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2월 22일 수요일

신명기 18장 15-20절 “말씀을 맡기시는 하나님”

주현절 후 일곱 번째 주일, 2017년 2월 19일, 부산진교회 청년예배설교, 정대진 목사
신명기 18장 15-20절 “말씀을 맡기시는 하나님”

신명기 18장 15~20절
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 16 이것이 곧 네가 총회의 날에 호렙 산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 구한 것이라 곧 네가 말하기를 내가 다시는 내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듣지 않게 하시고 다시는 이 큰 불을 보지 않게 하소서 두렵건대 내가 죽을까 하나이다 하매 17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의 말이 옳도다 18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서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령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말하리라 19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전하는 내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내게 벌을 받을 것이요 20 만일 어떤 선지자가 내가 전하라고 명령하지 아니한 말을 제 마음대로 내 이름으로 전하든지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면 그 선지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느니라 



설교 전 기도(성령님의 조명을 구하는 기도)
생명의 하나님.
이 시간 우리를 향한 말씀에 귀 기울이기 원합니다. 내면 깊은 곳을 향해 비추시는 성령님의 빛 가운데 우리의 모든 마음의 문 열어 그 뜻을 받아들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설교 - “말씀을 맡기시는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는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하길 원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깊은 뜻에 감탄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더더욱 주님과 눈을 마주치기 바랍니다. 특별히 여러모로 어렵고 답답할 때 하나님의 분명한 임재를 느끼고 그분의 명료한 음성 듣기를 간구해보신 경험이 한 번쯤을 있을 것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고3 시절이 그러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저 역시 그 때 참 답답하고 초조했었습니다. 

특히나 저는 그 유명한 “이해찬 1세대”로서 그전에 없었던 수시모집을 얼떨결에 준비하던 중이라 매우 극심한 불안감에 사로잡혔고 그래서 야간자율학습 끝나고 집으로 들어가기 전에 교회 지하기도실에서 매일 울면서 간절히 기도했었습니다. 또한, 그 때 집회란 집회는 가능한 열심히 찾아다니며 뜨겁게 찬양하며 설교에 귀 기울였던 기억들이 지금도 제 가슴에 생생히 남아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그 당시 저의 그 모든 열망은 결국 하나로 모아집니다. 바로, 주님을 더욱더 가까이 만나 아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간혹 기도 중에 뜨거운 체험과 삶 속에 극적인 경험을 하면 이루 말할 수 없는 감격에 빠졌고 반대로 기대했던 결과들이 안 나오고 응답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면 한없는 우울과 좌절에 사로잡히기도 했었습니다. 이것은 비단 저뿐만 아니라 여러분 대부분도 충분히 공감하는 경험일 겁니다.

그런데 이처럼 하나님을 가까이 하려는 사람들의 근원적인 바람은 동시에 불가능하며 위험합니다. 인간은 전지전능하신 만유의 하나님 앞에 감히 마주하며 설 수 없는 한 없이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우주비행사들을 인터뷰 한 사람의 글을 예전에 방송을 통해 전해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말에 따르면, 우주선을 타고 지구 밖을 벗어나 우주 유영을 해본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는데, 과거에 어떤 종교를 가졌든지, 심지어 무신론자였다고 할지라도 그 이후 신의 존재를 분명히 믿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아마도 짐작컨대 거대한 우주 속에 던져졌을 때 인간의 연약함과 무능함을 절절히 심감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굳이 먼 우주까지 상상력을 뻗지 않아도 여러분이 경험했던 거대한 자연을 떠올려 보시길 바랍니다. 저는 대학생 시절 혼자 일본 도쿄 외곽을 여행했을 때 어느 산 위에 올라 바라본 태평양의 풍광을 절대 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마침 매우 화창한 초여름 날씨여서 드넓은 바다의 눈부신 모습이 무척 아름다웠습니다. 또한 동시에 낯선 거대한 자연 앞에 홀로 서 있는 것이 몹시도 두렵게 느껴졌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 역시 분명 비단 저만의 경험은 아닐 것입니다. 저는 아직 못 가봤지만, 미국과 캐나다 가운데에 있는 ‘그랜드 캐년’ 계곡이나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사이에 있는 ‘이과수 폭포’처럼 거대한 자연을 목격하고 온 사람들은 모두 비슷한 기분을 이야기합니다. 

이렇듯 거대한 자연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자신의 작디작은 실존을 절실히 깨달으며 공포에 빠지곤 합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자연을 지으신 하나님을 직접 뵌다면 어떨 것 같으신가요? 마치 태양을 가까이 할 때 아무리 거대한 행성도 타들어가 없어지는 것처럼 절대자이신 하나님께 유한한 인간이 가까이 다가선다면 도무지 감당하지 못할 그분의 영광 앞에 녹아내릴 수 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경험을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집트를 탈출하고 하나님과 거룩한 언약을 맺기 위해 올라간 시내산 위에서 하였습니다. 출애굽기 19장 16~19절을 보면 시내산 위에 천둥과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가득할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그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공포에 사로잡혔습니다. 바로 그 사건을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말씀에서 모세는 회상하였습니다. 그 때, 그들이 무서움에 사로잡혀 주님께 간곡히 부탁한 내용이 무엇인지 본문 16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16 이것이 곧 네가 총회의 날에 호렙 산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 구한 것이라 곧 네가 말하기를 내가 다시는 내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듣지 않게 하시고 다시는 이 큰 불을 보지 않게 하소서 두렵건대 내가 죽을까 하나이다 하매 

그날 호렙산 위에서 백성들이 간청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 우리 하나님의 소리를 다시는 듣지 않게 하여 주시며, 무서운 큰 불도 보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우리가 죽을까 두렵습니다.”(새번역 성경) 그들은 하나님이 들려주시는 목소리와 보여주시는 큰 불에 환호하거나 감격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죽을 것 같은 크나큰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하기 원하지만 막상 하나님과 직접 마주하는 것은 거대한 공포를 안겨 줍니다. 그런 까닭에 주님께서 때때로 우리와 거리를 두시며 당신의 얼굴을 우리에게서 감추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식으로 가까이 다가오지 않으시는 것은 우리를 싫어하고 버리셔서가 아니라 사람들을 돌보시는 또 다른 사랑의 표현이라는 것을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침묵으로 괴로울 때, 주님께서 우리의 아픔과 고통 따위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으시며 버려두고 떠난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할지라도 결코 쉽게 절망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러한 “거리 둠”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향한 주님의 놀라운 뜻과 계획이 묵묵히 이루어져 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모습을 그저 감추기만 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동시에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직접 찾아오는 대신 적합한 또 다른 은혜로운 방식으로 말씀을 걸어오십니다. 바로 모세와 같은 예언자를 우리 가운데 세우셔서 그를 통해 말씀을 전해 주십니다.

본문 18절 말씀 다함께 읽겠습니다.

18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서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령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말하리라 

이 때 등장하는, “예언자”를 마치 무당처럼 앞날을 신비롭게 맞추는 특별한 사람들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선지자”와 “예언자”의 차이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 말씀에서 설명한,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해서 전한 사람들을 가리켜 히브리어로 <나비>라고 부릅니다. 이 단어는 “부르다”라는 뜻을 가진 아카드어 <나부>에서 유래했는데, 이러한 <나비>가 우리말 성경에는 크게 두 가지로 번역되었습니다. 바로 오늘 함께 읽은 말씀에 나오는 “선지자”, 그리고 “예언자”입니다. 언뜻 들으면 이 두 단어가 별 차이가 없는 거의 같은 의미를 가졌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먼저 “선지자”(先知者)라는 말의 한자 뜻을 하나하나 풀어보면 (앞일을) “먼저 아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반면 성경 속 “예언자”(預言者)라는 단어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예언”(豫言)과 다릅니다. 사람들이 보통 사용하는 “예언”(豫言)은 “미리 말하다.”는 의미를 가지면서 “선지”(先知)와 마찬가지로 “앞 날”에 무게 중심이 실려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예언”은 한자말 “미리 예”(豫)를 사용하는 “예언”(豫言)이 아니라 “맡길 예”(預)를 사용한 “예언”(預言)입니다. 즉, 이 때의 “예언”(預言)은 단지 앞으로 일어날 미래 일을 먼저 알고 미리 말하는 정도로 그치지 않습니다. 그 보다 본질적으로 미래뿐만 아니라 과거와 현재를 포함한,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모든 시간을 아울러 선포되는 말씀을 “맡는 일”이 바로 성경이 알려주는 “예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예언자는 한 마디로, ‘말씀을 맡은 자’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실제로 구약성서에 등장한 이사야와 예레미야 그리고 에스겔 등을 비롯한, 여러 예언자들은 단순히 앞일을 미리 말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 시대에 들려져야할 하나님의 바른 뜻을 치열하게 외치고 살아낸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흔히들 미래에 대한 예고를 담고 있다고 오해하는 신약의 요한계시록 역시 그 시대에 고난 받는 성도들을 향한 위로와 권면이 중심 줄거리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모세처럼, 당신의 말씀을 맡은 예언자들을 이 땅에 계속 보내셨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들을 통해 들려진 주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거짓 예언자들의 달콤한 거짓말에 속아 넘어갔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당신의 참된 말씀을 온전히 전하시려 마침내 중요한 결단을 내리셨습니다. 그 결과, 그 스스로가 말씀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셔서 참되고 진정한 예언자로 살아가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다른 무엇이 아닌 예수님을 통해 온전하고 완전히 이 세상 속으로 다가왔음을 마음 깊이 새기길 바랍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을 가슴 깊이 간직하며 그 구체적인 내용을 실천하고 나누어야 합니다. 바로 이를 위해 우리 모두는 이 시대의 모세와 같은 예언자로 부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이 땅에 아무 의미 없이 우연히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말씀을 맡은 예언자로서 살기 위해 보냄 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따라서 늘 자긍심을 가지길 바랍니다. 남들이 여러분을 그 어떤 눈으로 바라보든, 혹은 자기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든 관계없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모두를 너무나 아끼고 사랑하시며 저마다의 삶의 자리에서 말씀을 맡은 예언자로 세워주셨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예언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준엄한 경고를 명심해야 합니다. 다함께 19절 말씀 읽겠습니다.

19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전하는 내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내게 벌을 받을 것이요 

하나님께서는 먼저 예언자를 통하여 전해지는 말을 듣지 않는 사람에게 벌을 내리겠다고 엄하게 경고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당신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이 괘씸하거나 불쾌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상황,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마음이 곧 징벌이라는 경고입니다. 하나님께서 “벌”을 얘기하시는 것은 그 벌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이 경고를 통해 심판이 없는 세상, 말씀으로 가득한 삶을 당신의 자녀들이 살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은 들으나 마나한 것이 아니라 죽음과 탐욕의 질서에서 벗어나 참된 생명의 길을 걷는 은총의 통로라는 사실을 늘 명심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20절 말씀 다함께 읽겠습니다.

20 만일 어떤 선지자가 내가 전하라고 명령하지 아니한 말을 제 마음대로 내 이름으로 전하든지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면 그 선지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느니라 

19절이 예언자를 거부한 사람들에 대한 경고였다면 20절은 예언자 그 자신에게 주시는 경고입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하시지도 않은 말을 멋대로 주님의 이름을 걸고 전하는 것을 엄하게 꾸짖고 계십니다. 따라서 어느 누군가에게 “하나님의 뜻”을 이야기 할 때 반드시 신중해야 합니다. 우리는 평생 하나님의 뜻을 완벽히 이해할 수 없고 죽는 날까지 알아가는 과정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십계명 세 번째 계명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고 엄중히 명령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대신, 늘 강조하듯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드러난 하나님 나라의 사랑을 전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 외에 곁가지에 불과한 성경 내용들을 필요이상으로 부풀려서 다른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고 겁주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단지 우리에게 익숙하다고 해서, 대단한 경험을 했다고 해서, 그리고 유명한 목사님의 말씀이라고 해서 확고부동한 진리라고 주장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일상에 함부로 침범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닐뿐더러 오히려 하나님의 얼굴을 어둡게 하는 일입니다. 그렇기에 늘 말씀의 중심이신 예수님의 사랑 안에 튼튼히 안겨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모두가 되길 바랍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은 20절 말씀을 통해 예언자들이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경고하고 계십니다. 아마도 이런 경고가 여러분과 그리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 겁니다. 우리 가운데 불교나 이슬람등의 타종교로 개종해서 불상 앞에 절하거나 알라는 위대하다고 외칠 사람은 아마도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종종 사찰에 들어가 불상을 훼손하는 등의 최소한의 상식에도 어긋나게 타종교에 적대적으로 반응하면서 지나치게 대결하려는 어리석은 모습을 더욱 쉽게 발견합니다.

그러나 20절 말씀에서 질책하는 것은 단순히 타종교의 신을 섬기는 정도를 넘어선 더욱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고대 중동사회에서의 종교는 오늘 우리보다 훨씬 더 생활양식 깊숙이 자리 잡아 정신을 지배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당시의 다른 종교들이 가르치는 삶의 태도와 방향은 야훼신앙과 철저히 달랐습니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당시의 바알 신앙을 비롯한 이스라엘 주변 종교들은 힘과 풍요를 찬앙하며 돈 많고 강한 사람들의 편에 서서 약한 사람들을 억누르는 것을 동조하는 종교였습니다. 반면 구약의 야훼신앙은 약한 사람들을 괴롭히는 기득권을 엄하게 꾸짖고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가치관을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하나님 대신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한다는 것은 단순히 다른 종교의 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대신에 돈의 이름을 더 외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대신에 학벌을 들먹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대신에 높은 자리의 이름을 욕심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제 아무리 돈과 학벌과 높은 지위를 통해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겠다고 큰 소리 쳐도 결국 하나님의 매서운 질책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을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해 꼭 마음 깊이 새기길 바랍니다. 대신에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우리에게 알려주신 하나님 나라의 정신 그대로 더욱 이웃을 섬기고 낮아지는 삶의 방식을 굳건히 지켜내시며 참된 희망을 호흡하시길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른 다는 것은 그 분과 더욱 가까워지길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갈망함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절대자이신 주님과 마주설 수 없는 분명한 한계를 지닌 인간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여러 예언자들을 보내셨고 마침내 예수님께서 참 예언자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이 시대의 또 다른 예언자로 부르시며 말씀을 맡겨주셨습니다. 이 놀라운 은혜와 신비를 날마다 더욱 깊이 묵상하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스스로에 대해 보다 온전히 이해하며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다가오시는 방식과 그 안에 담긴 의미를 풍성히 깨달아 아는 모두가 되기를 마음 다해 소망합니다.


설교 후 기도 
말씀하시는 하나님
주님께서 맡기신 말씀들을 우리의 온 몸으로 살아내며 전하기 원합니다. 신앙의 이름으로 휘두르는 거짓과 폭력에 맞서며 세상을 참으로 이기는 온전한 진리 안에 잠겨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에게 말씀을 맡겨주신 참 예언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봉헌기도 
말씀 하시는 하나님.
사람들과의 거리 두심을 통해 다가오시는 신비에 감사와 찬양을 드리며 한 주간 삶으로 구별한 예물을 드립니다. 기쁨으로 받으시어 이 시대, 주님의 말씀과 마음이 필요한 이들을 위하여 소중히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예담 청년들을 축복하며 기도합니다. 주님과의 아득한 거리감으로 절망과 불안에 사무칠 때, 진리로 살아가고 전하며 외로움에 빠질 때 위로하시어 깊은 뜻과 은혜를 바로 알아가게 하여 주시길 구합니다. 몸과 마음의 건강을 항상 지켜 돌보아 주시고 말씀을 통해 힘을 얻으며 주어진 부르심의 자리를 묵묵히 이어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파송의 말씀
목사: 사랑하는 여러분 평안히 돌아가십시오. 복음의 말씀을 들었으니 이 시대의 예언자로 살아가십시오. 말씀을 맡기신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늘 함께 하시며 동행하십니다.

예담: 아멘, 하나님의 뜻을 함부로 왜곡하며 거짓된 가치관을 따라 살았던 어리석음을 뉘우칩니다. 진정한 말씀이신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고 전하며 살아가겠습니다. 주님! 말씀으로 우리를 다스려 주시옵소서! 아멘.


축도 
주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복을 주시고, 여러분을 지켜주십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얼굴을 여러분을 향해 비춰 주시고,
여러분을 은혜롭게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얼굴을 여러분을 향해 드시어, 
여러분에게 평화 주십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님의 사귐이 
맡겨진 말씀을 소중히 지키고 전하는
예담 청년들과 항상 함께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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