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2월 9일 목요일

마태복음 2장 1-12절 "성 밖에 태어난 왕"

주현절 후 첫 번째 주일, 2017년 1월 8일, 부산진교회 청년예배설교, 정대진 목사
마태복음 2장 1-12절 "성 밖에 태어난 왕"

기원
참 빛과 영광의 주 하나님
한 아기로 이 땅에 오셔서 주님의 왕 되심을 드러내신 예수님을 기억하는 주현절 이 후 첫 번째 주일 예배를 드립니다. 동방의 박사들처럼 온전한 경배로 오직 하나님만을 높이며 그 사랑을 깨닫는 예배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알게 모르게 지은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날마다 새로운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성경 – 마태복음 2장 1-12절
1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2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3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4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 5 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6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7 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8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9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서 있는지라 10 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11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12 그들은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 



설교 전 기도(성령의 조명을 구하는 기도)
말씀하시는 하나님. 
이 시간 우리에게 주신 말씀에 온 마음 다해 귀 기울이며 집중하길 원합니다. 말씀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변화시켜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설교 - “성 밖에 태어난 왕”
이스라엘 역사상 유일한 여왕인 아달랴는 본래 북이스라엘 폭군 아합의 딸로서 남유다왕 여호람의 아내였습니다. 그러나 남편 여호람이 즉위 7년 만에 숨을 거두고 뒤 이은 아들 아하시야 마저 일 년 만에 목숨을 잃자 권력에 눈이 먼 그녀는 손자들을 살해하고 남 유다의 왕위를 차지하고 6년 동안 불법적인 공포 정치를 자행하였습니다. 

하지만 즉위 7년 째 되던 해, 제사장 여호야다가 아하시야의 살아남은 아들인 요아스를 왕으로 내세우며 혁명을 일으켜 마침내 아달랴를 무찔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여호야다 혁명의 결과를 묘사한 성경의 기록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역대하 23장 21절 말씀을 우리가 가진 개역개정성경으로 제가 읽겠습니다.

“그 땅의 모든 백성이 즐거워하고 성중이 평온하더라.”

이것은 매우 자연스럽고 또 당연한 장면으로 보입니다. 잔인한 학정으로 백성들을 절망에 빠뜨린 지도자가 물러났을 때 모든 백성들이 기뻐 환호하고 성 안이 평온한 것은 전혀 이상할 것 없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공동번역 성경은 해당구절을 전혀 다르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지방민들은 모두 기뻐하는데, 서울은 잠잠하기만 하였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이 두 문장의 의미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금세 느끼실 겁니다. 이 차이는 개역개정에서 “평온”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가 우리에게 이미 평화를 뜻하는 단어로 잘 알려진 <샬롬>이 아닌 “침묵”에 더 가까운 의미를 지닌 다른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이 단어를 “평온”으로 번역해도 틀린 것은 아니기 때문에 개역개정성경은 ‘온 백성’과 ‘성’ 그리고 ‘기쁨’ 과 ‘평온’을 “순접”관계로 옮겼습니다. 그래서 ‘그 땅의 모든 백성이 즐거워했다. 그리고 성안이 평온했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하지만 원문의 의미를 보다 더 자세히 살펴보면 ‘그 땅의 모든 백성이 즐거워했다. 그러나 성안은 조용했다.’ 이렇게 “역접”이 더 적합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즉, 공동번역의 표현을 그대로 빌려오면 독재자 아달랴의 죽음으로 지방 사람들은 모두 기뻐하였지만 정반대로 수도 예루살렘 주민들은 조용히 잠잠히 있었다는 뜻이 됩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바로 오늘날과 고대의 “도시”가 갖는 의미가 확연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농경, 목축 사회를 형성했던 고대 중동 국가에서 도시란 단순히 큰 촌락의 의미를 넘어 왕을 중심으로 한 정치, 경제의 지리적 결정체를 상징합니다. 한 마디로 권력의 직접적인 혜택을 누리며 왕에 대한 강력한 충성심을 가진 사람들로 밀집한, 철저히 특권층만의 공간이 바로 요새화된 고대 ‘도시’입니다. 

따라서 여왕 아달랴의 6년 치세 기간 동안 당연히 그를 중심으로 한 권력 이익집단들이 두텁게 존재했을 것이며 그들 중 절대 다수가 예루살렘에 거주했음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들은 자신들에게 어마어마한 기득권을 부여한 여왕이 혁명에 의해 처단 됐을 때, 수도 바깥의 평범한 백성들과 더불어, 함께 기뻐하며 축제를 즐길 수 있었을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 대신 혁명군과 그들에 의해 새로 옹립된 왕에 의해 언제 심판 받을지 몰라 공포에 사로잡혀 조용히 숨을 죽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바로 그런 모습을 “지방민들은 모두 기뻐하는데, 서울은 잠잠하기만 하였다.”고 역대하 기자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고대 도시가 갖는 특성과 긴장감은 역대하 뿐만 아니라 예언서를 비롯한 구약 곳곳을 뒤덮고 있고 신약에까지 면면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오늘 함께 읽은 본문 속에서 예루살렘이 겪은 혼란과 불안입니다. 본문 3절 말씀 제가 읽겠습니다.

3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여기에 보면 이 날 도시 예루살렘을 휘감은 분위기를 한 단어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바로 “소동”입니다. 여기에 해당되는 헬라어 단어는 마태복음 14장 26절에서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이른 새벽 갈릴리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제자들이 유령으로 알고 무서워하며 놀라는 장면에서 사용된 단어와 같은 뿌리를 가집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 속 헤롯과 온 예루살렘이 빠져든 두려움과 공포역시 막연한 것이 아니라, 영혼 깊은 곳을 흔드는 실제적인 충격임을 알게 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앞서 살펴본 것처럼 예루살렘은 헤롯을 중심으로 한 특권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헤롯 왕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한 마디로 철저히 ‘권력 지향적’인 사람입니다. 헤롯은 유대 왕족 출신도 아니라, 순혈주의를 강조하는 유대 사회에서 짐승처럼 여기는 “에돔 족” 출신입니다. 그런 그가 유다의 왕이 될 수 있었던 까닭은 로마 제국을 향해 막대한 뇌물을 쏟아 부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렇게 로마 제국에 바치는 어마어마한 뇌물과 업적과 성과를 위해 유대 민중들을 무지막지 하게 착취 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헤롯의 권력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모든 백성들은 절망적인 빈곤에 허덕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그가 그렇게 병리적이고 광기 어리게 권력에 집착하면 집착할수록 권력을 잃는 것에 대한 주체할 수 없는 불안과 공포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그는 주변 사람들, 심지어 후계자로 거론되었던 두 아들을 죽일 정도였습니다. 그에 관해서 로마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헤롯의 아들이 되느니 헤롯의 돼지가 되는 게 낫다.”

결론적으로 보통의 삶을 살아가는 백성들에게 있어 헤롯 대왕과 그의 시대는 일상적으로 절망을 경험하던 나날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유다 전역에는 더 이상 권력층의 억압을 견디지 못해 끊임없이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이런 부패하고 일그러진 정치 체제를 뒤 바꿀 새로운 “유대인의 왕”, 곧 메시아를 갈망 했습니다. 


이렇듯 예수님이 태어날 당시는 헤롯왕을 중심으로 한 권력층과 일반 서민들이 극단적인 증오와 대립을 이루던 시대입니다. 그리고 그런 헤롯왕 곁에서 기득권을 누리며 호의호식하는 이들은 예루살렘에 모여 살았습니다. 

따라서 마치 여왕 아달랴의 시대와 같이 그 시대 도시 예루살렘 역시도 그 밖의 대다수 지역과 사회적 신분과 정치적 이해에 있어 극명한 차이를 보였습니다. 극단적으로 정리하자면 예루살렘 성 안의 사람들은 헤롯을 유대인의 왕으로 따르며 그 왕권을 유지하는데 골몰하는 반면 예루살렘 성 밖의 사람들 구약의 여러 예언자들이 약속한 “새로운 유대인의 왕”의 도래를 간절히 고대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탐욕과 폭력의 도시인 예루살렘에 어느 날 동방으로부터 한 무리의 박사들이 당도합니다. 그리고 온 성을 충격과 공포에 몰아넣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이들이 무얼 하는 사람들인지, 그리고 정확히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분분합니다. 그런데 몇 년 전 미국의 종교학자 리처드 호슬리 교수가 쓴 <크리스마스의 해방>에서 동방 박사들에 대한 매우 흥미롭고 설득력 있는 주장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연구에 의하면 이들은 별자리를 관측하고 자연과 계절의 변화를 읽는 사람들로서 제국의 풍요와 번영을 위해 왕에게 조언을 하는 최고 계급에 속하는 관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왕에게 경배 드리는 일에 매우 익숙한 사람들 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떠나온 “동방”은 대부분의 초기 교회 지도자들의 주장과 그 시대 기독교 미술 작품 속에 묘사되는 동방 박사들의 옷차림새 등을 종합할 때, 그들은 페르시아에서 왔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그 시대 페르시아 제국의 다른 이름인 ‘파르티아 제국’은 한창 흥왕 하는 로마 제국과 대결하며 차츰 쇠락해 가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동방 박사들은 로마 제국의 폭압적 확장을 저지하고 자신들의 고국을 포함한 동방 민족들의 존립을 위해 분투할 소명을 부여받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새로 태어날 유다 왕의 탄생에 주목하며 그를 경배하기 위해 먼 여정을 떠난 까닭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 아기가 로마 제국의 무서운 팽창에 맞서 세상에 평화를 가져다 줄 왕이 될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 기록된 동방 박사들의 아기 예수 경배사건은 고대 중동의 오랜 정치, 경제적 갈등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그제야 비로소 우리는 새로운 유대인의 왕의 탄생을 알리는 박사들의 이야기에 헤롯과 그를 중심한 온 예루살렘 사람들이 왜 그토록 공포에 떨었는지, 그리고 베들레헴 인근 두 살 이하의 어린 아이들을 그토록 끔찍하게 학살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유대인들의 새롭고 참된 왕은 거대한 로마제국의 힘에 기생하여 약한 이들을 착취하며 헤롯과 그 주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누리는 삶의 안락함을 철저히 뒤흔들고 무너뜨리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매우 엄중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이 세상에 한 아기로 나타나신 예수님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혹시 헤롯과 온 예루살렘 사람들처럼 예수님으로 인해 공포에 떨고, 심지어 처단하고 싶어 하지는 않으십니까? 이 말에 당연히 예수님의 오심을 기쁘게 환영한다고 대답하실 겁니다. 물론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성경과 성경의 시대를 면밀히 살펴 예수님을 성탄 연극 속 아기인형이 아닌, 역사를 생생히 살아낸 인물로 믿고 받아들일 때, 이 질문은 한층 더 육중한 무게감으로 다가 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누구나 크고 화려한 제국적 힘에 기대 편히 쉬고자하는 욕망을 지니기 때문입니다. 즉, 누구에게나 내면 깊은 곳에 헤롯 왕이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끊임없이 예수님을 환영하면서도 적대시 한다는 것을 유념해야 합니다. 우리라고 해서, 교회를 열심히 출석하고 봉사한다 해서 결코 예외가 아닙니다. 본문 속 헤롯 곁의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의 모습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바로 깨닫고 말씀을 성실히 연구하는 본인들의 직무를 소홀히 한 채 이미 권력과 면밀히 결탁한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헤롯왕의 의중과 그 결과를 뻔히 알면서도 자신들의 성경지식을 동원해 메시아의 베들레헴 출생을 예고한 미가서의 내용을 재빠르게 보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그들이 베들레헴 유아학살에 동조한 모습은 오늘날 열정어린 신앙을 자랑하지만 정작 예수님을 진정한 왕으로 섬기지 않는 오늘 우리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알게 모르게  성별과 학벌과 소득 등의 헛된 기준으로 사람들 사이에 벽을 쌓고 차별하는 일을 멈춰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더욱 가난해지고 다시 일어날 기회조차 박탈당하는 부조리한 현실에 눈을 떠야 합니다. 소수 몇몇 사람들의 특권을 선망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아름다운 숲을 이루는 시대를 열어가야 합니다.

만약 이를 등한시 한 채 막연한 환상 같은 언어로 예수님을 맞이한다면, 끊임없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많은 소유를 움켜쥐려고만 한다면 그리고 화려한 성공과 성취를 위해 힘없는 이들을 도구와 대상으로만 이용한다면 그것은 곧, 성탄의 복음에서 벗어나 헤롯의 길을 따라 걷고 있는 것을 뜻함을 반드시 마음에 새기시길 바랍니다.


그런 우리에게 본문 속 동방 박사들의 모습은 이 세상에 한 아기로 자신을 드러내신 예수님을 맞이함에 있어 깊은 성찰을 안겨 줍니다. 많이 낯설겠지만 지난 금요일인 1월 6일은 “주현절”이었습니다. 이 날은 동방박사들의 경배를 통해 드러난 예수님의 영광을 묵상하는 절기입니다. 그들은 별의 인도에 따라 베들레헴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 따르면 지금 마리아가 몸을 풀고 있는 곳은 가축을 키우는 축사이고 아기 예수님은 그 가운데 있는 모이통에 누워 있습니다. 

이는 성화들에 묘사된 것처럼 낭만적인 모습이 결코 아닙니다. 그 시대 축사는 대부분 동굴이었고 모이통 역시 돌을 활용한 것이었습니다. 더욱이 물이 귀한 중동에서 모이통을 자주 세척 하였을 리가 없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께서 아기로 태어나신 곳은 초라하고 더럽기 이를 데 없는 곳입니다.

바로 그 곳에 도착한 박사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것은 ‘유대인의 왕’에 대한 그들의 기대를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순간입니다. 상식을 가진 사람에게 구유 위에 아기 예수님은 가난하고 비참하기 이를 데 없는 빈민의 아들일 뿐 ‘유대인의 왕’은 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박사들은 자신들을 그 곳으로 이끈 우주적인 신비를 신뢰하며 그 아기에게 경배를 드렸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요? 세상을 참으로 바르게 세우는 길과 평화를 이루는 길은 바로 그 한 없이 어둡고 불결한 구유 위에 힘없이 누워있는 한 아기에게 있음을, 그렇게 그가 단지 유대인의 왕을 넘어 온 세상의 진정한 왕임을 고백하는 놀라운 성찰이 그들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진정한 행복과 만족은 견고한 예루살렘 성과 헤롯 궁전에 있지 않습니다. 거대한 로마 제국에도 있지 않습니다. 영원히 안전하리라 믿었던 모든 견고한 성들은 역사상 모든 제국의 운명과 같이 허무하게 사라질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참된 생명에서 멀어지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시선을 끊임없이, 성 밖의 태어나 그곳에서 동방 박사들에게 경배 받으신 아기 예수님께로 고정하시길 바랍니다. 그 분만이 진정 높임 받으실 우리의 왕이십니다. 주님께서 사랑과 정의로 우리 모두와 온 세계를 다스립니다. 따라서 어둔 마구간 구유와 그 위에 누인 아기처럼 처절한 절망과 좌절과 실패 한 복판에서 하나님의 은혜롭고 위대한 다스림이 찬란히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늘 마음 깊이 새시기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세상에 오심과 드러남을 거부하고 대적했던 헤롯을 중심으로 한 성 안 사람들의 거짓과 위선에서 벗어나 성 밖의 사람들과 더불어 동방 박사들이 본을 보인 것과 같이 아기 예수님의 왕 되심과 그 깊은 뜻을 바로 깨닫고 신뢰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설교 후 기도 
온 세상을 사랑과 정의로 다스리시는 왕이신 하나님
주현절 후 첫 번째 주일을 맞이하며, 동방 박사들의 경배를 받으신 아기 예수님의 모습을 말씀을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자기 자신과 온 백성들을 증오와 파멸로 몰아넣었던 헤롯의 어리석음과 정직히 마주하게 하여 주시고, 섬김과 희생 가운데 주님을 높인 동방 박사들의 모범을 본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어둡고 초라한 마구간을 은혜의 빛으로 밝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봉헌기도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
성 밖에 쓸쓸이 놓여 있는 우리의 모든 초라한 모습에 함께 하시며 찬란한 영광으로 이끄신 은혜를 높이며 한 주간 삶으로 구별한 예물을 드립니다. 기쁘게 받으시어 소외된 이웃들을 위해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예담 청년들을 위해 축복하며 기도합니다. 성 안으로 향하는 길에서 벗어나 성 밖으로 내딛는 선택 가운데 용기를 주시고 차갑고 쓸쓸한 저마다의 밤길을 지날 때 동행하여 주시옵소서. 몸과 마음에 건강을 주시며 마주하는 모든 관계들과 공부와 업무 속에서 지혜와 능력 가득히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파송의 말씀
목사: 사랑하는 여러분 평안히 돌아가십시오. 복음의 말씀을 들었으니 성 밖에 태어나 소외된 이웃들의 왕이 되신 예수님을 본받아 살아가십시오.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빈자리와 좌절 가운데 직접 함께 하시며 새 힘을 주십니다.

예담: 아멘, 더 높고 풍요로운 곳만을 향해 눈길을 보내며 연약한 이웃들에 무심하곤 했던 어리석음을 뉘우칩니다. 초라한 구유 위에 놓인 아기예수님을 향해 경배한 동방 박사들을 본받아 참된 예배와 섬김의 삶을 살아가겠습니다. 주님! 참 빛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시옵소서! 아멘.


축도 
주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복을 주시고, 여러분을 지켜주십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얼굴을 여러분을 향해 비춰 주시고,
여러분을 은혜롭게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얼굴을 여러분을 향해 드시어, 
여러분에게 평화 주십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님의 사귐이 
성 밖에 태어난 왕이신 예수님을 본받아
낮아짐과 섬김의 삶을 살아가는
예담 청년들과 항상 함께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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