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순절 후 다섯 번째 주일, 2016년 6월 19일, 부산진교회 청년예배설교, 정대진 목사
데살로니가전서 1장 1-10절 “데살로니가로부터 들려온 소식”
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2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4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5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7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8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9 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들어갔는지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 10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저는 작년 가을에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목회자가 된다는 것이 굉장히 부담스러운 일이긴 했지만 한편으로 목사로서 하고 싶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클러지 칼라(clergy collar)로 된 셔츠를 입는 일입니다. 예전부터 그 셔츠를 입으신 목사님들이 참 멋있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안수 받기 전에 성의사에서 가운을 맞추면서 덩달아 클러지 셔츠도 함께 구입했습니다. 그러면서 가급적 그 옷을 자주 입을 것을 결심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지간하면 잘 입지 않습니다. 이 옷의 원래 취지가 목회자의 평상복임에도 주로 새벽기도회 때 설교하거나 교회 밖으로 외출할 일 없을 때만 주로 착용합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에게 노출되는 복장을 통해 목사라는 제 신분이 드러나는 게 상당히 부담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이 부산의 험한 도로문화에서 운전을 하며 온갖 일들을 겪으면서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좀 더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비단 “목사”라는 직분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조차 남들 앞에 잘 드러내지 못했습니다. 저는 재작년까지 서울에서 기관사역을 하며 매일 아침과 저녁에 지하철로 출퇴근을 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때 전도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지하철에서 거의 성경을 읽지 못했습니다. 제가 가진 아이패드나 아이폰으로 얼마든지 눈에 덜 띄고 편하게 말씀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전혀 주위에 피해를 주지 않음에도 그 비좁은 공간 안에 있는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몹시 부담스러웠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의 안 좋은 모습들이 뉴스에 크게 보도 될 때마다, 또한 몇몇 목사님들의 부패와 타락이 적나라하게 인터넷을 떠돌 때마다 더더욱 제가 가진 기독교 신앙을 남들 앞에 밝히는 것을 주저하는 연약한 모습을 발견할 때가 참 많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자신이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을 주변에 스스럼없이 잘 밝히십니까? 아니면 혹시 여러분도 저처럼 주위 다른 사람들에게 기독교인이라는 정체성이 공개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때때로 꺼려하지는 않으셨습니까? 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에게 있어 기독교 신앙 그리고 그 신앙의 공동체인 교회는 과연 어떤 의미인가요? 그것이 여러분 삶의 소중한 진리입니까? 아니면 솔직히 뭔가 답답하고 막막한 억압과 굴레라고 생각하지는 않으셨습니까? 그래서 혹시 기독교인으로서의 자신의 모습이 때때로 초라하고 조금은 부끄럽게 여겨지지는 않았습니까?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말씀에는 바로 이와 흡사한 문제의식들이 바탕에 깔려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는 신약성경 전체 중에서 가장 먼저 기록됐을 것으로 거의 확실시 되는 책입니다. 그래서 대략 주후 50년경에 완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불과 20년도 지나지 않은 때에 이 편지를 적었습니다. 따라서 이때는 아직 교회가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하고 여러 한계에 부딪혔을 때였습니다.
그래서 이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는 교인 숫자도 당연히 무척 적었을 뿐만 아니라 조직과 체계도 제대로 갖춰있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교회라기보다는 “모임”으로 보는 게 더욱 적당할 정도로 여러모로 미약하고 초라해 보였습니다.
반면, 이 교회가 위치한 “데살로니가”는 마케도니아 지역 최대의 도시로서 로마제국 의회에 자신들의 대표를 뽑아 보낼 정도로 정치적으로 매우 막강한 도시였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에그나티아”라는 이름의 넓은 도로와 항구까지 가지고 있는 무역과 상업의 중심지이기도 했습니다. 때문에 주후 150년경에는 인구가 약 20만 명이나 되는, 당시 기준으로 매우 거대한 도시여서 “전 마케토니아의 어머니”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였습니다.
그렇기에 당연히 그 곳 데살로니가에는 많은 사람들과 돈이 오갔고 동시에 문화 교류도 무척 활발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와 이집트를 비롯한 당시 유럽과 중동의 다양한 종교들이 그 도시로 흘러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그 종교들 대부분은 커다랗고 화려한 신전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로마제국의 주요 종교의식에 참여하며 상당한 영향력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앞서 말씀 드렸듯이, 그에 비해 데살로니가 교회는 그들과 너무나 대조되는 작고 초라한 모습을 지녔습니다. 또한 결정적으로 이스라엘 변방 시골에 태어나 로마제국의 반역범으로 극형에 처한 한 남자가 실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났다는 기독교의 복음은 그 시대 교양 있는 데살로니가 시민들이 듣기에 매우 허무맹랑한 이야기였습니다.
정리하자면 이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는 그 교회가 위치한 데살로니가 도시와 견주어 볼 때 너무나 볼 품 없었습니다. 때문에 그 시대 사람들의 눈에 보기에 교회는 뭐 하나 대단할 것 없는 작은 모임에 불과 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참여하는 기독교인들을 정신 나간 어리석은 사람들로 보였습니다.
게다가 사도행전 17장 1절의 기록에 따르면 데살로니가에는 유대교 회당이 있을 정도로 이미 상당수의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곳 교인들은 그 화려한 도시의 시민들뿐만 아니라 그들을 ‘이단’으로 여기고 멸시하는 유대인들에게도 이중으로 많은 핍박을 받아야 했습니다.
바울은 이런 데살로니가 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늘 많은 걱정과 불안에 사로잡혔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바로 이 교회를 세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7장의 기록에 따르면 바울은 실라와 디모데를 데리고 빌립보를 떠나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거쳐 마침내 데살로니가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그 곳에서 3주 동안 머물며 전도한 끝에 “야손”이라는 사람의 집에서 데살로니가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렇게 교회가 생긴 것을 알게 된 유대인들은 분노하며 야손의 집으로 찾아가 바울을 잡으려 하였습니다. 하지만 마침 바울은 그 자리에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대신 야손을 잡아서 끌고 갔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상당한 액수의 벌금을 물게 했습니다. 이런 까닭에 바울은 교회의 안전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아테네로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늘 미안함과 염려에 사로잡혔습니다. 데살로니가의 눈부시게 화려한 도시 문화와 비교할 때 그 곳에 위치한 교회가 얼마나 작고 연약한지 그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여러 번 그들을 향해 가려 하였지만 매번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바울은 디모데가 자신을 대신해 그곳을 다녀와서 들려주는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염려대로 교회가 도시의 거대한 힘과 무게 가운데 여러 환난을 겪으며 망하고 무너진 것이 아니라 도리어 생생히 살아남아 아름다운 복음의 공동체로 자라가고 있다는 반가운 이야기였습니다.
다함께 말씀을 통해 확인해 보겠습니다. 본문 6-8절 말씀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7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8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우선 6절 말씀을 보면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의 근심과 걱정과는 달리 성령님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을 비롯한 복음전도자들과 주님을 본받았습니다. 그리고 7, 8절을 보면 이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들이 데살로니가를 넘어 마케도니아와 아가야에 있는 다른 교회들에게도 모범이 되어서 그들의 믿음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와 같은 놀라운 일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을까요?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뭐하나 딱히 내세울 것 없던 초라한 겉모습의 데살로니가 교회는 당연히 자신들이 속한 도시의 여러 화려한 문화와 종교들에 짓눌려 금세 사그라들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가 어떻게 이 땅에서 먼지처럼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더욱 풍성히 살아남아 오늘 우리에게까지 이를 수 있었을까요? 또한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로부터 들려온 소식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감사한 근본적인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다함께 9-10절 말씀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9 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들어갔는지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
10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먼저 9절을 보면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이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10절을 보면 그들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하늘로부터 다시 오실 것을 기다렸습니다.
즉,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두고 기뻐하며 감사한 까닭은 그들이 열심히 전도해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부흥하고 성장하는 소위 대형 교회를 이루어서가 아닙니다. 교인 중에 힘 있고 돈 많은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을 통해 교회가 세상에 힘을 과시해서도 아닙니다. 사람들 눈에 한 없이 초라해 보이는 그 작고 연약한 신앙 공동체가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소중하고 당당하게 간직하였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비록 사람들의 눈에는 자신들의 신앙과 교회가 초라해 보일지라도 오직 주님만이 진실로 살아계신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믿고 고백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을 둘러싼 로마제국의 우상들이 분명 겉모습은 화려할지언정 거짓되고 헛되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위대하고 강해 보이지만 실상 한없이 연약한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 로마 황제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만이 온 세계의 진정한 통치자이심을 진심으로 고백하였습니다.
바울은 바로 그런 데살로니가 교회를 통해 지난 세월, 자신이 거대한 도시가 상징하는 화려한 명성과 성공을 뒤로하고 작은 교회의 겉모습처럼 초라해 보이는 복음을 믿고 전해 왔던 삶이 결코 헛되거나 무의미한 것이 아님을 다시금 가슴 벅차게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자였을 뿐만 아니라 탁월한 율법 교육을 우수하게 받으며 자라왔습니다. 그래서 그의 앞에는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민족지도자로서의 성공적인 삶이 탄탄하게 보장돼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그는 남들이 선망하는 화려한 도시의 삶을 살아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어느 날 갑자기 다메섹으로 향하는 길 위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고백하며 그것을 공개적으로 사람들에게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지금껏 살아왔던 도시의 생활과는 정반대되는 빈들의 삶을 살아가며 온갖 상실과 고통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바울이라고 해서 그러한 지나온 시간에 대해 후회와 갈등이 없었겠습니까? 그가 어린 시절 함께 공부하고 어울려 놀았던 친구들이 화려한 성공을 이루고 상류층의 특권을 누리며 살아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리고 그런 그들과 완전히 다른 자신을 미련하고 어리석게 보는 시선들을 느끼면서 항상 기쁨과 감사를 지킬 수 있었겠습니까? 바울 역시도 도시의 화려함와 극명히 대조되는 교회의 초라한 모습과 같은 자신의 하루하루를 돌이켜보며 때때로 비참함에 사로잡혔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 데살로니가로부터 한 가지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리고 그 소식을 통해 주님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 가운데 생명력을 푸르게 지켜나가는 교회의 모습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이 전하는 복음과 그것을 실현하는 삶이 결코 무의미 하지 않고, 도리어 이 세상 그 무엇보다 가장 귀하고 소중한 것임을 또다시 감격 하며 깨닫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복음과 진리는 여러 환난 가운데서도 교회와 성도들을 굳건하게 세우며 세상을 변화시키는 참된 희망이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설교를 시작하며 물어본 질문을 다시 한 번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에게 있어 기독교 신앙과 교회는 과연 어떤 의미입니까? 그것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기꺼이 고백할 수 있는 삶의 우선순위 입니까?
오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의 신앙을 무분별하고 몰상식하게 공개적으로 드러내라는 말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배려 없이 자신의 신앙을 일방적으로 과시하는 것은 분명 무척 어리석은 일이고, 때때로 어느 정도 감추고 자제하는 것은 매우 지혜로운 일입니다.
다만, 우리는 부산이라는 이 거대한 도시 한복판에서 또 다른 데살로니가의 문화와 속도에 압도당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때때로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십자가와 부활 신앙은 이 화려한 세상 속에서 너무나 초라하고 어리석게 보일 때가 많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런 믿음을 가진 기독교인이라는 사실 앞에 떳떳하지 못할 때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럴 때마다 오늘 함께 읽은 말씀에 담긴 바울의 감사를 기억해야만 합니다. 사람들의 눈에 교회가 어떻게 보이건 간에 심지어 우리 자신조차 복음을 부끄럽게 여길지라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만이, 그리고 그분의 그 위대하고 아름다운 희생과 다스림만이 온 세계를 참으로 살리는 진리임을 더욱 굳게 믿으며 함께 나눠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 부산진교회와 관련해서 여러분께 부탁드립니다. 제가 우리교회에 온지, 이제 겨우 6개월이 되어 갑니다. 그렇게 지나온 시간 동안 저는 우리교회의 저력과 강점을 충분히 확인하였습니다. 우리교회는 오랜 역사 속에 낡아진 교회가 아니라 분명히 아름다운 성숙을 이룬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에게는 그런 애정과 긍지 못지않게 불만과 아쉬움도 조금은 있을 줄 줄 압니다. 그런 여러분께 거듭 당부 드립니다. 우리가 속한 이 부산진교회를 더욱 아끼고 사랑하시길 바랍니다. 이 교회의 미래는 저와 같은 목회자도 장로님들도 권사님들도 아닌 바로 여러분의 어깨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아름답고 소중한 공동체일 수 있는 까닭은 결코 그 자체가 완벽해서가 아닙니다. 마치 데살로니가교회처럼, 때때로 초라하고 씁쓸해 보이는 모습과 상황들이 보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이 연약한 공동체를 통해 우리가 함께 살아계신 하나님을 예배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에 모여 서로 교회를 이루고 또 교회를 섬기는 일을 항상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 청년부, 예담교회에 지금 많은 일꾼들이 필요합니다. 물론 저는 여러분이 교회 일에 힘들게 치여 사는 걸 원치 않습니다. 제가 기회가 되는대로 교회 생활보다 일상을 강조하는 까닭도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충분히 가능한 봉사마저도 꺼리고 외면하면서 그저 받으려고만 하는 태도가 정당화 될 수는 없습니다. 교회를 통해 우리에게 참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께서 교회를 향한 우리의 섬김과 헌신을 결코 잊지 않으시고 헛되게 하지 않으심을 반드시 믿으시면서 예담 공동체를 위해 꼭 필요한 일들에 동참하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우리 모두 저마다 매일 마주하는 데살로니가 도시의 거짓되고 헛된 힘과 화려함에 짓눌리지 말고 도리어 이 시대의 또 다른 데살로니가 교회를 우리 부산진교회와 예담교회 안에 함께 이루어 나가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교회를 세우시고 돌보시는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더욱 담대히 바라보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길 간절히 소망하고 축복합니다.
기도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
우리는 거대하고 화려한 데살로니가 도시에서 살아가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겉모습처럼 때때로 십자가와 복음을 초라하고 부끄럽게 여기곤 하였습니다.
하지만 주님! 십자가와 교회가 아름답고 놀라운 것은 결코 그 모양새가 크고 웅장하기 때문이 아니라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바로 거기에 함께하시고 구원의 도구로 사용하시기 때문임을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하나님만이 오직 우리가 참으로 믿고 따를 유일한 주님이심을 모든 삶으로 고백하고 드러내며 아름다운 믿음의 소문을 퍼뜨리게 하시고 기꺼이 저마다의 십자가를 감사함으로 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예담교회에 꼭 필요한 섬김과 봉사에 기꺼이 동참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언젠가 하늘로부터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봉헌 기도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
우리의 모든 비참함과 초라함을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그 좌절을 통해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으로 이끄신 위대한 은혜를 높여 찬양하며 한 주간 구별한 삶의 예물을 드립니다. 기쁨으로 받으시어 작고 연약한 곳에서 참으로 크고 강한 생명을 일으켜 나가는 이들을 위해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예담청년들을 온 마음 다해 축복하며 기도합니다. 이 거대한 세속의 흐름 속에 경쟁과 비교로 지친 몸과 마음의 여러 아픔과 결핍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진정한 회복과 풍요를 허락하여 주시고 가정 안의 여러 문제들이 주님의 뜻 안에서 해결되며 평화 넘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보냄의 말씀
목사: 사랑하는 여러분 평안히 돌아가십시오. 복음의 말씀을 들었으니 진정한 생명과 희망의 공동체인 교회를 함께 세워나가고 섬기며 살아가십시오.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과 헌신을 결코 잊지 않으시고 당신의 나라를 위해 사용하십니다.
예담: 아멘! 도시의 거대하고 화려한 질서에 짓눌리고 압도당했던 어리석음을 뉘우칩니다. 우리의 정체성을 복음 안에서 올바로 깨달아 알며 교회의 신비와 생명을 전하며 살아가겠습니다. 주님! 우리를 교회 안에, 교회로서 온전히 세워 주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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