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2월 7일 화요일

요한복음 20장 19-29절 "기어이 찾아오는 평화"

부활절 네 번째 주일, 2016년 4월 17일, 부산진교회 청년예배 설교, 정대진 목사
요한복음 20장 19-29절 "기어이 찾아오는 평화"

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24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8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여러분 혹시 부활절이 언제인지 아시나요? 성탄절은 12월 25일이라고 쉽게 대답하시겠지만 부활절 날짜는 좀 갸우뚱 하실 겁니다. 부활절은 ‘춘분이 지나고 만월이 지나고 맞이하는 첫 번째 주일’입니다. 이렇게 부활절은 성탄절과 달리 음력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매년 날짜가 다릅니다. 그래서 올해의 경우는 비교적 이른 3월 27일 이었습니다.


하지만 지난 2년간 부활절은 4월 달에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저는 특별히 재작년 부활절을 아마도 평생 결코 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보냈던 부활절 중에 가장 아프고 슬펐던 날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기억하시겠지만 2014년 고난주간 수요일이었던, 4월 16일 서해 팽목항 앞에서, 수학여행 가는 안산 단원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을 비롯한 수 백 명의 사람들을 태운 “세월호”가 침몰하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세계 평균이상의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이룬 나라에서 도저히 일어날 것 같지 않았던 영화 같은 사건에 온 나라는 충격과 슬픔에 사로잡혔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셨겠지만, 저 역시 무척 놀랐고 큰 아픔에 괴로워했습니다. 그리고 매일 뉴스를 확인하며 쉼 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애타게 기도하고 간절히 바라보아도 스스로 탈출한 사람들 외에는, 단 한 명도 구조하지 못했다는 끔찍한 사실에 그저 절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세월호 사건에 대한 깊은 성찰과 반성 없이 유가족들을 향해 평생 지울 수 없는 막말을 서슴지 않는 정치권과 언론의 횡포에 분개하였습니다. 게다가 그런 몰지각한 행동들에 상당수 대형교회 목사들이 동조하는 모습을 보며 저는 목회자의 한 사람으로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참담함을 느꼈습니다.

2년 전, 그런 절망 가운데 맞이한 부활절이었기에, 저는 도무지 여느 해처럼 주님의 부활을 마냥 기뻐 찬양하며 즐거워할 수 없었습니다. 대신 그 마음의 자리에 다음과 같은 슬픔과 원망이 자리 잡았습니다.

“대체 하나님은 어디 계실까? 왜 하나님은 애타게 살기 원하는 저 꽃다운 아이들을 내버려 두실까? 왜 하나님은 피해자 가족들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실까?”

이런 고통스런 질문들에 대한 나름의 그럴듯한 논리들이 제 머릿속을 이리저리 흘러 다니긴 했지만 그것이 제 마음 깊은 슬픔과 아픔을 완전히 해결해주지는 못했습니다. 대신 서해 앞바다에서 서서히 잠기는 뒤집힌 배의 모습과 진도체육관에서 울부짖는 유가족들의 모습이 어둠과 절망의 선명한 상징이 되어 좀처럼 제 가슴 속을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오늘날 대한민국의 극심한 모순과 병폐를 새삼 확인하며 깊은 고통에 빠지게 됩니다.


지난 화요일인 4월 12일 저녁, 서울 대한문 앞에서는 감신, 장신, 총신, 한신. 이렇게 4개 신학교 학생들 약 100여명이 모여 세월호 2주기를 추모하는 기도회가 있었습니다. 특별히 그 자리에는 아직 세월호에서 수습되지 못한 9명 중 하나인 허다윤 양의 언니 허서윤씨와 어머니 박은미 씨가 함께 하셨습니다.

기독교인인 박은미 씨는 신학생들 앞에 서서 눈물과 함께 다음과 같은 부탁의 말을 하였습니다.

“단원고 2학년 2반 허다윤 엄마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외치셨던 것처럼, 아직 세월호에 사람이 있습니다.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한 아홉 명의 미수습자가 있습니다. 그중에 한 명이 제 딸입니다. (중략)


아직 돌아오지 못한 아홉 명, 은화, 다윤이, 영인이, 현철이, 양승진 선생님, 고창석 선생님, 권재근 님, 어린 혁규, 이영숙 님, 가족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여러분이 많이 기도해 주시고요. 그리고 수색 종료하기 전에는 저희를 실종자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러나 실종은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게 실종입니다. 저희는 아직 정부가 수습을 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저희들은 미수습자라고 부릅니다. (중략)


여러분이 아직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한 미수습자 아홉 명을 위해서 그들이 길 잃어버린 양이라 생각하시고 그분들 찾는 일에 여러분의 더 많은 기도와 더 많은 관심과 더 많은 격려를 위해서 부탁드립니다. 그래서 세월호 배가 뭍으로 올라와서 가족을 찾는 것이고, 그 세월호 배를 가지고 진실을 밝히는 데 사용될 거라고 믿습니다. 다시 한 번 부탁드립니다.


정말 너무 지쳐서 너무 힘들어서 다윤이한테 너무 미안해서 하루하루 사는 게 너무 지옥 같습니다. 하나님이 너무 밉습니다. 하나님이 너무 원망스럽습니다. 아이가 죽은 것도 억울한데, 왜 그 마지막이 다윤이가 됐는지, 하나님이 너무 밉습니다. 도와주세요, 제발. 아홉 명의 미수습자를 꼭 찾을 수 있도록, 온전한 선체가 인양될 수 있도록, 유실 없이 인양될 수 있도록, 여기 오신 많은 분들이 꼭 기도해 주시고 관심 가져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지금 부활절기를 보내며 예수님의 다시 사심에 기뻐하고 감사하며 찬양과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는 사실 하나는 부활을 믿음에도 여전히 너무도 고통스럽고 힘겨운 일들이 어김없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흔한 오해와는 달리, 하나님을 열심히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도 시련과 절망은 좀처럼 빗겨가지 않습니다. 세월호처럼, 도무지 우리의 생각으로는 이해될 수 없는 끔찍한 일들이 성큼성큼 덮쳐오곤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때로 주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말씀 역시 그렇게 평화를 완전히 잃은 채 어둠과 절망에 갇힌 사람들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시고 남겨진 제자들입니다. 우리가 복음서를 통해 분명히 확인할 수 있듯이 주님의 제자들 역시 그 시대 다른 유대인과 별반 다르지 않은 욕망의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들 또한 주님께서 다윗 같은 강한 왕이 되어 용맹하게 군대를 이끌어 로마 제국을 몰아내리라 믿었습니다. 게다가 예수님께서 왕이 되시면 자신들은 공로를 인정받아 높은 자리를 차지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그들의 기대와 소원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고 5일 만에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습니다. 주님께서는 화려한 왕관 대신 가시 면류관을 머리에 쓰시고 휘황찬란한 왕의 예복을 입는 대신 벌거벗긴 채로, 십자가 위에 매달려 비참하게 죽임 당하셨습니다.

문제는 이런 주님의 죽음이 단순히 그 자신의 개인적인 죄의 결과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가장 권위 있는 의회의 인준을 거쳐 로마총독의 재판을 받아 하나님을 모독하고 로마제국에 반역을 한 혐의로 극악한 죄인으로서 처벌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동안 공개적으로 예수님 곁을 지켰던 제자들은 그 시대 권력자들의 눈에 어떻게 보였을까요? 그들은 사형수인 예수님의 공범으로 지목되었습니다. 따라서 제자들 역시 곧 사람들에게 잡혀 끌려가 예수님에 버금가는 막중한 처벌을 받을 것이 분명했습니다.

과연 이 때 그들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그들은 우리가 감히 상상도 못할 두려움과 절망에 사로 잡혔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 그들의 마음 상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바로 “닫힌 문”입니다. 다함께 19절 말씀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19절 말씀에 따르면 제자들이 숨죽이며 모여 있는 “이 날”은 안식일이 지나고 첫 날입니다. 이것은 오늘 본문 속 제자들의 마음 상태와 관련해서 매우 주목해야할 시간적인 배경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전날에 십자가에 달려 목숨을 잃으셨습니다. 그러니까 바로 그 다음 날이 안식일입니다. 그런데 안식일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쉬는 날”입니다. 이 시대에 이르러서는 율법과 관련한 여러 계명들이 치밀하게 발달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별거 아닌 작은 행동들도 “일 하는 것”으로 여겨져서 엄격히 금지되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잡아서 죽인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 역시 안식일에는 마음대로 법을 집행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예수님의 공범이자 도망자인 자신들을 그들이 언제 잡으러 온다고 예상했을까요? 당연히 예수님께서 처형당하시고 이어진 안식일이 지난 다음날인 바로 지금 오늘! 자신들을 체포하러 올 거라 예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처럼 사람들에게 모욕당하고 고난 받다가 목숨을 잃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라 믿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습니다. 그리고 마치 무덤 안에 갇힌 것처럼 그들은 문을 걸어 잠그며 자신들의 모든 빛과 생명과 희망도 함께 닫아 버리고 한없는 어둠과 절망 속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그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다시 한 번 19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제자들이 무서움에 떨며 모든 문들을 걸어 잠갔음에도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께서는 그들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평화”를 선언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더 이상 몸의 한계에 얽매이지 않으시고 공간의 경계를 뛰어넘으시어 그들 곁으로 다가오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다시 살아나시고 곧바로 찬란한 모습으로 하늘 위에 오르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당신을 배신하고 떠난 제자들에게, 여전히 죽음의 절망과 어둠에 사로잡힌 그들에게, 그 모든 경계를 훌쩍 넘어 다가가 그들을 위해 평화를 기원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모두 세월호의 희생자와 그 가족들처럼 그리고 함께 모여 문을 걸어 잠근,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때때로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우리를 숨 막히게 하는 여러 비극적인 상황들 속에서 너무나 힘없고 초라한 스스로를 발견하곤 합니다.

하지만 바로 그런 우리를 향해 다시 사신 주님께서 모든 경계를 뛰어 넘어 다가오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제자들이 먼저 예수님을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당신이 다시 살아나실 것을 이미 여러 차례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도무지 부활을 믿기는커녕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위에서 사람들의 가장 깊은 죽음 속에 함께 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생각과 한계를 뛰어 넘어 찾아오시어 거듭거듭 “평화”를 선언하셨음을 결코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이토록 놀랍고 기쁜 부활의 현장에 함께하지 않은 제자를 요한복음은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로 도마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그를 가리켜 “의심이 많은 제자”라고 얘기합니다. 바로 본문 속 사건 때문에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제외하고는 성경 어디에도 도마가 “의심”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요한복음 11장 16절에 보면, 도마는 다른 제자들에게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결기 있게 말했습니다. 즉 그는 죽음까지도 감수하고 예수님을 따랐던 용기 있고 의지가 강한 제자입니다. 물론 우리가 본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도마가 다른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에 대해 하는 말을 믿지 않은 것은 분명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도마의 모습을 대하는 정확한 태도는 그런 그의 상처 입은 믿음을 한심해 하는 것이 아니라 공감하는 것입니다.

그는 왜 자신의 손을 예수님의 손과 허리에 있는 못 자국과 창 자국에 넣어보지 않고는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한다고 말했을까요? 그건 그만큼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이 그에게 크나큰 상실과 충격을 안겨주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 역시 그런 그와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월호를 앞에서 그리고 그 외에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여러 괴로운 일들을 지나며, 앞서 소개한 박은미 어머니처럼 자연스럽게 “하나님이 너무 밉습니다.”라고 고통스럽게 토로하곤 합니다. 따라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크게 화를 내는 도마는 우리 모두의 마음 깊이 간직한, 하나님을 향한 근본적인 질문과 원망을 대신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더욱 주목해야할 것은 예수님께서는 또 다시 나타나 그런 도마를 향해서도 평화를 선언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다함께 26, 27절 말씀 읽겠습니다.

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예수님께서는 8일 뒤에, 여전히 굳게 닫힌 문을 지나 이제는 도마를 포함한 제자들에게 지난번과 똑같이 그들 가운데 서서 평화를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을 대표해서 고통 속에 의심했던 도마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때때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대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의심을 갖는 것은 불경한 일이 아니라 너무나 자연스러운 모습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으로부터의 버림받음을 처절하게 경험하며 울부짖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반드시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우리를 대신해 죽임 당하신 예수님께서 바로 우리를 위해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겪는 모든 어둠과 죽음과 절망의 시간들은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우리는 저마다 걸어 잠근 그 모든 닫힌 문을 넘어, 육중한 침묵에 잠긴 저 깊은 바다 속까지 기어이 찾아오시는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의 모든 의심을 툭툭 떨쳐버리고 믿음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주님의 다시 사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부활의 빛과 생명과 희망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역시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향해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라고 외치며 도마처럼 믿음의 고백을 드려야 합니다.


앞서 소개한, 세월호 참사 2주기 추모 신학생 기도회에서 설교를 맡은 감신대 은퇴교수 이정배 목사님은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부활 후 첫날, 여인들이 올라갔습니다. 막혀 있을 줄 알았던 그 무덤의 돌덩이가 치워져 있었습니다. (중략)



아무리 큰 권력을 가지고, 큰 바위덩어리와 같은 권력을 가지고 진실을 막으려고 해도, 바위덩어리는 누군가에 의해 치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바위덩어리가 치워졌습니다. 진실이 갇혀 있지 않고 진실이 살아서 고통 받는 사람들 속에 이야기되고 있다고 하는 것. 이것이 부활의 진리이고, 부활 첫날의 기적이었습니다. 누가 진실을 가두려고 하는가. 아무리 무거운 바위덩어리라도 진실을 가릴 수는 없습니다. 어떤 권력도 결코 그리 할 수 없습니다. 



세월호의 침몰과 부활은 앞으로 영원토록 같이 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2년 전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을 때가 부활절 3일 전이기 때문입니다. 그 304명의 아이들을 물속에 가둔 채 우리는 “사셨다, 사셨다, 예수가 사셨다” 그 부활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304명을 물속에 가둬 놓고 부활의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요? 앞으로도 영원히 부활절과 세월호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우리 역사 속에서, 사는 내내 함께할 수밖에 없는 운명적인 사건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중략)



우리 시대의 좁은 길. 그것이 무엇일까요? 모든 사람들의 지시와 그만하라는 동정, 피로감에 젖은 그 눈총을 받으면서도, 진실은 결코 사라질 수 없다고 믿으며 우리의 강퍅한 마음속에서 피어나는 하나의 꽃, 사람의 꽃, 노란 리본을 우리가 피우며 다닐 때, 그래야 이 사회는 달라질 수 있고, 여러분은 이 시대에 좁은 길을 가는 신학생의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노란 꽃, 우리가 끝까지 피워내고 지켜 냅시다.” (가급적 원문을 그대로 살리되 구어체 문장과 반말투의 표현은 임의로 고침)

저는 이 설교문의 마지막 단락을 이렇게 바꿔서 다시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그래야 이 사회는 달라질 수 있고, 여러분은 이 시대에 좁은 길을 가는 ‘그리스도인’의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월호 이전의 기독청년과 이후의 기독청년은 분명 달라야 합니다. 여전히 이 땅에는 세월호 희생자들의 가족과 친구들을 비롯해서 평화를 빼앗긴 채 깊고 깊은 슬픔 속에 잠긴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기어이 우리를 찾아오셔서 평화를 선언하신 것처럼 또한 우리를 그들 가운데 평화의 전령으로 보내셨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마다 깊은 절망의 시간을 지나며 하나님께서 정말 살아 계시는지 대해 가슴 아픈 물음표를 계속 던지게 됩니다. 하지만 바로 우리의 다가감을 통해 그들이 부활의 평화와 마주할 수 있다는 소중한 진리를 항상 마음에 새기길 바랍니다. 그런 우리 모두에게 성령님께서 항상 함께 하십니다. 그렇게 부활의 참된 의미를 날마다 더욱 깊이 알아가며 평화의 증인이 되는 모두가 되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참 평화를 주신 하나님.
두려움과 절망 속에 문을 걸어 잠근 제자들이 곧 우리입니다. 다시 사신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도마가 바로 우리입니다. 그런 우리를 기어이 찾아오시는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봅니다. 주님께서 반복하며 선언하시는 평화를 끌어안고 나아갑니다. 날마다 부활을 참으로 믿으며 그 생명을 우리의 삶으로 일구어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특별히 이 시간 여전히, 더욱 깊은 절망과 슬픔에 잠긴 세월호 희생자들의 가족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들의 아픔을 위로하여 주시고 올바른 진상 규명과 보상이 이루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아직도 저 깊은 바다 속에 잠겨 있는 미수습된 9명이 있습니다. ‘고창석 선생님, 권재근 아버님, 권혁규 어린이, 남현철 학생, 박영인 학생, 양승진 선생님, 이영숙 님, 조은화 학생, 허다윤 학생’. 주님! 이들 가족들의 눈물을 닦아주시고 선체 훼손 없는 세월호 인양이 무사히 이뤄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주님이시며 우리의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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