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 후 두 번째 주일, 2016년 1월 3일, 부산진교회 청년예배 설교, 정대진 목사
룻기 4장 13-17절 "일상의 결실"
13 이에 보아스가 룻을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그에게 들어갔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게 하시므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 14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하지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15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이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네 며느리가 낳은 자로다 하니라 16 나오미가 아기를 받아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니 17 그의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지어 주되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하여 그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였더라
한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아기의 탄생은 언제나 어디서나 그 주변의 가족과 친한 이웃들에게 매우 커다란 기쁨과 축복의 사건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묘사된 아기 탄생에 대한 내용은 좀 특이하고 유별나다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우선 이웃 여인들이 아기를 낳은 당사자인 룻이 아닌 그의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우르르 몰려가서 아기의 출산을 두고 함께 기뻐하며 노래했습니다.
여기까지는 마을 공동체의 유대관계가 강한 농경문화의 하나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보이는 나오미의 행동과 그녀에 대한 이웃 여인들의 노래 가사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16절을 보면 나오미가 아기를 ‘받아 품에 품고’라고 기록되었는데, 우리말 번역만 보면 단순히 할머니가 손자를 끌어안고 돌보는 모습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받아’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동사 “봐티콰흐”는 이 아기에 대한 일정한 권리와 책임을 얻는 것을 암시합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17절입니다. 이웃 여인들은 지금 상황을 두고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상하지 않으십니까? 지금 나오미 품에 안겨진 “오벳”은 분명 룻의 아들이고 따라서 나오미의 손자입니다. 그런데 왜 그 아기를 가리켜 이웃 사람들은 ‘나오미의 아들’이라고 말했을까요? 그것은 아기 오벳이 룻의 아들이고 나오미의 손자이기 전에 14절에 기록된 바와 같이 나오미의 ‘기업 무를 자’(히, 고엘)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에 대해 더욱 깊이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눈을 더욱 크게 떠서 본문인 4장을 넘어 룻기 전체 특히 1장의 내용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난을 이유로 나오미가 그녀의 남편 엘리멜렉 그리고 두 아들과 함께, 이스라엘 사람들이 무시하고 혐오하던 모압 나라로 이민을 갔습니다. 하지만 부푼 기대와 희망과는 달리 그만 거기서 그녀는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곁에는 과부가 된 두 며느리만 남게 되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지만 고대 중동 사회에서 남자 없이 여자들만 살아간다는 것은 생존자체가 위협받을 정도로 매우 힘겨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오미는 모압 출신의 두 며느리에게 그녀들의 고향에 남길 권했습니다. 똑같이 과부 처지인데다 나이도 많은 나오미가 며느리들에게 짐만 될 뿐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며느리 중 하나인 오르바는 죄송함을 무릅쓰고 결국 시어머니에게서 떠나 고향에 남았습니다. 하지만 그와 달리 룻은 끝까지 나오미 곁에 머물며 베들레헴으로 함께 떠났습니다. 비록 그것으로 말미암아 결코 쉽지 않은 현실과 마주할 것이 분명했지만 사랑 많으신 늙고 힘없는 시어머니를 홀로 보내는 것이 내키지 않은데다 아직 그녀는 젊어서 나오미를 조금이나마 도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룻은 고향에 남아서 자신의 삶을 지탱해줄 또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지극히 상식적이고 현실적인 길 대신, 언어와 문화가 다른 것은 물론 자신과 같은 외국 사람들에게 철저히 배타적인 이스라엘에서 과부 시어머니를 모시고 함께 사는 험난한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그 낯선 땅 베들레헴에서 끼니를 잇기 위해 룻이 선택한 일은 바로 추수하는 들녘에 남겨진 이삭을 줍는 것이었습니다. 모세 율법에 따르면 가난하고 힘없는 이웃을 위해 곡식을 모두 거두지 말고 일부를 남겨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황량한 삶의 자리에서 그녀는 뜻밖의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됩니다. 바로 ‘보아스’입니다. 그녀가 이삭을 주은 땅의 주인인 그는 룻을 알아보고 시어머니를 향한 그녀의 갸륵한 마음을 어여쁘게 여겨 따뜻하고 친절하게 도움을 베풀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얘기를 룻으로부터 전해들은 나오미는 크게 환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왜냐하면 보아스는 죽은 그의 남편의 친척이었고 따라서 삶의 터전을 잃은 그들을 레위기 25장의 희년 법에 따라 도와줄 의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희년 법에 따르면 이스라엘 가운데 누군가가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부득이하게 자신의 땅을 팔고 빚을 지었을 때 그의 가까운 가족이나 친척이 “기업무를 자”가 되어 반드시 그의 빚을 대신 갚아 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겪는 현실적인 가난의 문제에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해결 방안을 희년 제도를 통해 마련하셨고 그 뜻을 행할 사람들을 ‘기업 무를 자’로 세우셨습니다.
중요한 점은 그렇게 ‘기업 무를 자’가 된다는 것은 철저히 책임과 희생만 따르지 혜택과 권리는 지극히 적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보아스는 자신 보다 먼저 ‘기업을 무를 책임’이 있는 다른 친척의 포기를 구태여 번거롭게 얻으면서 까지 그 의무를 수행했고 마침내 룻을 아내로 맞아들여, 아들 오벳을 낳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지금 나오미의 품에 안긴 아기 오벳은 나오미에게 단순히 손자만이 아닌 “생명의 회복자”이자 “노년의 봉양자” 입니다.
이와 같은 룻기 전체 이야기를 들여다보았을 때, 한 아기 ‘오벳’의 출생은 그의 부모인 보아스와 룻의 평범한 사랑의 결과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늙고 힘없는 시어머니를 위한 룻의 위대한 섬김과 또한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위한 보아스의 희생이 만나 이루어진 결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모든 과정을 잘 알고 있는 나오미의 이웃 사람들은 마치 자신들 일 인양 함께 기뻐하며 14, 15절에 기록된 찬양을 드렸습니다. 보다 쉬운 이해를 위해 새번역 성경으로 읽어 드리겠습니다.
14 그러자 이웃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말하였다. "주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이 집에 자손을 주셔서, 대가 끊어지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의 이름이 이스라엘에서 늘 기리어지기를 바랍니다.
15 시어머니를 사랑하는 며느리, 아들 일곱보다도 더 나은 며느리가 아기를 낳아 주었으니, 그 아기가 그대에게 생기를 되찾아 줄 것이며, 늘그막에 그대를 돌보아 줄 것입니다."
이렇게 룻기는 언제 읽어도 마음 따뜻해지는 훈훈한 가족의 사랑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룻기가 이것으로 그치지 않고 매우 의미심장한 내용을 알려주고 이야기의 매듭을 짓는 다는 점입니다.
다함께 17절 말씀 읽겠습니다.
17 그의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지어 주되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하여 그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였더라
룻기는 오벳이 이새의 아버지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즉, 지금 나오미의 품에 안긴 아기 오벳은 바로 다윗의 할아버지입니다. 그리고 그 다윗은 우리 모두 잘 알다시피 이스라엘 역사 속에 가장 위대한 왕입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그러한 다윗 왕의 위대함은 그 자신의 뛰어난 인격과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 나라의 공평과 정의를 바탕으로 왕의 자리를 섬겼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 까닭에 그는 이 땅에 이미 오셨고 또 다실 오실 메시아의 그림자 같은 존재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룻이 홀로된 시어머니 나오미를 모시고 봇짐을 짊어지며 낯설고 두려운 땅 베들레헴으로 향했을 때, 자신이 훗날 다윗 왕과 같은 위대한 인물의 증조할머니가 될 것을 알고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그 아름답고 위대한 희생이 자신의 이름에서 딴 제목의 성경에 기록되어 수천년이 지난 오늘 우리에게 까지 전해지리라고 과연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보아스가 보리밭에서 처음 룻을 보았을 때, 그리고 그녀를 위해 아낌없는 섬김과 나눔을 베풀었을 때, 과연 자신이 메시아의 육체적 조상이 되는 영광을 누리리라고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다만 자신들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곁에 있는 약하고 가난한 이들을 위해 묵묵히 섬기고 나누었을 뿐입니다.
그것은 결코 거창한 무언가가 아니라 그저 눈앞에 놓인 일상의 진정성 있는 연속이었고, 그 결과 한 아기가 태어났을 뿐입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그 아기를 통해 당신께서 이 땅에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평화의 서막을 열어가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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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6월 8일 수요기도회 설교 중 첨가 내용>
마침 우리는 지금 교회력에 따라 “오순절 후”의 시간들을 매 주일 보내고 있습니다. 1년 단위의 교회력에서 대림절로부터 시작해서 성탄절과 주현절 그리고 사순절과 부활절과 성령 강림절까지 이어지는 약 6개월 가량을 “특별 절기”라고 부릅니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과 부활을 중심으로 한 굵직한 구속사를 기념하는 특별한 주일들이 이 기간에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성령강림절 이후부터 대림절 전까지의 나머지 약 6개월을 가리켜서는 “일반 절기”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시기는 특별절기와 구별되는 아주 중요한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별거 없다.’는 사실입니다. 일반절기 기간 동안은 특별절기와는 달리 대단하게 기념할 만한 예배 없이 무난하게 흘러갑니다. 하지만 이 기간을 통해 그 ‘별거 없고 무난한 일상’ 역시 특별하고 화려한 절기들 못지않게 매우 중요한 예배의 순간들임을 거룩한 교회의 전통은 오늘 우리에게까지 알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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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예담 청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따른 다는 것은 어마어마하게 신비롭고 초월적인 무언가를 성취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끊임없이 ‘일상을 살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거창한 희생과 헌신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기인같은 금욕과 가학적인 자기 절제를 바라시지도, 결벽에 가까운 도덕적인 행동을 강요하시지도 않으십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아기의 탄생처럼, 많은 사람들이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삶의 모습들, 친구들과 어울려 수다를 떨고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고 좋아하는 영화를 보고 아름다운 음악을 듣는 그 일상을 소중히 여기길 바라십니다.
다만,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주님께서는 우리의 삶 주변에 고통가운데 소외된 이웃들을 외면하지 말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섬김의 손길을 내미는 것을 주저 말라고 성경을 통해 오늘 우리에게 말씀 하십니다.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 나라는 바로 그와 같은 작은 손길들이 한데 어우러져 완성된 모자이크와 같습니다. 그리고 그 거대한 모자이크의 중심에, 바로 예수님께서 한 아기로 서 계십니다. 그러므로 온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최종 구원의 결정적 시작이 바로 주님의 ‘아기 되심’으로 움터 올랐음을 예수님께서는 그 초라한 구유위에서 생생히 보여주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살리시기 위해 여러 방법들을 제치시고 굳이 당신의 아들을 한 아기로 이 땅에 보내는 길을 선택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어른이 되지 못한 아기들은 있어도 아기가 아니었던 어른은 아무도 없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진정한 인간다움은 곧 ‘아기다움’과 맞닿아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 아기다움의 연약함 속에 온 생명을 참으로 구원하는 진정한 힘과 능력이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여러분께 소개하고 싶은 영화의 한 장면이 있습니다. 3년 전에 개봉해서 큰 호평을 받은 영화 “그래비티”의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전작인 “칠드런 오브 맨” (Children of Men, 2006)입니다. 이 영화는 가까운 미래의 어두운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다른 비슷한 영화들처럼 외계인의 침공이나 거대한 자연 재해가 아니라 전지구적인 “불임”(不姙)을 소재로 다루고 있습니다.
정확한 원인을 알 수 없는 채로 더 이상 사람들은 아기를 낳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20년 가까운 시간이 흘러가며 사람들은 점점 더 인류의 멸종을 실감하고 까마득한 절망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리고 정부의 독재와 억압은 더더욱 심해져 갔고 그것에 반발한 사람들의 저항역시 만만치 않아서 결국 극도의 긴장과 폭력이 온 세계를 뒤덮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기적적으로 한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만약 독재정부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자기 나라만의 이익을 위해 불의하게 사용할 것이 뻔했습니다. 한 편 정부에 반대해 투쟁하는 사람들 역시도 자신들의 정치적인 목적만을 위해 그 아기를 이용하려 하였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주인공이 이 아기와 산모를 인도적인 의료연구 단체로 데려가는 힘겨운 과정이 바로 이 영화의 핵심 줄거리입니다.
그중 하이라이트는 주인공이 반란군에 붙잡혀 있던 산모와 아기를 우여곡절 끝에 다시 찾아오는 장면입니다. 그 때 반란군 지도자는 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I was carrying the baby up the stairs. I started crying
아기를 안고 계단을 오르면서 그만 울고 말았어.
I'd forgotten what they looked like. They're so beautiful. They're so tiny.
그동안 잊고 있었어. 아기가 그렇게 예쁘다는 것을. 그렇게 너무나 작다는 것을.”
그런 그를 뒤로 하고 주인공은 울고 있는 자신의 아기를 품에 안은 소녀와 함께 정부군과 반란군이 서로를 향해 격렬하게 포탄을 주고받는 건물 밖을 향해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20여년 만에 처음으로 아기 울음소리를 듣게 됩니다. 이 때,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영화의 한 장면을 다함께 보시겠습니다.
“Children of Men Baby Ceace-fire Scene” (YouTube)
사람들은 너무도 오랜 시간이 흘러 처음 듣는 아기의 울음소리에, 그 작디작은 몸짓에 경이로움을 표현합니다. 살기를 뿜어내며 달려들던 군인들이 총을 내려놓았습니다. 심지어 아기 앞에 무릎 꿇고 성호를 긋는 군인도 있었습니다.
한 아기의 작음이, 그의 철저한 무력함이 비록 잠시 동안이었지만 전쟁마저도 멈추게 하는 진정한 능력과 희망을 가지고 있음을 이 영화는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또한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기업 무를 자”가 되시려 사람들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한 아기로 이 땅 가운데 오신 성탄절 사건이 얼마나 위대하고 놀라운 은혜인지를 새삼 깨닫게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일상 가운데서 아기와 같은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애써 감추려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 연약함과 무지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룻과 보아스처럼 다른 이들의 미숙함을 하루하루 감싸고 돌보아주시길 바랍니다.
그 때, 그 모든 섬김의 결실들은 단지 우리들만의 잔치와 노래로 그치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알리는 희망의 증거가 됨을 믿고 소망하시길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한 아기 ‘오벳’이 단지 나오미의 평범한 손자로 그치지 않고 이새의 아버지이자 다윗의 할아버지임을 성경이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해주는 이유입니다.
이 모든 복음의 놀라운 신비와 능력을 바라보며 기꺼이 한 아기의 결실을 이루길 원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일상 가운데 섬김과 나눔을 결코 주저하지 않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소망 합니다.
기도 : 신실하신 하나님.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작은 섬김과 나눔을 결코 잊지 않으시고 그것을 통하여 진리와 생명의 열매를 맺어주심을 믿습니다. 기꺼이 아기와 같은 낮은 자세로 섬기는 것을 머뭇거리지 않게 하시고 우리의 일상을 통해 날마다 주님께 나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온 세계를 구하시려 한 아기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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