끝으로 그는 더 이상 성경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 때 그러한 남편을 바라보는 미갈의 내면은 어떠했을까요? 이제 왕비가 되어 어린 시절 누렸던 화려한 궁중생활을 다시금 즐기게 된다는 사실에 기뻐했을까요? 분명 그렇지 않았습니다. 다윗과의 힘겨운 사랑이 아버지에 의해 억지로 중단되고 이제 다시 마음을 주고 함께 삶을 이어가는 또 다른 남편 발디엘이 그토록 비참한 모습으로 자기를 따라오는 것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잔인한 현실이 그녀를 절망하게 하였음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성경에 명확히 기록되어 있진 않지만 어쩌면 그 동안 둘 사이에 자녀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 어린 것들을 두고 떠나야 하는 심경 역시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을 겁니다. 그렇기에 그때 그녀의 마음에는 다윗을 향한 증오로 가득차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어떻게 보일지 몰라도 그녀에게 있어 지금 다윗은, 자신의 삶에 비극만을 안겨주고 허무하게 생을 마감한 아버지 사울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은 비록 성경에 짧게 기록되었지만 한 가정을 무참히 파괴하였다는 점에서 저는 본문 뒤에 나오는 ‘밧세바’ 사건 못지않게 하나님 앞에 극악한 죄가 분명 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또 다른 문제를 낳았습니다. 도피 생활 동안 그 역시 이미 여러 아내를 통해 많은 자녀를 두었습니다. 권력자의 축첩을 당연시 하는 당시, 고대 중동의 문화와는 달리 주 하나님께서는 분명 율법을 통해 이스라엘 왕들에게 ‘아내를 많이 두지 말 것’을 엄중히 경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럼에도 또 다른 여자를, 그것도 권력을 이용해 억지로 자신 곁에 두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때, 다른 아내들뿐만 아니라 그들을 통해 얻은 자녀들이 무엇을 느꼈을까요? 그것은 두 말 할 것도 없이 가슴깊이 타오르는 뜨거운 배신감과 질투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분노는 그들 사이에 파묻혀 살아가야 했던 미갈에게 더욱 무거운 삶의 짐이 되었음이 분명합니다.


이제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날, 소란스러운 사람들의 함성과 악기 소리에 창밖을 내려다 본 미갈의 눈에 다윗이 보였습니다. 웅장한 축제 행렬 속에서 그는 참을 수 없는 희열에 도취되어 그 무엇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흔들며 자신의 신앙 열정을 공개적으로 발산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모습을 창문 너머로 지켜본 미갈의 마음은 과연 어떠했을까요? 그녀에게도 다윗이 다른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민족적 영웅이자 위대한 신앙의 주인공으로 보였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눈에 다윗은 그저 자신의 욕망을 위해 가까운 이들의 소소한 행복을 무참히 짓밟은 위선적인 폭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미갈은 위험을 무릅쓰고 거침없이 다윗을 비난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본문 23절에 기록된 바와 같이 그 이후로 다윗에게 버림받고 자녀를 갖지 못한 채 쓸쓸하게 삶을 마감하였습니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다시 말씀드립니다. 저는 이 때 다윗이 보여준 뜨거운 신앙 자체를 부정하려는 게 아닙니다. 성경에 기록된 그의 위대한 업적을 부인할 생각도 전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본문 속 미갈의 말과 행동이 옳았다는 말씀을 드리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다만 그녀를 쉽게 “나쁜 여자”로 몰고 가기 전에 그녀에게 저질렀던 다윗의 폭력과 오만을 돌이켜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는 지난날 그의 끔찍한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저마다의 미갈을 가슴 속에 품고 살아갑니다. 우리 모두는 각자 돌이키고 싶은 과거의 후회와 아쉬움을 간직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때때로 다윗처럼 무모하고 어리석은 집착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지난날에 발목 잡혀 오늘의 소중함을 잃어버리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우리 곁에 두신 고마운 사람들과 소중한 일상을 함부로 여길 때도 종종 있습니다.


한 때,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가두던 고통스런 과거를 가졌던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 복음을 온 몸으로 맞아들이며, 로마교회를 향해 다음과 같이 편지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을 압니다.”(롬 8:28, 새번역 성경)

사랑하는 여러분, 최근 꾸준히 리메이크 되는 아름다운 노래의 가사처럼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걱정 말아요 그대”, 들국화). 그러므로 이미 지나간 시간들로부터, 그 때의 모든 후회와 좌절들로부터 벗어나 여러분의 마음을 끊임없이 괴롭게 했던 저마다의 미갈을 이제는 놓아 주길 바랍니다.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 속에서 그 모든 과거들은 결코 허무한 절망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새롭게 하는 희망의 도구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신실한 사랑을 늘 신뢰하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뜨거운 신앙을 사람들 앞에 과시 하기 이전에, 그 모습이 가장 가까이 있는, 또 다른 “미갈”들에게 적어도 “가증스럽게” 보이지 않도록 스스로를 부단히 돌보고 가다듬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열정을 기뻐 받으시며 동시에 진솔한 삶의 예배를 더욱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주님께서 날마다 이루시는 선한 뜻을 온 몸과 마음을 다해 신뢰하고 더 이상 과거가 아닌 오늘을 살아가며 내일을 은혜 가운데 맞이하는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시는 하나님
주님께서 날마다 행하시는 새 일을 올바로 믿지 못한 채, 과거에 사로잡혀 어리석은 판단으로 우리 자신과 이웃을 힘들게 하곤 하였습니다. 저마다의 미갈들과 화해하며 그들을 이제 마음에서 떠나보내길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계획하신 앞날들을 더욱 감사함으로 맞이하길 소원합니다. 그리하여 화려한 열정을 내세우기보다 주어진 일상을 보다 소중히 가꾸는 주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모든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선하게 이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봉헌기도 
삶의 주인 되신 하나님
우리를 보이는 대로 보지 않으시고 지나온 모든 시간들을 아시며 앞날을 희망 가운데 열어주시는 위대한 은혜를 높여 찬양하며 한 주간 구별하여 준비한 예물을 드립니다. 이 예물을 받으시어 하나님의 뜻이 일상가운데 튼튼히 뿌리내리는 일에 소중히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예담 청년들을 아프고 괴롭게 하는 지난날의 기억들로부터 속히 벗어날 수 있는 치유를 허락해 주시고 곁에 있는 이들로부터 신뢰를 쌓아가는 삶의 지혜를 허락해 주시옵소서. 지치고 절망할 때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지 않게 하시고 주님으로 말미암는 참된 능력으로 새 힘 얻게 하시며 발걸음 내딛는 곳곳마다 진정한 기쁨과 희망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보냄의 말씀
목사: 사랑하는 여러분 평안히 돌아가십시오. 복음의 말씀을 들었으니 지난날의 모든 후회와 실패를 하나님께 맡기고 삶의 예배를 진솔하게 드리며 살아가십시오. 우리의 모든 하루하루를 품으시는 주님께서 가장 합당한 은혜의 길을 펼쳐 보여주십니다.

예담: 아멘! 과거에 대한 잘못된 집착으로 오늘을 소중히 여기지 않았음을 뉘우칩니다. 사람들 앞에 열정적인 몸짓으로 신앙을 드러내기 전에 가까이 있는 이들의 아픔을 먼저 헤아리며 살아가겠습니다. 주님! 우리 마음의 중심을 바르게 붙잡아 주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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