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2월 9일 목요일

예레미야애가 3장 19-24절 "오히려 희망"

오순절 후 스무 번째 주일, 2016년 10월 2일, 부산진교회 청년예배 설교, 정대진 목사
예레미야애가 3장 19-24절 "오히려 희망"

19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20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21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22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23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24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 


본문 좀 더 이해하기 쉽게 새번역 성경으로 다시 읽어드리고 설교를 시작하겠습니다.

19 내가 겪은 그 고통, 쓴 쑥과 쓸개즙 같은 그 고난을 잊지 못한다. 20 잠시도 잊을 수 없으므로, 울적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다. 21 그러나 마음 속으로 곰곰이 생각하며 오히려 희망을 가지는 것은, 22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다함이 없고 그 긍휼이 끝이 없기 때문이다. 23 "주님의 사랑과 긍휼이 아침마다 새롭고, 주님의 신실이 큽니다." 24 나는 늘 말하였다. "주님은 내가 가진 모든 것, 주님은 나의 희망!" 
- 애 3:19~24, 새번역 성경

아마 여러분 가운데 오늘 본문 말씀이 포함된 성경인 “예레미야애가”가 낯설게 느껴지는 분들이 꽤 있을 겁니다. “예레미야”라는 예언자와 예레미야서는 친숙하지만 그의 이름이 담긴 다른 성경이 있다는 사실은 쉽게 지나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은 사람들의 본질적인 슬픔을 관통하는 소중한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의 마음이 도무지 이겨낼 수 없도록 눅눅하고 지칠 때 이 짧은 성경 말씀을 소리 내어 읽으며 위로와 용기를 얻길 꼭 권하고 싶습니다.

학자들마다 약간의 견해 차이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예레미야애가는 주전 586년, 바벨론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성이 함락당한 역사적인 사건을 배경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도 말씀드렸듯이 고대 중동에서 전쟁에 패배했다는 것은 곧 자신이 믿고 섬긴 신이 다른 나라의 신에 굴복했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시대 유다 사람들 가슴 깊이 새겨진 절망과 슬픔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그 이상이었습니다.

예레미야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비록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예언자로서 말씀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하긴 했지만 그 역시 이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민족적 시련 앞에 하나님의 뜻을 연거푸 물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때문에 예레미야애가는 “어떻게?”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단어로 시작됩니다. 

이 책은 총 다섯 편의 시詩를 그 안에 담고 있습니다. 주의 깊게 보면 아시겠지만 그 중 1,2,4,5장은 모두 22절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모두는 우리말 번역에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히브리어 자음 22개가 각 절 가장 앞에 순서대로 등장하며 운율을 맞추고 있습니다. 한글로 예를 들면 각 행의 초성을 “ㄱㄴㄷㄹ”순서로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정 가운데 위치한, 오늘 본문 말씀이 포함된 3장은 66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눈치가 빠른 분들은 금세 “22x3=66”이라는 계산을 하였을 겁니다. 예레미야애가의 중심에 위치한 세 번째 시는 다른 시들 보다 세 배의 분량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어 자음 하나마다 세 절 씩 반복되어 핵심 주제를 더욱더 분명히 전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예레미야애가는 비록 적은 분량의 책이지만 무척 정교한 형식과 구성을 가진 말씀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예언자 예레미야는 고통의 시간을 보내며 아무렇게나 자신의 감정을 분출하지 않았습니다. 그 절망의 본질과 이유를 천천히 곱씹으며 차분히 정제된 문장으로 정리하여 후대에 전해 주었고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백되어 마침내 오늘 우리 손에 들려지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통해 여러분께 꼭 권하고 싶습니다. 부디 “글 쓰는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여러분 안에 어두운 생각이 밀려올 때 스스로를 공허한 분노와 자포자기로 몰아넣지 마시길 바랍니다. 대신 서툴고 부족하더라도 자신의 감정과 경험 그리고 신앙을 문장으로 정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글을 적을 때 좀 더 생각을 많이 하게 되고 생각을 멈추지 않을 때 비로소 우리의 믿음은 익숙한 맹신에서 벗어나 더욱 건강하게 자라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본문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19-20절 말씀 새번역 성경으로 다시 한 번 다함께 읽겠습니다.

19 내가 겪은 그 고통, 쓴 쑥과 쓸개즙 같은 그 고난을 잊지 못한다. 20 잠시도 잊을 수 없으므로, 울적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다.

예언자는 자신이 겪은 “그 고통”을 “쓴 쑥”과 “쓸개즙”이라는 미각味覺적인 단어를 통해 표현합니다. 그리고 마치 혀끝을 강력히 자극하고 좀처럼 뇌리에서 떠나지 않은 “쓴 맛”처럼 그 고통은 결코 잊을 수 없는 기억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마음 깊이 밀어닥친 그 우울함으로 내면 깊은 떨림과 좌절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확신하기는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이 수 천 년 전 이 예언자의 탄식에 충분히 공감하리라 믿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이미 겪었고 또 지금 겪고 있는 인생의 “쓴 맛”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삶은 고통이고 고통은 현실입니다. 불행히도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낙원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모두 천사가 아닙니다. 

따라서 지나친 비관론이 건강하지 못하듯이 무모한 낙관론도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제발 아무런 상처받지 않았던 것처럼, 전혀 힘들지 않은 것처럼 애써 스스로를 꾸며대지 말길 바랍니다. 끊임없이 여러분을 괴롭히는 그 모든 고통과 절망들을 정확히 마주 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스스로에게 정직하게 충분히 아파하고 분노하시길 바랍니다. 그래야만 우리를 덮쳐온 그 모든 문제들을 해쳐나갈 수 있는 길이 비로소 열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할 중요한 대목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언자의 탄식은 민족과 세계를 향한 내용이라는 사실입니다. 즉, 예레미야와 그의 공동체는 단순히 개인적인 몰락과 실패 때문에 슬피 울지 않았습니다. 비록 예언자가 흘린 눈물은 그 남루한 한 사람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그 눈물에 담긴 세계는 유다와 바벨론과 중동과 온 세상을 아우르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저마다의 시련으로 괴로워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특별히 자신보다 어린 사람에게 전혀 공감하지 못하고 ‘고작 그런 일로 그렇게 힘들어 하냐.’고 무례하게 다그치고 훈계하는 이들을 보며 답답함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아픔과 절망은 분명 개별적인 것이기에 다른 사람들이 결코 함부로 판단할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개인의 고통에만 집착하며 주위를 둘러보지 않는 것 또한 옳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자신이 겪었던 힘겨운 시간들을 통해 이웃의 아픔에 더욱 눈길을 돌려야 합니다. 더 나아가 오늘날 대한민국이 겪고 있는 온갖 부정의와 불공평에 눈을 떠야 합니다. 그리하여 일그러지고 뒤틀린 질서 아래 신음하는 약자들과 함께 눈물 흘려야 합니다. 파괴되는 생태계와 함께 신음하고 절규하며 주님의 창조 세계가 다시금 아름답게 회복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고통과 절망을 대하는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태도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이와 같은 깊고 깊은 절망의 한 복판에서 전혀 뜻밖의 은혜로운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21-23절 말씀, 새번역 성경으로 다함께 읽겠습니다.

21 그러나 마음속으로 곰곰이 생각하며 오히려 희망을 가지는 것은, 22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다함이 없고 그 긍휼이 끝이 없기 때문이다. 23 "주님의 사랑과 긍휼이 아침마다 새롭고, 주님의 신실이 큽니다."

절망과 직면하며 처참하게 몸부림치던 예언자는 놀랍게도 지금 자신이 마주하는 고통의 현실과는 전혀 다른 성찰과 믿음이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움터 오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바로 “희망”, “오히려 희망”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요? 우리의 이성은 이러한 희망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이성의 저항”은 지극히 타당합니다.

만약 여러분이라면 미래를 위해 계획하는 모든 일들이 다 실패하고, 매일 매일 힘겨운 일들만 계속 이어지는 상황 가운데서도 “희망”을 말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래야 될 것 같은 강박과 학습된 습관을 내려놓고 우리의 연약함과 불안함을 분명히 느낄 때 그것은 그야말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예언자가 그 모든 지식과 경험을 거스르는 희망을 가슴에 품게 된 까닭은 지금 자신이 처한 불행가운데서도 매일 아침 마다 새롭게 자신을 향해 오는 “주님의 한결 같은 사랑”과 “끝없는 긍휼”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가 굉장히 독실한 믿음을 가져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예레미야의 삶 전반에는 모범적이고 얌전한 신앙인의 모습 보다는 “눈물의 예언자”라는 별명처럼 절규하며 흐느끼는 원망과 분노가 가득하였습니다. 그 대표적인 구절인 예레미야 20장 14-18절을 새번역 성경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14 내가 태어난 날이 저주를 받았어야 했는데 어머니가 나를 낳은 날이 복된 날이 되지 말았어야 했는데 15 나의 아버지에게 '아들입니다, 아들!' 하고 소식을 전하여, 아버지를 기쁘게 한 그 사람도 저주를 받았어야 했는데 16 바로 그 사람은 주님께서 사정없이 뒤엎어 놓으신 성읍들처럼 되어서, 아침에는 울부짖는 고통 소리를 듣고, 대낮에는 전쟁의 함성을 들었어야 했는데 17 내가 모태에서 죽어, 어머니가 나의 무덤이 되었어야 했는데, 내가 영원히 모태 속에 있었어야 했는데 18 어찌하여 이 몸이 모태에서 나와서, 이처럼 고난과 고통을 겪고, 나의 생애를 마치는 날까지 이러한 수모를 받는가!

사랑하는 여러분, 이렇게 성경 말씀 안에 담긴 예언자의 신음소리를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런 그를 압도한 주님의 은혜와 사랑 역시 항상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따라서 절망의 언덕을 지나며 하나님 앞에 애써 착한 척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예레미야처럼 얼마든지 주님 앞에 원망하며 탄식해도 괜찮습니다. 예수님 또한 십자가 위에서 깊은 절망과 속에 몸부림 치며 하나님을 향해 울부짖으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결코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 피맺힌 십자가가 부활의 생명을 꽃 피웠듯이 고통 가운데 외치는 우리의 신음이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과 긍휼을 더욱 생생히 깨닫게 하는 은혜의 통로라는 사실 말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말하는 생명과 구원은 말랑말랑한 심리적 위로가 아닙니다. 새하얗게 표백된 종교적인 관념도 결코 아닙니다. 정반대로 찐득찐득한 피와 진흙과 눈물로 뒤범벅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달려오는 뜨거운 사랑입니다. 아무리 부정하려 애쓰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믿어지지 않지만, 날마다 새롭게 내면 깊이 자리 잡는, 그리하여 결국 끝내 안길 수밖에 없는 주님의 놀라운 긍휼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동방정교회의 수도사인 성 파이시오스의 통찰을 여러분에게 소개하고 싶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시련 속에서 이렇게 말하자.

나의 하느님,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저의 구원을 위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 성 파이시오스, 아토스성산의 수도자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삶 가운데 시련은 피해갈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생물로서, 살아있는 존재로서 지니는 숙명입니다. 따라서 절망을 관통해 볼 줄 아는 내적인 시력을 키우시길 바랍니다. 신실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하시기에, 그 모든 좌절과 굴욕과 고통은 결코 허무한 시간으로 그치지 않고 우리를 진정 살리고 새롭게 하는 은혜의 과정임을 절대로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본문 마지막에 기록된 예언자의 고백을 함께 드리길 원합니다. 24절 말씀을 새번역 성경으로 제가 읽겠습니다.

24 나는 늘 말하였다. “주님은 내가 가진 모든 것, 주님은 나의 희망!” 

한 번 따라해 보시길 바랍니다. “주님은 내가 가진 모든 것, 주님은 나의 희망”. 여기서 새번역 성경이 “내가 가진 모든 것”이라고 문학적으로 함축해 옮겼고, 개역개정 성경은 “기업”이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단어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약속의 땅 들어갈 때 지파별로 가문 별로 제비 뽑아 나눈 토지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토지는 이제 농경생활을 막시작하는 이스라엘 사람들로서는 가장 중요한 삶의 토대입니다. 따라서 “주님은 내가 가진 모든 것”이라는 예언자의 고백을 이렇게 바꿀 수 있습니다. “주님은 내가 생존하고 생활하는 근거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의연한 찬양을 드리는 예레미야의 상황은 모든 것이 순탄하고 평안한 게 아니라, 오히려 정 반대로 나라 잃은 백성으로서 가난하고 비참한 삶을 살아가는 중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 그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지극히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진정 자신을 풍요롭게 하며 희망을 주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심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부디 거듭 바라기는 이와 같은 찬란한 고백이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 되길 원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렇게 권유하면서도 제 마음은 한 없이 무겁고 또 미안하기만 합니다. 성도님들이 겪고 계신, 제가 미처 다 헤아릴 수 없는 온갖 결핍과 불안과 염려가 어쩌면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찬양을 때때로 사치스럽게 여기게 한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목사로서가 아닌, 믿음의 여정을 함께 걸어가는 길벗으로서 당부 드립니다. 공허한 잔소리가 아닌 온 몸으로 고난을 살아내며 복음을 외친 예언자와 예수님의 말씀과 삶에 의지하여 간곡히 권면합니다. 그 어떤 절망 속에서도 오히려 희망을 품으시길 바랍니다. 우리보다 앞서, 우리와 함께 고난당하신 신실하신 주님께서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사랑과 긍휼을 날마다 가득히 안겨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만이 진정 우리의 모든 것이요 희망임을 항상 고백하며 절망과 맞서 살아가는 모두가 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설교 후 기도
우리의 참된 희망이신 하나님
잠시도 잊을 수 없는 그 모든 슬픔과 절망 가운데 주님을 바라봅니다. 아침마다 새롭게, 여러 모양으로 찾아오는 한결같은 사랑과 긍휼을 의지합니다. 그리하여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모든 것이며 진정한 희망임을 온 삶을 통해 고백하며 나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절망의 현실을 몸소 살아가시며 생명의 길을 열어 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봉헌기도 
사랑과 긍휼의 하나님
매일의 삶 가운데 베풀어 주신 은혜를 높여 찬양하며 한 주간 삶으로 구별한 예물을 드립니다. 기쁘게 받으시어 절망의 굴레 아래 신음하는 주님의 자녀들을 위해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예담청년들을 축복하며 기도합니다. 끝내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며 절망하게 하는 그 모든 고통과 좌절을 불쌍히 여겨주시고 진정한 위로로 동행하여 주시옵소서. 그 어떤 시련 속에서도 주님의 희망이 결국 승리함을 더욱 신뢰하게 하여 주시며 몸과 마음의 건강과 지켜 주시고 가정과 여러 관계 속에서 평화 내려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보냄의 말씀
목사: 사랑하는 여러분, 평안히 돌아가십시오. 복음의 말씀을 들었으니 그 어떠한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말고 살아가십시오. 우리의 전부이신 주님의 한결 같은 사랑과 긍휼이 여러분과 항상 함께 합니다.

예담: 아멘! 고통의 현실 속에 쉽게 좌절하거나 무작정 외면하였던 어리석음을 뉘우칩니다. 아침마다 새로운 주님의 은혜 안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전하며 살아가겠습니다. 주님! 우리의 눈을 열어 소망을 잃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축도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복을 주시고, 여러분을 지켜주십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얼굴을 여러분을 향해 비춰 주시고,
여러분을 은혜롭게 하십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얼굴을 여러분을 향해 드시어, 
여러분에게 평화 주십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님의 사귐이 
고통의 현실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주시는 희망을 잃지 않는
예담 청년들과 항상 함께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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