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신 그리스도 주일, 2016년 11월 20일, 부산진교회 청년예배 설교, 정대진 목사
골로새서 1장 15-20절 "선물로 오신 평화의 왕"
15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16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19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6년 전 결혼을 앞두고 저의 가장 큰 고민은 프로포즈를 어떻게 할까? 였습니다.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문화인 것 같은데, 사실 이미 결혼하려는 뜻은 충분히 교감을 가지고 서서히 준비를 하고 있으면서도 무릎을 꿇고 다시 청혼을 해야 한다는 강한 압박과 부담을 남자들은 갖게 됩니다.
게다가 저는 그 때 넉넉하지 못한 형편의 신학생이었기 때문에 대단한 선물이나 이벤트를 할 여력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고심 끝에 생각해낸 방법은 성경 안에서 남녀 간의 사랑을 가장 아름답게 묘사한 아가서를 히브리어 원문으로 수첩에 필사해서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교 랍비가 녹음한 낭독 파일을 이어폰으로 들으며 한 쪽에는 구약 원전, 다른 한쪽에는 수첩을 펴서 한 달 넘게 열심히 옮겨 적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리고 정말 다행스럽게도 전혀 화려하지 않은, 오히려 어찌 보면 너무나 초라한 그 선물에 제 아내는 감동을 받았고 무사히 결혼해서 지금까지 잘 살고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민망한 프로포즈 이야기를 꺼낸 것은 본문 가장 앞부분에 기록된 바울의 고백 때문입니다. 15절 말씀 다함께 읽겠습니다.
15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바울은 예수님을 가리켜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것을 좀 더 이해하기 쉽게 이렇게 바꿔보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 당신을 세상에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사람들이 연애를 할 때 느끼는 가장 큰 답답함과 불안은 사랑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사랑이라는 신비로운 감정은 숫자로 측량할 수 없습니다. 또한 그 실체가 무엇인지 평생가도 다 알 수 없는 관계의 영역입니다. 그렇기에 비록 남들 보기에는 볼품없다 할지라도 깊은 정성을 담은 선물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는 합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사랑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끝없는 불안과 두려움에 빠지게 합니다. 그런 까닭에 다른 종교들은 눈에 보이는 형상을 만들고 숭배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것을 엄중히 금하셨습니다. 대신 당신 스스로를 이 땅에 선물로 보내시어 사람들 앞에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바로 유일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이어서 바울은 그러한 주님에 대한 위대한 찬양을 계속 이어갑니다. 16, 17절 말씀 다함께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16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이 두 절에 따르면 예수님은 단지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형상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권력자들과 제국을 포함한, 하늘과 땅의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을 창조하신 분입니다. 그렇기에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계셨고 또 그 모두를 넉넉히 품으시는 분입니다.
사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굉장히 막연히 들릴 수 있습니다. 그저 예수님께서 정말 높고 위대하신 분이라는 종교적인 관념을 거창하게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뒤에는 굉장히 치열한 정치현실이 배경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바로 로마제국의 황제숭배입니다. 주후 1세기 로마제국은 본격적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식민지를 정복하면서 곳곳에 황제의 신상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황제를 향해 ‘만물의 기원과 동등한 존재’, ‘생명과 생기의 기원’과 같은 신적인 호칭을 부르며 찬양하였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예수님을 높이며 의도적으로 그 시대 로마 황제의 칭호를 차용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앞서 읽은 16절에서, 로마 황제를 비롯한 제국의 권력자들을 구태여 언급하며 그들 역시 주님께서 창조아래 있음을 선언했습니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그 시대의 황제 숭배를 거부하며 시저, 카이사르가 아닌 예수님만이 유일한 온 세계의 왕이시며 창조주이심을 분명히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바울의 고백은 교회에 대한 중요한 이해로 이어집니다. 다함께 18절 말씀 읽겠습니다.
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앞서 살펴보았듯이 모든 세계를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예수님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주님의 몸이 됩니다. 더욱 정확히는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교회를 이루는 성도들은 온 우주를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영광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본문 말씀은 바울 개인이 기록한 편지가 아니라 첫 번째 그리스도인들, 초기 교회 성도들이 부른 찬양이라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함께 화면에 있는 사진을 봐주시길 바랍니다. 이것은 오늘 함께 읽은 골로새서 1장 15~20절이 있는 신약 원전 페이지 입니다. 다음은 그 중에서도 본문을 확대한 사진입니다. 그냥 한눈에 봐도 아시겠지만 15~20절은 들여쓰기가 되어 다른 단락과 구분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원전도 마찬가지인데 해당 본문이 행이 분명히 구별되는 운문체, 시가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은 한글번역만 봐서는 잘 모르고 넘어갈 수 있지만 사실, 하나의 구별된 독립적인 찬양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바울 개인이 적은 게 아니라 초기 교회 성도들 사이에서 널리 불리던 찬양 혹은 신앙고백을 인용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따라서 본문 말씀은 바울 혼자 기록한, 복음에 대한 관념적인 설명이 아니라 시련과 핍박 속에서 치열하게 지켜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옛날 성도들의 신앙이 담긴 절절한 찬양임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본문 내용을 상상력을 가지고 다시금 곱씹어 보시길 바랍니다.
그들이 예배하며 노래하는 대상인 예수님은 황제와 정반대의 모습을 지닌 채 이 땅을 살아가셨습니다. 그는 중동 한 구석에 위치한 천대받는 시골출신의 평민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기득권들과 맞서다 로마 제국에 반역한 죄로 극형에 처해 숨을 거둔 사형수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은 화려한 성공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 가셨습니다. 오히려 그는 지극히 초라하고 비참한 모습의 패배자, 루저loser였습니다.
그것은 당시 교회를 이룬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 때 기독교인들은 반란범인 예수님을 향해, 오직 하나님과 황제에게만 해당되는 호칭인 “주님”(퀴리오스)으로 부르며 섬겼기 때문에 로마제국입장에서는 또다시 소란을 일으킬지 모르는 반란세력이었습니다. 실제로 그 시절 기독교인들은 병역을 비롯해서, 제국의 질서 유지에 동조하는 일을 거부하였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당연히 온갖 핍박과 어려움에 처했고, 그 결과 대부분이 제대로 된 직업을 갖지 못한 채 가난하고 비참하게 살아갔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와중에도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함께 모여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교회는 지금처럼 번듯한 건물도, 훈련받은 목회자도, 체계 있는 조직도 없이, 고작해야 십 수 명 되는 사람들이 가정집에 몰래 숨죽여 모이는 작은 모임에 불과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그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표현하면 “루저를 섬기는 루저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예배 가운데, 그 남루한 패배자인 예수님께서 이 세상 모두를 지으신 창조주이시며 왕이심을 의연히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자신들의 이 작고 별 볼일 없는 공동체가 그 주님의 몸이라고 담대하게 찬양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비록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비록 겉모습은 초라하나 그 안에 한 없이 위대한 구원과 사랑을 담은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초기 교회 성도들은 그 믿음을 6절의 찬양에 담아 예배 가운데 함께 부르며, 절망 가운데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 위대한 노래를 자신의 편지에 담았습니다. 또한 그로부터 2천년이 지난 우리 역시도 예배 가운데 함께 마음을 담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하나님께서 세상 가운데 당신을 드러내신 방법이 예수님의 십자가임을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주님의 위대함이 이 세상에서 가장 초라한 모습으로 드러나는 신비를 깨달아야 합니다. 진리를 따르고 생명을 전하기 위해 겪는 숱한 시련과 좌절이 결코 그 자체로 멈추지 않고 놀라운 구원의 열매로 이어짐을 신뢰해야 합니다.
따라서 그 하나님 나라 복음의 공동체로 우리를 불러 모으시어 당신의 몸이 되게 하신 은혜에 감사를 드리며 우리 교회가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세상을 아름답게 변화시키는 일에 참여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어지는 19-20절은 그렇게 주님의 몸 된 교회가 해야 할 소중한 사명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다함께 읽겠습니다.
19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이 찬양은 결론적으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피로 하신 일은 당신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 안에 평화를 이루신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이 역시도 명백히 당시 로마 제국에 저항하는 고백입니다. 잘 알려져 있듯이 로마는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유럽의 거대한 영토를 정복한 후 자신들이 세계에 평화를 가져왔다고 자부했습니다. 동시에 황제는 그런 평화를 안겨준 신적 존재로 숭배되었습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로마에 의한 평화’, “팍스 로마나”(Pax Romana)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철저히 낮아지고 자신의 전 존재와 인격을 십자가 위에서 산산이 부서뜨리며 “그리스도의 평화”, “팍스 크리스티나”(Pax Christina)를 세상 가운데 선언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칼과 힘에 근거한 로마의 평화가 얼마나 거짓되고 허무한 것인지를 폭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예수님을 왕으로 믿고 고백하는 우리 모두는 갈등과 다툼을 넘어 마땅히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따뜻한 사람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좀 더 참을 줄 아는 넉넉한 마음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특별히 자기보다 약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더욱더 낮은 자세로 다가가고 온유한 태도를 유지하시길 바랍니다. 그것이야말로 이 땅에 평화를 이루신 주님의 몸을 이루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속에 지켜야할 부르심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매우 조심스러운 말씀이지만, 저는 아무리 뜨겁게 찬양하고 기도하며 교회에서 봉사한다고 할지라도 끊임없이 사람들 사이에 편을 가르고 갈등을 부추기고 힘없는 이들을 따돌리는 사람들의 신앙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저는 감히 말합니다. 그런 사람들, 하나님 믿는 사람들 아닙니다. 반면에 믿음을 가진지 얼마 안 되고 성경에 대한 지식도 거의 없고 기도하는 게 서툴다 할지라도 항상 환한 미소를 지켜내며 공동체 안에 온기를 불어넣는 사람들, 그들이야말로 참 신앙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은 교회력의 시작인 대림절을 앞둔, 교회력의 가장 마지막인 “왕이신 그리스도 주일”입니다. 역사적으로 교회는 이 날을 지키며 그리스도 예수께서 온 세상의 유일한 진정한 왕이심을 함께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화려한 왕좌위에 앉아 강력한 힘과 권위로 사람들을 윽박지르고 억누른 로마 황제와 같지 않았습니다. 그와 정반대로 가장 낮고 비참한 곳을 향해 나아가 십자가 희생으로 모든 이들을 구해 내셨습니다.
마치, 다른 사람들의 눈에 보기에는 지극히 별 볼일 없고 초라하지만 그것을 건네는 이의 깊은 사랑이 담긴 작은 선물처럼,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연약한 한 아기로 이 땅에 오시어 당신의 다스림을 펼쳐가셨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의 모든 실패와 좌절을 은총의 열매로 바꾸어 주시었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진정한 왕이신 예수님의 손길을 따라 함께 그분의 몸 된 교회를 세워가며 널리 평화를 이루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설교 후 기도
왕이신 하나님
당신의 아들을 이 땅에 선물로 보내신 사랑에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눈에 보이는 작고 초라함을 넘어서는 주님의 창조와 다스림을 고백했던 신앙의 선배들처럼 우리 역시 주님의 몸 된 건강한 교회를 이루게 하시고 세상 가운데 평화를 널리 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섬김과 나눔으로 온 세계를 다스리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봉헌기도
온 세계를 지으시고 늘 함께 하시는 하나님
우리의 모든 실패와 좌절 가운데 끝내 이루시는 승리와 희망에 감사드리며 한 주간 구별한 삶의 예물을 드립니다. 기쁘게 받으시어 주님의 다스림을 이루는 일에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청년들을 위해 축복하며 기도합니다. 수능을 비롯한 여러 중요한 시험들을 이미 치렀고 또 앞둔 청년들이 있습니다. 시험 결과에 관계없이 언제나 신실하게 우리의 삶을 이끄시는 손길을 더욱 신뢰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가정과 학교와 직장에서 주님의 평화를 항상 누리며 몸과 마음의 건강을 지켜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보냄의 말씀
목사: 사랑하는 여러분, 평안히 돌아가십시오. 복음의 말씀을 들었으니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주님을 찬양하며 평화를 이루며 살아가십시오.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며 만물을 지으신 예수님의 은혜가 여러분과 날마다 함께 하십니다.
예담: 아멘, 왕이신 주님이 아닌 세상의 화려한 성공과 업적으로 향하곤 했던 눈길을 회개합니다. 예수님의 몸 된 교회를 아름답고 건강하게 세워가며 세상 속에 평화를 이루어 가겠습니다. 주님! 우리를 품어주시고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아멘.
축도
주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복을 주시고, 여러분을 지켜주십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얼굴을 여러분을 향해 비춰 주시고,
여러분을 은혜롭게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얼굴을 여러분을 향해 드시어,
여러분에게 평화 주십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님의 사귐이
왕이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통해 평화를 이루어 나가는
예담 청년들과 항상 함께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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