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순절 후 아홉 번째 주일, 2016년 7월 17일, 부산진교회 청년 설교, 정대진 목사
로마서 8장 1-2, 9-11절 "생명의 성령"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여러분은 지금 자신의 모습에 만족하십니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신가요? 사람들은 누구나 정도의 차이는 있을 뿐 스스로에 대해 불만족스러운 면을 가지기 마련이어서 자연스럽게 자신이 되고 싶은, ‘내가 바라는 나’의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남들과 달리 좀 특이하게 20대 초반까지 “내가 바라는 나”는 다름 아닌 “성령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어릴 때부터 자라온 교회는 “성령 충만”을 그 무엇보다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고향교회에서 항상 “성령 충만”하면 신비한 능력이 생겨서 만능 키처럼 모든 어려운 문제들도 착착 해결된다고 배웠습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한 사람들은 늘 남들과 다르게 뭔가 특별하게 살아간다고 들으며 성장했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성령 충만해지는 방법입니다. 그것은 교회의 모든 공적 집회에 열심히 참석하고 땀이 피가 되도록 목 놓아 부르짖으며 통성기도 할 뿐만 아니라 매일 가능한 성경을 많이 읽는 등 교회를 중심으로 한 외형적 신앙생활에 전력으로 매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자란 교회는 모든 예배시간 때마다 찬송가를 박수치면서 한 곡을 두 번 이상 열정적으로 부르고 통성기도를 빠지지 않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청소년부와 청년부 의 여름, 겨울수련회는 매번 다른 프로그램은 전혀 없이 2시간씩 예배만 하루에 세 번 드리는 부흥회식으로 진행 됐습니다.
저는 이와 같은 신앙 배경 속에 어릴 때부터 그 누구보다 성령님과의 깊은 교제를 간구 했습니다. 성령님께서 가득히 저를 사로잡는다면 모든 한계와 약점을 가뿐이 극복하고 남들이 우러러 보는 멋진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 기대하면서 그렇게 그 누구보다 열심히 교회를 다녔습니다. 그래서 경쟁적으로 성경을 많이 읽었고, 지금 저의 이 굵은 목소리로 변할 정도로 군대 가기 전까지 매일 한 시간 넘게 통성기도를 했습니다. 심지어 저 때문에 신학교 근처 주민들이 민원을 빈번하게 넣을 정도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또 성경도 정말 강박적으로 많이 읽었습니다. 그러면서 때때로 정말 성령충만해진 것 같은 자기만족과 우월감도 느끼곤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렇게 제가 성령님의 강한 임재를 원하면 원할수록, 그렇게 미친 듯이 외적인 신앙 생활에 매진하면 매진할수록 저는 점점 더 다른 사람들 눈에 이상한 사람이 되어갔고 그만큼 깊은 좌절에 빠졌습니다. 또한 이것이 악순환이 되어서 그러면 그럴수록 더더욱 성령충만 해지기를 바라며 위해 몸부림 쳤고 또 그만큼 힘겨운 허무와 절망에 사로잡히는 시간들이 반복되어 갔습니다.
저는 20대 초반까지 이러한 갈등 속에서 무척이나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습니다. 다른 것을 욕심낸 것도 아니고 교회에서 배운 그대로 성령충만 하기를 그토록 애원하며 그 누구 못지않게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점점 ‘내가 바라는 나’가 아닌, 정반대로 결코 ‘내가 바라지 않는 나’가 되어가는 스스로의 모습 가운데 정말 많이도 아파하며 힘들어 했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다시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자신의 모습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따라서 여러분이 되고 싶은, 여러분이 ‘바라는 나’는 어떤 모습입니까? 그리고 혹시 그렇게 여러분이 되고 싶은 나가 되기 위해 노력하면 할수록 오히려 그것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그래서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는 자신의 모습 때문에 힘들어하지는 않으셨습니까?
우리는 오늘 함께 읽은 성경 말씀에서 그렇게 ‘내가 바라는 나’와 ‘내가 바라지 않는 나’ 사이에서 힘겹게 갈등했던 한 사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는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가말리엘”이라는 당대 최고의 스승에게서 율법을 배우며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으로 자랐습니다. 그래서 그 누구보다 율법을 열정적으로 지켰습니다.
왜냐하면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거룩함을 인정받아 구원에 이르는 길은 모세 율법 뿐만 아니라 그것에 관한 여러 규칙과 전통들을 완벽히 지키는 것이라는 신념을 철저히 간직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바울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고 기독교인들을 잡아 가두는데 온 열정을 다했습니다. 그가 보기에 율법의 권위가 아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유일한 구원의 길로 믿고 따르는 그들은 하나님을 철저히 모독하는 이단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이단인 기독교인들을 잡아 가두면 가둘수록 그는 더욱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 말씀 바로 앞 장인 로마서 7장 말씀에 따르면 바울은 그토록 열심히 율법을 지키면 지킬수록 오히려 더욱 심각한 내적 갈등에 시달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그렇게 열정어린 노력을 하면 할수록, 스스로 “되고 싶은 나”가 아닌 “그렇지 않은 나”가 되어 갔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되고 싶었던 자기 자신은 앞서 말씀드렸듯이 바리새인들의 이상대로 율법을 철두철미하게 지켜서 전혀 흠잡을 것이 없는 완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주위 사람들이 그를 아무리 거룩하게 바라보고 치켜세운다 할지라도 그는 자기 자신이 결코 율법을 완전히 지킨 결백한 사람이 아니라 때때로 죄의 법에 복종하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믿음과는 달리 모든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율법을 다 지킬 수 없는 명백한 한계를 가지고 실수와 잘못을 되풀이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분명히 그가 바라는 스스로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사실에 남몰래 무척 힘겨워 하며 지난 날, 로마서 7장 24절에 기록된 다음과 같은 탄식을 하였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런데 그런 그를 향해 다른 누구도 아닌 그가 그토록 핍박했던 예수님께서 직접 다가오셨습니다. 그것도 당신을 믿고 따르는 성도들을 체포하러 다메섹을 향해 맹렬히 달려가는 길 위에서였습니다. 그러자 마침내 바울은 예수님을 자신의 유일한 구세주로 고백하며 율법을 완벽히 지키는,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이 아닌 오직 하나님 나라의 복음만이 자신을 참으로 구원한다는 진리를 믿고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참 믿음 가운데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인 로마서 8장에서 복음의 핵심을 기록합니다. 다함께 로마서 8장 1-2절 말씀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 다른 말로 하면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온 생명을 다해 진심으로 믿고 따르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부터 절대로 버려지지 않는다는 복음의 진수를 짧은 문장 안에 압축해서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아주 흥미로운 사실이 있는데 바울은 그러한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키는 것을 가리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라고 말했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그의 다른 편지들, 특별히 고린도 전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무척 강조했습니다. 따라서 본문 2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십자가”가 “너를 해방”하였다라고 기록해도 전혀 틀린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여기서 바울은 그러한 십자가가 아닌 성령님을 언급했습니다.
바울이 여기서 십자가 대신 성령님을 말한 이유는 그가 변덕스러워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와 성령님을 결코 나뉠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절대로 그 분 혼자만의 행동이 아닙니다. 성령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로마 교회를 향해 편지하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십자가’ 대신에 “성령님”을 이야기해도 전혀 복음과 어긋나지 않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할 점이 있는데 바울은 그러한 성령님을 가리켜 ‘생명의 성령’이라고 기록했다는 사실입니다. 왜 바울은 그 많고 많은 단어들 중에 굳이 ‘생명’이라는 낱말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시는 성령님을 묘사했을까요? 그 이유를 우리는 본문 11절 말씀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함께 11절 말씀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여기서 바울은 성령님을 가리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고 영원히 멈추어 계시지 않았습니다. 만약 성경의 기록이 그것으로 그친다면 우리는 도무지 하나님을 믿을 까닭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절망과 비극을 절대로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사흘 째 되던 날에 예수님을 다시 살리시며 부활의 희망이라는 위대한 반전을 이루어 내셨습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는 그렇게 예수님을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영입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와 마찬가지로 성령님께서는 그 분의 다시 살아남에도 역시 함께 하셨습니다. 따라서 성령님은 우리에게 부활의 영, 곧 “생명의 영”이 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러한 성령님께서 우리와 늘 함께 하심을 반드시 믿으시길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날마다 짊어지는 저마다의 십자가 속에서 작은 부활들을 언제나 안겨 주신 다는 사실을 항상 신뢰하길 바랍니다. 그런 까닭에 성령님은 마땅히 “생명의 영”으로 불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로 나아가는 주님의 모든 자녀들을 부활의 생명으로 다시 살리시는 것이 바로 성령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신 가장 중요한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바울은 열정적인 율법의 실천만으로는 절대로 채울 수 없는 공허함 속에서 생명의 성령님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맞아 들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과거에 잘못된 기준으로 세워진 ‘내가 바라는 나’와 ‘그렇지 않는 나’ 사이의 힘겨운 갈등과 상처들을 이겨내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결코 정죄 받지 않는 은혜를 통해 죄와 사망의 법에서의 해방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앞서 얘기 했듯이 저는 오랫동안 성령님의 강한 임재를 갈구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원하면 원할수록 저는 더더욱 힘겨운 좌절과 시련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성령 충만’이라는 목표 자체가 잘못 되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본문 9절에서 사도 바울을 통해 분명히 ‘그리스도의 영’, 즉 성령님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까지 엄중히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당연히 성령님과 깊은 사귐을 나누는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문제는 그러한 성령님에 대한 오해입니다. 성령님과의 진정한 교제는 흔히 생각하듯이 막연한 신비감에 도취되어 일상을 무시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물론 성경에 기록된 성령님의 여러 놀라운 은사들을 함부로 부정해서는 안 되고 그것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자세히 살펴본 바와 같이 성령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신 가장 중요한 이유는 다름 아닌, 부활 생명을 누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바꿔 말하면 우리를 참으로 살리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께서 당신의 생명으로 지으신 자연 질서를 통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떠한 꽃이 생생히 살아있음을 드러내는 가장 중요한 현상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저마다의 고유한 빛깔과 향기입니다. 만약 개나리가 본래의 예쁜 노란 색깔 대신 장미의 검붉은 잎을 따라한다면, 만약 장미가 자신만의 향기 대신 국화의 향기를 흉내 낸다면 그것은 그 개나리와 장미가 자기 본연의 아름다움을 잃고 그만 병 들었다는 증거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령님과 참된 교제 나눈다는 것은 어떠한 획일적인 기준을 맹목적으로 충족시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만약 특정한 행동과 인위적인 노력을 통해 성령님을 움켜쥘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곧 바울이 강력히 경계했던, 율법주의로 흘러 복음과 멀어지는 길이라는 사실을 꼭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므로 성령님과의 바른 사귐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저마다의 삶의 자리와 각자 짊어진 십자가 속에서 우리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부활 생명을 날마다 새롭게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의 근거임을 온 인격을 통해 담대히 인정하며 자신 만의 푸르름과 향기를 더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 곁의 연약한 이웃들과 신음하는 생태계를 하나님의 생명으로 회복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끊임없이 우리를 삼키려 하는 이 시대의 악한 절망과 죽음에 맞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평화로 말미암아 가장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미소를 입가에 꽃 피워내고 전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그 어떤 화려한 은사보다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진정한 성령 충만의 증거입니다.
오랜 시간 동안 성령님에 대해 오해하며 ‘내가 바라는 나’와 ‘내가 바라지 않는 나’ 사이에서 갈등하고 힘겨워 했던 저는 신학 공부를 통해 말씀을 새롭게 읽어가며 성령충만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저는 더 이상 강박적으로 초조해하며 많은 양 성경을 읽고 오래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의 여유로운 사귐 그 자체를 즐기며 하나님 나라의 따스한 복음을 더욱 풍성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제야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결코 ‘내가 바라는 나’가 아닌 ‘가장 나다운 나’를 우리 안에 계신 생명의 성령님을 통해 찾아가길 바라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어느 순간 저는 점점 자연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였습니다.
부디 간절히 바라기는 여러분은 제가 지난 날 가졌던 성령님에 대한 오해에서 벗어나 성령님과의 온전한 동행을 경험하고 누리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하여 날마다 가장 “나다운”, “나만의 향기와 빛깔”을 여러분의 삶 가운데 풍성히 가꾸길 축복합니다. 그렇게 성령님께서 함께 걷는 모든 걸음 가운데 항상 참 생명으로 호흡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마음 다해 소망합니다.
기도: 생명의 하나님.
주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 마음 가운데 예수님을 죽음에서 건지신 성령님을 허락해주심을 찬양합니다. 또한 부활의 생명을 부어주시고 누리게 하시는 위대한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참으로 성령 충만한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어 교회와 세상을 바르게 섬기며 하나님 나라를 온전히 넓혀가게 해주시옵소서.
성령님을 우리에게 귀한 선물로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봉헌기도
우리를 살리시는 하나님
날마다 가장 나다운 나로 살아갈 수 있도록 성령님을 통해 이끄시는 은혜에 감사와 찬양을 드리며 한 주간 구별한 예물을 드립니다. 이 예물을 통해 주님의 생명이 온 세계 위에 풍성히 전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담 청년들을 위해 마음 모아 축복합니다. 몸과 마음 늘 강건하도록 돌보아 주시고 나답지 않은 나로 살아가도록 강요당할 때 그것을 물리칠 수 있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참된 성령 충만으로 진정한 기쁨과 평화 누리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보냄의 말씀
목사: 사랑하는 여러분 평안히 돌아가십시오. 복음의 말씀을 들었으니 가장 “나다운 나”로 살아가십시오.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성령님을 통해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예담: 아멘! “지금의 나”와 “내가 되고 싶은 나” 사이에 갈등하며 때때로 “나답지 않은 나”로 살아갔던 아픔을 주님께 내어 드립니다. 성령님과 더불어 내 안의 생명의 회복하고 이웃을 일으켜 세우며 살아가겠습니다. 주님! 살림의 길로 이끌어 주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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