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2월 9일 목요일

빌레몬서 1장 8~19절 “가시 없는 고슴도치의 사랑”

대림절 두 번째 주일, 2016년 12월 4일, 부산진교회 청년예배, 정대진 목사
빌레몬서 1장 8~19절 “가시 없는 고슴도치의 사랑”

8 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아주 담대하게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도 있으나 9 도리어 사랑으로써 간구하노라 나이가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10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11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12 네게 그를 돌려 보내노니 그는 내 심복이라 13 그를 내게 머물러 있게 하여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14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 것도 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 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라 15 아마 그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너로 하여금 그를 영원히 두게 함이리니 16 이 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17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역자로 알진대 그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18 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 19 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 네가 이 외에 네 자신이 내게 빚진 것은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 


어느 몹시 추운 겨울날 몇 마리의 고슴도치가 있었습니다. 추위에 떨던 고슴도치들은 이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서로에게 가까이 다가가 각자의 체온으로 냉기를 이기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고슴도치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지면 질수록 따뜻한 온기 보다 무엇이 몸에 먼저 닿았을까요? 그것은 바로 서로의 몸에 있는 가시였습니다. 그래서 고슴도치들은 “아야!”하고 외치며 깜짝 놀라고 아파하면서 떨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금세 그들은 다시금 추위에 부들부들 떨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방금 전의 아픔은 잊은 채 다시 서로에게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그러나 또 다시 조금 전처럼 서로의 가시에 찔려서 아파하며 떨어졌습니다. 그렇게 고슴도치들은 추운 겨울날 매서운 바람 속에서 서로 가까이 갔다 멀어지는 것을 반복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아마 한번쯤은 들어보셨을 겁니다. 제가 지어낸 것이 아니라 독일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자신의 저서에 남긴 “고슴도치의 딜레마”(Hedgehog's Dilemma) 혹은 “고슴도치의 진퇴양난”으로 불리는 유명한 비유입니다. 그는 이 이야기를 통해 사람들 사이의 본질적인 관계에 대하여 말하고 싶어 했습니다. 

사람들은 외로워하면서 끊임없이 누군가와 함께 지내길 원합니다. 그래서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아 기릅니다. 그 외에도 여러 모임에 속하며 동질감과 소속감을 가지려 애를 씁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가까운 다른 이들과 원치 않게 상처를 주고받으며 때때로 혼자만의 시간을 원하기도 합니다. 쇼펜하우어는 바로 이와 같은 사람들의 모습을 두고 한 겨울의 고슴도치들에 비유해 이야기 하였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 말씀에는 그러한 고슴도치들과 비슷한 모습의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로 오네시모와 빌레몬입니다. 이 두 사람은 본래 매우 가깝게 지내던 사이였습니다. 왜냐하면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노예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네시모는 언제든지 빌레몬이 부르면 달려 나와서 그가 시키는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인 빌레몬은 자신의 종인 오네시모에게 삶의 많은 부분을 의존하였고 마찬가지로 오네시모는 자신의 생존과 생활을 빌레몬에게 의지하며 가까이 지냈습니다. 그 외에도 빌레몬서에 담긴 여러 정황상 이 두 사람은 신분을 넘어선 상당한 신뢰와 친밀감도 쌓은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 어떤 과정으로 벌어진 일인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노예 오네시모는 자신의 주인 빌레몬의 돈을 훔쳐 달아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며 도망자 생활을 하다가 우연히 감옥에서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바로 바울입니다.

그는 바울과 이러저러한 얘기를 나누다가 실은 자기가 도망친 노예라는 사실을 솔직히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주인 빌레몬에게 다시 돌아가고 싶지만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매우 신비하고 놀라운 인연이 드러납니다. 빌레몬은 바울을 무척 존경하고 따르는 신자였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오네시모가 처한 곤란함을 해결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바울은 지금 갇힌 상황이었기 때문에 오네시모를 데리고 빌레몬에게로 가서 직접 화해를 시켜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방법이 바로 빌레몬에게 편지를 써서 이제 막 출옥한 오네시모를 통해 전달하는 것이었어요. 그 편지가 바로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빌레몬서’입니다. 

이 편지는 오늘 우리에게 전해진 바울의 편지 중에 가장 짧고 개인적인 글입니다. 그래서 그의 다른 편지들과는 달리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대해,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찌 보면 성경에 포함시키기에는 적절치 않은 사소한 글로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초기 교회가 이 편지를 성경 중 하나로 인정한 이유는 바울이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를 말과 글로만 떠든 사람이 아니라 삶으로 직접 어떻게 전했는지가 이 안에 잘 나타나 있기 때문입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바울의 눈물겨운 생생한 헌신과 섬김이 가장 뚜렷이 녹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오네시모와 빌레몬 이 두 사람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섬겼을까요? 

첫 째로, 바울은 겸손으로 그들을 섬겼습니다. 다함께 본문 8-10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8 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아주 담대하게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도 있으나 9 도리어 사랑으로써 간구하노라 나이가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10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8절을 보면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아주 담대하게’ 빌레몬을 향해 마땅한 일로 ‘명할 수 있다.’고 적고 있습니다. 이를 공동번역성경은 “아무 거리낌 없이 명령할 수도 있습니다.”라고 옮겼습니다. 그 이유가 9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가 빌레몬 보다 나이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당시 노년의 바울은 빌레몬을 비롯한 그 시대 많은 교인들로부터 큰 존경을 받는 어른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실한 신자인 빌레몬은 신앙의 거장인 바울이 어떤 말을 하건 무조건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바울은 얼마든지 빌레몬에게 “야! 오네시모 잘 봐줘라!” 이렇게 간단히 명령하듯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한들 그 누구도 문제 삼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대신 사랑으로, 정 반대의 행동을 하였습니다.

10절 말씀을 보면 바울은 오네시모를 아들 같이 여기며 그를 위하여 빌레몬에게 ‘간구’하였습니다. 이 때 “간구”로 옮긴 헬라어 단어는 마가복음 5장 23절에서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 앞에 엎드려 자신의 사랑하는 딸을 살려달라고 할 때, ‘간곡히 구하다’는 말과 같은 단어입니다. 이렇게 바울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음에도, 다른 사람도 아닌 비천한 노예의 자유롭고 평안한 삶을 위해 마치 아버지가 죽어가는 딸을 살리기 위해 애쓰듯 자신의 나이와 지위를 내세우지 않고 겸손하게 빌레몬을 섬겼습니다.

간절히 바라기는 이러한 바울의 겸손을 본받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것을 위해 다짐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모든 사람들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권위와 힘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가장 쉬운 예로 자기보다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함부로 무시하거나 가르치려들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자기보다 학력이 낮다고 해서 생활환경이 더 어렵다고 해서 함부로 소외시키거나 섣불리 동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대신 바울처럼, 당연한 것을 당연히 여기지 말고 기꺼이 더 낮아지고 겸손히 상대를 높일 때 우리가 위대한 복음의 통로가 된다는 사실을 늘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둘째로, 바울은 자신이 가진 소유로 그들을 섬겼습니다. 다함께 본문 18, 19절 말씀 다같이 읽겠습니다.

18 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 19 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 네가 이 외에 네 자신이 내게 빚진 것은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

18절 말씀을 보면 바울은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서 훔쳐 간 돈을 자기 앞으로 계산하라고 편지 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이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 19절에 자기가 ‘친필로 썼다’고 밝힌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의 의미를 정확히 깨닫기 위해 이 때 바울이 처한 상황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는 나이가 많고 몸이 안 좋아서 편지를 직접쓰기 어려워서 대필해주고 있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내가 갚으려니와”라는 이 문장에 담긴 자신의 진심을 빌레몬에게 분명히 전달하기 위해 비록 기력이 쇠하여 볼품없는 글씨이긴 하지만 그 구절만큼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기가 직접 썼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빌레몬이 앞서 바울에게 빚진 것을 잊어버리겠다고, 탕감해주게다고 까지 약속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6장 21절을 보면 예수님은 “보물이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무엇에 마음을 두고 애정을 담고 있는지를 확인해 보려면 그가 어디에 돈을 쓰고 있는지를 봐야한다는 매우 예리한 지적입니다.

실제로 제 주위에도 취미생활에 많은 돈을 쓰는 사람들을 적지 않게 보았습니다. 가령 음향장비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은 고급 오디오세트와 스피커를 구입하는 일에 상당히 많은 돈을 쓰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사진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비싼 카메라와 렌즈를 구입하기 위해 다른 지출을 무척 아끼는 경우도 자주 접합니다. 저의 경우 야구를 무척 좋아해서 야구장에 가거나 제가 응원하는 팀과 관련된 용품들을 구매하는 일을 즐겨 하였습니다.

이것은 사람 대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 다른 어떤 사람에 대한 애정을 가늠할 때 다른 것을 볼 필요가 없습니다. 그를 향해 돈을 어떻게 쓰는지를 보면 됩니다. 단순히 액수를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 안에서 얼마나 아낌없이 돈을 지불하는 지를 지켜보면 그의 진심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에게 있어 돈이란 그저 교환수단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노력과 자존심과 인격이 담긴 결정체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고 섬긴다고 말하면서 정작 자기의 돈을 그 사람을 위해 전혀 쓰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당시 동물처럼 취급받는 노예 오네시모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돈마저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가진 소유를 하나님과 이웃들을 위해 더욱더 기꺼이 나누는 모두가 되었으면 합니다. 단지 헌금을 많이 하고 기부를 여러 번 하는 것을 말씀드리려는 게 아닙니다. 우리 손에 들려진 모든 것들은 절대로 우리의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주님께서 은혜 가운데 맡겨주신 것임을 늘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자기 자신과 가족의 배를 불리려는 것에만 관심을 두지 말고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머무는 곳이 어디인지를 항상 진지하게 살피며 그곳을 향해 자신의 소유를 기꺼이 아끼지 않는 삶의 태도를 늘 가다듬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이렇듯 바울은 빌레몬과 오네시모, 이 두 사람을 위해 겸손히 자신의 소유를 아끼지 않고 그들을 섬겼습니다. 그 결과 서로에게 상처를 남기고 멀리 떨어져있던 그들은 더 이상 주인과 노예가 아니라 주님 안에서 한 형제가 되었습니다.

만약 바울이 없었다면 오네시모는 끊임없이 불안함에 떨면서 도망 다녀야 했을 겁니다. 또한 빌레몬 역시도 평생 오네시모를 증오하며 상처에 시달려야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이 그 두 사람 사이에서 그들을 위해 참되고 아름다운 섬김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마치 멀리 떨어져서 추위에 떨고 있는 두 마리의 고슴도치와 같았던 오네시모와 빌레몬을 끌어안고 그들을 다시 가깝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어떻게 그런 놀라운 섬김을 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그가 먼저 자신을 향한 예수님의 위대한 섬김을 경험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네시모와 빌레몬, 그 두 사람 사이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과 사람들은 서로 한 없이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지으시고 너무도 큰 사랑으로 함께해 주셨지만 사람들은 죄를 지으며 주님께 반역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 없는 상실과 고통으로 괴로워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가만히 계시지 않으시고 몸소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참 사람으로 이 땅을 살아가며 늘 약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겸손히 섬기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시며 당신께서 소유하신 모든 생명을 죄인들을 위해 내어놓으시고 그 섬김을 완성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 섬김을 통하여 마침내 죄로 인해 멀리 떨어져있던 하나님과 사람을 다시금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바울은 옛날 자신이 앞장서서 예수님과 교회를 핍박하였음에도 그런 자신에게 먼저 찾아오신 하나님의 위대한 부활과 사랑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역시 그 사랑을 가슴에 품으며 다른 사람들을 섬길 때 사람과 사람 사이의 미움과 갈등 또한 무너지는 것을 믿고 경험하게 되었었습니다. 바울이 그 믿음으로 오네시모와 빌레몬을 섬겼을 때 마침내 그 둘 역시 하나 되어 하나님 나라를 함께 기쁨으로 이루고 누리게 되었습니다.


설교를 시작하며 성도님들께 딜레마에, 진퇴양난에 빠진 고슴도치들의 이야기를 들려드렸습니다. 쇼펜하우어는 그 이야기를 통해 사람들은 끊임없이 서로 상처주다가 멀어지고 그리고 외로워서 가까워지려 하지만 또다시 멀어지는 것을 고통스럽게 반복할 수밖에 없는 처절한 숙명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두 고슴도치가 영원히 따뜻하게 함께하는 법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가시가 없는 다른 고슴도치가 그 가운데에서 두 고슴도치의 가시를 견뎌내고 기꺼이 피를 흘리며 그 둘을 끌어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와 같은 분이심을 결코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가시처럼 남을 찌르는 죄의 열매가 전혀 없는 분이셨지만 날카로운 가시와도 같이 매섭고 차가운 십자가의 고통을 기꺼이 짊어지시고 죽임 당하셨습니다. 바로 그 십자가 덕분에 우리는 더 이상 죽음 가운데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는 비참함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생명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시 없는 고슴도치로 사람들 사이에 오셔서 그 사랑을 경험하게 하신 까닭을 늘 명심해야 합니다. 그것은 거친 세상 속에서 여러 모양의 온갖 매서운 추위에 벌벌 떨면서 끊임없이 서로가 서로를 계속 찔러대는 비극을 멈추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 되는 따뜻한 세상을 만들어 나가는 것입니다.

물론 죄 많은 우리는 예수님처럼 전혀 가시가 없는 존재가 될 수는 없습니다. 대신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마음 깊이 품으며, 우리가 가진 가시의 길이를 더욱 짧게 하고 그 끝을 좀 더 뭉툭하게 만들 수는 있습니다. 그리하여 때때로 찢어질 듯이 아픈 가슴으로 피를 흘리더라도 다른 이들의 가시를 품고 이겨내시길 바랍니다. 곁에 있는 이들의 약한 모습들과 미숙한 말과 행동에 대해 곧바로 질책하고 화를 내기 보다는 좀 더 품어내시길 바랍니다. 그제야 비로소 하나님 나라의 온기를 이 세상 가운데 조금 씩 더욱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이 시대의 바울을, 오늘날 평화의 일꾼을, 바로 우리 가운데서 찾고 계십니다. 성탄절을 맞이하는 거룩한 대림절을 보내며, 이 땅에 가시 없는 고슴도치로 이미 오셨고 또한 다시 오실 주님을 더욱 간절히 기다리며 그러한 부르심에 순종하길 원합니다. 그리하여 기꺼이 겸손하게 우리의 소유를 내어드리며 이웃을 더욱 섬기고 사랑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진심으로 소망하며 축복합니다.


설교 후 기도
우리를 날마다 사랑으로 섬기시는 하나님.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주님과 우리가 다시 하나 되었듯이, 바울의 섬김을 통하여 오네시모와 빌레몬이 하나 되었듯이 기꺼이 우리가 가시가 적은 고슴도치가 되어 미움과 폭력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 참 평화를 전하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한없는 겸손과 참된 생명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하나 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봉헌기도 
우리의 모든 약함과 초라함도 기꺼이 끌어안으시는 하나님
죄인들을 향한 한없는 위대한 섬김에 감사와 찬양을 드리며 한 주간 삶으로 구별한 예물을 드립니다. 기쁘게 받으시어 이 세상에 평화를 만드는 일에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예담 청년들을 축복합니다. 마음이 시리고 외로울 때 주님께서 다가가 따스하게 안아주시옵소서. 원치 않는 예민함과 날선 태도를 누그려 뜨려 주시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평안함을 가득히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모든 앞길을 주님께 맡깁니다. 두려움과 불안함을 떨쳐내고 담대히 나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보냄의 말씀
목사: 사랑하는 여러분, 평안히 돌아가십시오. 복음의 말씀을 들었으니 겸손히 자신의 소유를 나누며 섬기는 삶을 살아가십시오. 평화의 하나님께서 당신과 사람 사이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진정한 화해를 이루어 나가십니다.

예담: 아멘! 함부로 누군가를 찌르고 원망하곤 했던 어리석음을 뉘우칩니다. 가시 없는 고슴도치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본받아 기꺼이 나누고 섬기며 끌어안는 삶을 살아가겠습니다. 주님! 따스한 온기로 날마다 우리와 동행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축도 
주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복을 주시고, 여러분을 지켜주십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얼굴을 여러분을 향해 비춰 주시고,
여러분을 은혜롭게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얼굴을 여러분을 향해 드시어, 
여러분에게 평화 주십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님의 사귐이 
저마다 가진 소유로 겸손히 이웃을 섬기는
예담 청년들과 항상 함께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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