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2월 9일 목요일

누가복음 4장 21~30절 "익숙하지만 낯선"

주현절 후 다섯 번째 주일, 2017년 2월 5일, 부산진교회 청년설교, 정대진 목사
누가복음 4장 21~30절 "익숙하지만 낯선"


기원
빛 이신 하나님. 설 명절을 무사히 보내고 다시금 주님께 예배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자녀들을 끌어 안으시고 날마다 자비와 긍휼 가운데 인도하여 주시며 진심으로 고백하며 회개하는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성경 – 누가복음 4장 21~30절
21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22 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23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24 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26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27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느니라 28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크게 화가 나서 29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 30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설교 전 기도(성령님의 조명을 구하는 기도)
생명의 하나님.
성령님께서 비추시는 빛을 통해 우리 안의 굳은 마음의 빗장을 열어 진리를 올바로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설교 - “익숙하지만 낯선”

1960년 어느 날 이곳 부산에 살던 한 사람이 자신의 오랜 미국인 친구를 송별하러 항구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주일이어서 독실한 신자인 그는 얼른 배에서 인사를 나누고 근처에 있는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는 드물었던 택시를 타고 서둘러 항구로 갔지만 생각보다 가는 길이 오래 걸렸습니다. 게다가 방문객 자격으로 배에 오르는 시간도 많이 지체되었습니다. 때문에 그는 근처 교회의 주일예배 시간을 놓치고, 배 위에서 친구와 같이 간단히 예배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여기까지 들으셨을 때 여러분이 이 이야기 속 인물의 행동에 큰 잘못이 있다는 생각이 드십니까? 그리스도인으로서 이왕이면 주일에 제대로 예배를 드리는 게 바람직하겠지만 이날 예기치 못하게 벌어진 상황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는 걸 대부분 이해하실 것입니다.

문제는 이 분이 당시 고려신학교 교장으로 일했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보수 신학자 “박윤선”이라는 사실입니다. 어떻게 된 사정인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이날 있었던 일이 그가 당시 그가 속한 고신 측 교단에 알려져 큰 파문이 일어났습니다. 우선은 주일날 택시를 이용함으로써 돈을 사용하였다는 것이 문젯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주일 “정식 예배”를 드리지 않았다는 것은 신학교 교장으로서 심각한 결격사유라는 거센 비난이 들끓어 올랐습니다. 물론 이에 대해 박윤선 박사는 정당하고 선한 이유 때문에 부득이 발생한 일이라고 해명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그가 속했던 교단은 “주일 성수”를 지나치게 완고한 틀 안에서 이해하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결국 신학교와 교단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교회사에 길이 남을 유명한 “스푸너 사건”입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지난날 한국교회가 얼마나 극단적으로 보수적인지를 새삼 실감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 불과 몇 십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와 같은 극단적인 보수 신앙은 우리나라 교회에 매우 “익숙한” 모습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직까지도 주일날 돈 쓰는 것을 금하는 교회를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대해 조금이라도 새로운 해석이나 견해를 말 하면 “자유주의”, 심지어는 이단으로 몰아가는 일들도 종종 발견하게 됩니다. 한 마디로, 오랜 시간 한국 교회는 ‘낯선 신앙을 받아들일 포용력’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물론 우리에게 익숙한 여러 신앙 전통들 모두가 잘못됐거나 유치하다는 말씀을 드리려는 게 아닙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보수적 신앙 자체는 분명히 소중합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서 그 안에 담긴 말씀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너무나 귀한 일입니다. 또한 열성적 신앙운동 역시도 믿음을 성실하게 깨운다는 면에서 매우 값진 유산입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익숙하다 해서 성급히 그것만을 절대불변의 진리로 여기면서 조금이라도 낯선 신앙의 모습들과 생각들을 함부로 정죄하고 비난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진 신앙 전통 자체가 복음 전체를 다 담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역사적으로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로 나뉘어집니다. 간혹 TV와 영화 등에서 그리스와 러시아에 주로 자리 잡은 “정교회” 성당과 신부님들의 모습을 보신 적이 있으실 겁니다. 거칠게 구분하자면 그들은 “동방교회”로, 로마 가톨릭은 “서방교회”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서방교회에서 루터를 시작으로 한 개신교회가 등장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우리는 칼뱅의 정신을 따르는 개혁교회의 울타리 안에 있고, 그 개혁교회 가운데에서도 존 낙스가 스코틀랜드에서 꽃을 피운 장로교 소속입니다. 그리고 그 장로교 안에서도 우리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측 교단”의 부산진교회 교인들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몸담고 있는 신앙 전통이라고 해봤자 2천년 역사의 거대한 보편적인 기독교 세계 안에서 지극히 작은 영역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익숙해진 진리에서 벗어나 새로운 신앙의 여정과 끊임없이 마주할 마음의 여유를 가져야 합니다. 그 이유는 너무나 간단하고도 분명합니다. 만유의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에게 익숙해질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 말씀은 누가복음 4장 16절부터 이어지는 커다란 단락에 속해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비슷한 사건을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비교적 가운데인 13장과 6장에 각각 기록한 것에 비해 누가복음은 공생애의 시작인 앞머리에 배치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본문에 기록된 장면이 누가복음의 저자와 그의 공동체에 있어 예수님의 공적 생애의 시작을 알리며 그 성격을 규정하는 매우 의미심장한 사건이었음을 뜻합니다. 그 사건을 간단히 정리하자면 예수님께서 그의 고향에서 죽음의 위기를 겪을 정도로 극심한 배척을 받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나사렛 사람들의 그토록 거친 분노와 마주한 까닭은 과연 무엇 이었을까요? 그것은 그가 사람들 앞에 공개적으로 드러낸 모습이 그들에게 이미 익숙한 예수님에 대한 경험과 지식과는 달리 불쾌할 정도로 몹시 “낯설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더욱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본문 말씀의 바로 앞부분인 16-20절에 기록된 내용을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말씀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고향 회당에 가셔서 예언자 이사야 글이 적인 두루마리를 받아 61장을 펴서 읽었습니다. 그 구절은 하나님의 구원을 실현할 ‘기름부음 받은 자’, 즉 “메시아”에 대한 말씀으로서 그가 “희년”으로 대표 되는 정의와 해방을 실현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일어난 일을 묘사하는 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말씀입니다. 다함께 21, 22절 말씀 읽겠습니다.

21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22 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주님께서는 메시아를 통한 희년의 성취를 기록한 이사야의 글을 읽은 후 고개를 들어 회당에 모인 사람들, 더 구체적으로 익히 그를 잘 알고 있는 고향 사람들을 둘러보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그런데 22절 말씀에 보면 이와 같은 예수님의 행동은 그 시각 모인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것은 그가 “요셉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회당에 모인 사람들은 예수님을 가리켜 수군거리며 그가 요셉의 아들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아버지가 “요셉”이라는 단순한 가족관계 정보를 이야기 하는 게 아닙니다. ‘옆 집 박씨 아들’, ‘뒷 집 이씨 며느리’처럼, 그들에게 예수가 충분히 “익숙한 인물”임을 강조하는 행동입니다. 

그들은 목수 일을 했던 그의 아버지 요셉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어머니 마리아가 아직 혼례를 올리지 않았음에도 아기를 가져 주변사람들을 놀라게 한 일 역시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안쓰럽게도 요셉이 일찍 세상과 이별한 것도, 예수님과 그의 동생들이 어떤 아이들이며 그들이 홀어머니 밑에서 어떻게 자랐는지도 충분히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성장과정을 모두 지켜보고 함께 부대끼며 생활했던 나사렛 사람들에게 있어 예수님은 우리와 같이 먼 역사 속의 인물이 결코 아닙니다. 그 당사자뿐만 아니라 가족모두를 너무나 잘 아는 몹시도 “익숙한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런 예수님께서 그들 보기에 너무도 놀라운 뜻밖의 행동을 하였습니다. 전혀 글을 배울 기회를 갖지 않았던 그가 말씀을 능숙하게 회당에서 낭독합니다. 그것도 모자라 그 말씀이 지금 당장 실현되었다고, 즉 자신이 메시아임을 공개적으로 밝혔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에 의해 낭독된 말씀 자체는 분명 은혜로웠으나, 그것을 낭독한 예수님의 행동은 그들로서는 매우 당황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그들의 놀라움을 잠재우시기는커녕 도리어 분노를 일으키는 말씀들을 연이어 선언하십니다. 속담과 예언자 엘리야, 엘리사의 일화를 소개하시며 당사자들 면전에 두고 결코 그들이 구원의 대상이 아니라 도리어 그들이 짐승처럼 여기는 이방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외치셨습니다.

이 역시 그들로서는 낯설고 불편한 진리였습니다. 구원은 오직 아브라함의 혈연적 후손인 유대인들만이 독점한다는 것이 그들에게 너무나 익숙한 교리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더더욱 이해 못할 복음들을 주저 없이 거듭 외치셨습니다. 그러자 회당에 모인 사람들은 격노하며 예수님을 낭떠러지까지 몰아쳐 떨어뜨려 죽이려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지점에서 다시금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건이 어떤 이유에서 일어났을까요? 왜 본문 속 나사렛 사람들은 함께 나고 자란, 같은 고향 사람인 예수님을 환영하지 못하고 도리어 그의 목숨을 노리는 일을 벌였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자신들에게 익숙한 신앙에만 갇힌 채, 예수님의 낯선 복음과 삶을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거듭 강조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에게 익숙해질 수 없는 분이십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의 경험과 지식 안에 갇혀 길들여 질 수 있는 분으로 여긴다면, 그것은 마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무모한 생각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온 우주를 지으시고 넓고 깊은 뜻 아래 다스리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성모독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우리 안에 익숙해진 하나님의 그림자를 지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늘 새로운 눈으로 성경을 읽으셔야 합니다. 새로운 방식으로 사람들 내면 깊숙이 찾아 오셔서 당신의 마음을 전하시고 이루시는 하나님의 손길 앞에 저마다의 완고한 신념을 무장해제 해야 합니다. 그제야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익숙함만을 고집하며 주님의 낯선 은혜를 거부하고 심지어 주님과 정면으로 대적하는, 악의 길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 간략히 설명 드렸듯이 누가복음의 저자가 본문 말씀을 의도적으로 공생애 시작에 배치한 이유는 매우 분명합니다. 이 사건이 그 이후 예수님의 사역 전체와 긴밀하게 연결돼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 정확히는 주님의 십자가와 맞닿아 있는 장면인 까닭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실패한 주님을 향한 살해시도는 마침내 십자가에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우리가 사복음서를 통해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듯이 주님의 파격적인 삶과 가르침이 당시의 모든 정치, 종교 기득권을 당황시키고 분노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충분히 익숙한 도덕적이고 안전한 가르침과 지도력만을 발휘 했다면, 그렇게 처참한 죽음을 맞이하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온 삶을 다해 선언하신 하나님 나라와 그 안에 담긴 정의와 평화 그리고 생명과 은혜는 사람들에게 결코 익숙해질 수 없는 너무도 낯선 진리였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결국 십자가를 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 십자가가 부활을 낳음으로써 오늘 본문 속 주님의 선언, 즉 메시아의 은혜와 구원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십자가의 구원은 또 다른 낯선 복음이 되어 지중해 지역에 퍼져갔고 그것이 마침내 오늘날 우리에게 까지 전해졌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익숙한 복음의 전통과 유산을 소중히 간직하면서도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전히 드러난 하나님 나라의 깊은 본질은 바로 “낯섦”에 있음을 언제나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삶 가운데 그 어떤 낯선 하나님의 모습과 만난다 할지라도 당황하거나 놀라지 마시길 바랍니다. 도리어 그 낯선 하나님과 당당히 마주할 용기를 가지길 바랍니다. 바로 거기에 우리를 참으로 살리는 하나님의 구원이 생생히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예상 못한 온갖 고난과 시련 앞에 쉽게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기에는 조심스러운 아직 나이 어린 저 이지만, 제 주변에 있는 이들이 겪는 여러 끔찍한 상황들을 지켜보며 이 땅에 나그네로 살아간다는 것은 평생 도무지 익숙해 질 수 없는 어려운 숙제와 갔다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됩니다.

지금껏 다른 사람들에게 싫은 소리 한 마디 못하고 착하고 정직하게 살아왔음에도 억울한 누명을 쓰고 명예롭지 못하게 회사에서 나오게 된 사람들을 본적이 있습니다. 남부럽지 않은 사랑을 쏟아 부으며 양육하였음에도 자녀들이 심각한 비행을 저질러서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을 본적이 있습니다. 한없이 순진무구한 학생들이 전학 간 학교에서 아무 이유 없이 따돌림과 폭력에 시달리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반면에 가정 안에서는 입에도 담기 힘든 폭언과 폭력을 서슴지 않지만 밖에서는 탁월한 능력과 좋은 성격을 가졌다며 인정받는 사람들에 대해 들은 적이 있습니다. 온갖 탐욕과 불의를 주저 없이 저지르며 남들이 부러워하는 높은 위치에 올라 어른인척 위선을 부리며 명예를 누리고 존경을 훔치는 사람들에 대해 들은 적이 있습니다. 자기보다 약한 사람들은 함부로 무시하고 억압하지만 교회 안에서는 헌금 많이 하고 봉사 열심히 하는 믿음 좋은 교인으로 칭찬 받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이런 일들을 직간접적으로 접할 때마다 세상을 살아간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절감하게 됩니다. 동화 속에 등장하는 “권선징악”은 현실과는 무관한 환상 속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방심할 때마다 어김없이, 도무지 익숙해질 수 없는 낯선 고난들이 밀려들어 오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3년 전 세월호 사건을 쓰라린 가슴으로 떠올릴 때마다 더더욱 그러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 말씀에 의지하여 감히 권면 드립니다. 절망이 깊으면 깊을수록 더욱 주님을 의지하시길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시련들은 결국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 세워진 가장 낯선 은혜의 상징인 십자가로 한걸음 더 나아가 마침내 부활의 생명과 복음에 이르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또 다른 은총의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그 주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도 우리에게 낯선 얼굴로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드넓은 복음 아래서 우리의 일상을 이어갈 것을 당부 하십니다. 하지만 그렇게 복음과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며 삶을 살아다는 것은 곧 불편한 진리로 말미암아 분노한 사람들과 마주하는 곤란과 위험 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두려워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들 사이를 해치고 우직이 당신의 길을 걸어가신 주님께서 우리 삶의 길을 몸소 열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 주님과 더불어 저마다에게 주어진 낯선 복음의 여정을 힘차게 걸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본문 28-30절 말씀을 공동번역 개정판 성경으로 읽어 드리고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28 회당에 모였던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는 모두 화가 나서 29 들고일어나 예수를 동네 밖으로 끌어냈다. 그 동네는 산 위에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를 산 벼랑까지 끌고 가서 밀어 떨어뜨리려 하였다. 30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한가운데를 지나서 “자기의 갈 길을 가셨다.”


설교 후 기도 
은혜의 해를 이루시는 하나님
때때로 주님의 모습이 너무나 낯설게 느껴집니다. 그 낯섦에 불쾌하고 심지어 화가 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우리의 작은 지식과 경험을 뛰어넘는 만유의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에게 익숙해질 수 없는 분이심을 말씀을 통해 고백합니다. 그 모든 새로움에 기꺼이 안기는 믿음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초라하고 흉한 십자가 복음을 통해 온 세계를 구원하신 주님과 동행하며 기름부음 받은 자의 사명과 부르심을 기꺼이 감당하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낯선 십자가와 부활로 온 세상을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봉헌기도 
새로운 구원의 길을 열어 가시는 하나님
주님의 드넓은 다스림과 은혜에 감사와 찬양을 드리며 한 주간 삶으로 구별한 예물을 드립니다. 기쁘게 받으시어 신념의 감옥 안에 갇힌 이들의 참된 해방을 위해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예담 청년들을 위해 축복하며 기도드립니다.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은 삶의 고통과 시련을 뚫고 일어날 힘과 용기를 주시고 스스로의 몸과 마음의 건강뿐만 아니라 이웃을 위해 섬기고 낮아지는 일을 주저하지 않는 지혜와 겸손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삶의 여정을 보다 긴 호흡으로 이어나가게 하시고 혐오와 배제가 아닌 관용과 포용으로 낯선 이들을 대하는 내면의 너그러움을 갖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파송의 말씀
목사: 사랑하는 여러분 평안히 돌아가십시오. 복음의 말씀을 들었으니 낯선 하나님과 마주하는 용기를 가지고 살아가십시오. 주님께서 우리 삶의 새로운 시련과 아픔을 통해 뜻밖의 은혜와 구원을 이루어 나가십니다.

예담: 아멘, 익숙한 전통과 경험으로 생명의 복음을 함부로 제한했던 어리석음을 뉘우칩니다. 날마다 우리에게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오시는 주님과 더불어 진리의 여정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겠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관용과 겸손의 마음을 주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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