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2월 7일 화요일

사무엘상 16장 1-3절, “한 왕을 보았느니라.”

종교개혁주일, 2015년 10월 25일, 미와십자가교회 주일예배설교
사무엘상 16장 1-3절, “한 왕을 보았느니라.”

1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너는 뿔에 기름을 채워 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느니라 하시는지라 2 사무엘이 이르되 내가 어찌 갈 수 있으리이까 사울이 들으면 나를 죽이리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암송아지를 끌고 가서 말하기를 내가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러 왔다 하고 3 이새를 제사에 청하라 내가 네게 행할 일을 가르치리니 내가 네게 알게 하는 자에게 나를 위하여 기름을 부을지니라 


우리가 오늘 함께 읽은 본문 말씀을 보다 더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다음에 이어지는 성경 기록들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어린 다윗에 대한 몇 가지 중요한 정보들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로 주목해야할 것은 다윗의 나이입니다.


사무엘상 17장 12-14절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12 다윗은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 이새라 하는 사람의 아들이었는데 이새는 사울 당시 사람 중에 나이가 많아 늙은 사람으로서 여덟 아들이 있는 중 13 그 장성한 세 아들은 사울을 따라 싸움에 나갔으니 싸움에 나간 세 아들의 이름은 장자 엘리압이요 그 다음은 아비나답이요 셋째는 삼마며 14 다윗은 막내라 장성한 세 사람은 사울을 따랐고

우리는 이와 같은 말씀을 통해 다윗은 형제 중 막내로서 일곱 명의 형이 있었는데 그 중 세 명이 전쟁터에 불려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에 근거해 이때 다윗의 나이를 추측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과 달리 전쟁무기와 기술이 발달되지 않은 고대 중동에서 어느 한 국가의 군사력을 측정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바로 “군사의 수”이기 때문입니다. 즉, 보다 더 많은 숫자의 군사를 가진 나라가 적은 수의 군사를 가진 나라 보다 전쟁에 절대적으로 유리했습니다. 

따라서 그 시대 왕들은 백성들 중에 조금이라도 손에 창과 칼을 들 만한 힘을 가지고 있다면 가능한 한 많이 전쟁터로 끌고 갔습니다. 그래서 이때는 오늘날 우리나라 보다 의무 입영 나이가 훨씬 어렸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아직 군대 가지 않은 다윗의 넷 째 형의 나이를 높게 잡아서 우리나라 나이로 17살로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막내 다윗은 형들과 연령생이라 해도 13살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모든 것을 고려해 볼 때 본문에 등장하는 다윗의 나이는 많아 봤자 10대 초반이고 그보다 훨씬 더 어렸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주목해야 할 것은 다윗의 성장 배경입니다.

우리가 쉽게 공감할 수 있듯이 자녀를 군대에 보낸 부모의 가장 원초적인 욕구는 바로 그들의 안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아버지 이새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무려 세 명이나 되는 아들들이 평상시도 아닌 전쟁 중에 군대로 끌려갔습니다. 그의 마음이 얼마나 불안하고 초조했겠습니까? 그래서 이새는 정성스럽게 면회를 계획 했습니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그들을 보고 싶어 했던 아버지 이새는 의아하게도 면회를 직접 가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이유를 사무엘상 17장 17-18절 말씀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17 이새가 그의 아들 다윗에게 이르되 지금 네 형들을 위하여 이 볶은 곡식 한 에바와 이 떡 열 덩이를 가지고 진영으로 속히 가서 네 형들에게 주고 18 이 치즈 열 덩이를 가져다가 그들의 천부장에게 주고 네 형들의 안부를 살피고 증표를 가져오라

여기에 보면 이새가 마련한 면회 음식들이 기록돼 있습니다. 그는 먼저 아들들에게 줄 볶은 곡식 한 에바를 준비 합니다. 이 때 ‘에바’는 오늘날로 따지면 약 22리터에 해당하는 무게 단위입니다. 마트에 가면 2리터 생수병 6개를 하나로 포장한 것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여러분 중에 대부분은 그 12리터, 생수 패키지를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 겁니다. 그 경험을 떠올려 보신다면 그것의 두 배에 조금 못 미치는 ‘한 에바’가 꽤 많은 무게라는 것을 금세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또한 이새는 거기에 더해 떡 열 덩이도 마련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들들이 전투에서 무사하도록, 그들의 지휘관의 마음을 얻기 위해 치즈 열 덩이도 따로 준비했습니다. 따라서 이 모든 음식들은 한 사람이 들고 움직이기에는 결코 쉽지 않은 굉장히 무거운 양입니다.

게다가 지금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엘라 골짜기는 이새가 살고 있는 베들레헴에서 서쪽 방향으로 약 23km 정도 거리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한적한 평야가 아닌, 메마르고 험한 산줄기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엘라 골짜기로 향하는 길은 걷는 것 자체가 매우 힘들 뿐만 아니라 강도를 비롯한 여러 위험들이 적지 않게 도사리는 곳입니다. 

상상해보시길 바랍니다. 이새가 아들들을 만나러 가려면 그 어마어마 양의 먹을거리를 들고 무척 고된 길을 지나야 합니다. 설령 겨우 군부대에 도착한다 할지라도 그곳은 언제 적군이 급습해 올지 모르는 살벌한 전쟁터입니다. 따라서 나이 들어 기력이 쇠한 그로서는 도무지 직접 면회 갈 엄두를 낼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때, 이새는 상식적으로 자기 대신 누구를 보내야겠습니까? 집에 두고 부리는 머슴을 보내든가 만약 머슴이 없다면 군대 가지 않은 아들들 중 가장 장성한 넷 째, 다섯 째 아들을 보내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가장 어리고 힘없는 막내 다윗의 어깨에 그 거대한 양의 짐을 들려서 전쟁터로 향하는 힘겹고도 위험한 여정으로 혼자 내 보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다윗은 그렇게 형들을 만나기 위해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전쟁터에서 매우 비참한 관경을 목격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저 야만스런 블레셋 장수 골리앗이 감히 하나님의 군대인 이스라엘 군을 날마다 모독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스라엘 군대에서 어느 누구하나 당당히 맞서 싸우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그 모습에 거룩한 분노를 느낀 다윗은 분연히 일어나 골리앗과의 대결을 자원했습니다. 하지만 제 아무리 잔악무도한 사울 왕이라 한들 다윗과 같은 꼬마 아이가 저 괴물처럼 무시무시한 골리앗과 싸우겠다고 나서는 데 어떻게 선뜻 허락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당연히 사울은 다윗의 요구를 거절 했습니다. 그런데 이 때 다윗이 그러한 사울을 설득하기 위해 이야기한 자기 고백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사무엘상 17장 34-35절에 다윗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34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35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

여기서 우리는 어린 다윗의 일상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잘 알다시피, 그는 아버지의 양 떼를 돌보는 목동입니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양 떼를 이끌고 다녔던 유다 광야는 우리나라의 대관령같이 푸른 풀이 아름답게 우거진 전원 목장이 아닙니다. 그의 고백에 따르면 그 곳은 험악한 사자나 곰이 빈번하게 출몰하여 양 뿐만 아니라 다윗의 목숨까지도 해치러 달려드는 매우 위험천만한 사막입니다.

이 역시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십니까? 여러분이시라면 아무리 집안 경제 사정이 어렵다 한들, 어린 막내더러 돈 벌어오라며 무척 위험한 저 길거리에 아무렇지 않게 내보내실 수 있으십니까? 정상적인 부모라면 결코 할 수 없는 행동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어린 다윗은 그런 부모 밑에서 우리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온갖 상처와 시련을 겪으며 자라왔습니다.

때문에 다윗은 시편 27편 10절에 다음과 같은 가슴 아픈 고백을 남겼습니다.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와 같은 사실들을 통해 다윗은 어린 시절, 막내로서 부모로부터의 마땅한 돌봄과 사랑을 받지 못한 채 위험한 유다 사막에 홀로 버려져서 매우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보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 번째로 주목해야 할 것은 다윗의 위대한 신앙입니다.

본문 말씀 바로 뒤에는 하나님의 영이 떠난 자리에 악령이 틈타서 이로 말미암아 깊은 고통에 시달리는 사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자 그의 신하들이 수금을 잘 연주하는 사람 한 명을 임금 곁에 두어서, 그의 음악 소리를 통해 치유를 받으시라고 건의했습니다. 그리고 사울 왕의 허락 하에 적임자를 찾았는데 바로 다윗이었습니다. 이것은 그가 이스라엘 최고의 수금 연주자로 인정받았음을 뜻 합니다. 그런데 다윗이 그렇게 궁중 악사가 될 정도로 악기를 능숙하게 잘 다룬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어떤 사실을 전제할까요? 그것은 당연히 그 악기를 매일같이 부단히 연습했음을 의미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사울의 신하들은 단순히 수금 연주만을 탁월하게 잘 하는 사람을 찾은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들은 악령이 떠나갈 정도로 성령 충만한 영의 찬양을 연주하는 사람을 찾았습니다. 즉, 소년 다윗은 항상 손에 수금을 들고 하나님께 온전한 찬양을 쉼 없이 드린 참된 예배자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무엘상 16장 18절에, 다윗을 가리켜 “주님께서 그와 함께 계신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와 같은 사무엘상 16장의 기록과 시편에 담긴 다윗의 수많은 찬양을 통하여 그가 한결같은 찬양과 예배의 삶을 살았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제 본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본래 겸손한 사람이었지만 그가 권력을 손에 쥔 후 차츰 하나님의 뜻과 멀어졌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주님을 대적하여 마침내 버림받은 왕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사울 대신에 다른 왕을 이어 세우길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선택한 누군가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사무엘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본문 1절에 아주 놀라운 말씀이 담겨 있습니다. 다함께 읽겠습니다.

1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너는 뿔에 기름을 채워 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느니라 하시는지라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씀하신 “한 왕”은 누구일까요? 그는 분명히 다윗입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다윗은 왕이 되기는커녕 아직 사무엘상에 다윗이라는 이름조차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때 다윗은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우리가 앞서 자세히 살펴본 바와 같이 그는 그 어린 나이에 부모로부터 당연히 받아야할 사랑과 관심을 받지 못한 채, 유다 사막에 홀로 버려 졌습니다. 그곳에서 밤낮으로 참혹한 더위와 추위를 이겨내며 맹수들의 섬뜩한 울음소리 가운데 아버지의 양떼를 외롭게 지켜야했습니다. 그렇게 그는 상처와 좌절로 얼룩진 비참한 유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럼에도 그 모든 고난과 아픔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원망하지 않고 도리어 날마다 수금을 손에 쥐며 잠잠히 찬양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황무한 사막 한 복판에서 눈물 맺힌 두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그 찬양 소리에 귀 기울이셨습니다. 그 눈망울에 당신의 두 눈을 맞추셨습니다. 그리고 떨리는 음성으로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내가 한 왕을 보았느니라!”

이것은 하나님의 위대한 감탄이자 의지입니다. 다윗은 사람들의 눈에는 부모에게조차 버림받은 초라한 아이였지만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의 눈에는 이미 한 왕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지금, 마치 그 옛날 유다 사막에서의 어린 다윗과 같은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계시진 않으십니까? 만약 그렇다면 오늘 말씀을 통해 반드시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언제 어느 곳에서 어떤 모습으로 있건 간에, 다른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그 어떤 멸시를 당하던 간에 우리가 온전히 주님만을 바라보며 날마다 우리의 모든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를 일구어 나갈 때 주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향해 도저히 상상할 수조차 없는 위대한 뜻과 계획을 선언 하십니다. 이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결코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언제나 우리를 향하시는 신실하신 주님의 눈길과 손길에 기꺼이 반응하는 모두가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멈추지 말고 묵상의 걸음을 더욱 멀리 내딛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결코 “완성”이 아니라 “과정”이라는 진리입니다.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선포와 계획이 주님의 종 사무엘을 통해 선명하게 드러났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이후 다윗은 순탄하게 왕이 되지 못했습니다. 도리어 왕위로부터 철저히 먼 길을 돌아 무려 약 10년간 힘겨운 도망자 생활을 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또한 그가 우여곡절 끝에 왕이 된 후에도 당시 임금으로서 당연하게 누릴 수 있는 권력을 휘둘렀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받았던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윗이 부하 장군의 아내인 밧세바를 취하고 또 그 후에 이스라엘 군대의 숫자를 헤아린 것은 그 시대 왕으로서 전혀 거리낄 것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것에 대해 무척 화를 내셨던 까닭은 그 행동들이, 다윗이 아직 왕으로서의 “과정”에 있음을 잊어버리고 어느덧 스스로를 왕으로 “완성”되었다고 여긴 증거이기이기 때문입니다.

사울과 다윗의 차이는 바로 여기에서 나뉘어졌습니다. 하나님의 경고를 끝까지 거부한 채 스스로를 왕으로 여긴 사울과는 달리 다윗은 자기 자신이 아직 왕이 아닌, 왕이 되어가는 존재임을 하나님 앞에 겸허히 인정하며 회개하였습니다.

열왕기상 1장은 그러한 다윗의 말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몹시 늙어서 이불을 덮어도 따스함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기력이 많이 쇠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신하들은 이스라엘 전역에서 가장 예쁜 처녀, 아비삭을 구해다가 다윗이 그녀를 안고 따뜻하게 주무시게 했습니다. 이 역시 한 국가의 왕으로서 당시 결코 문제될 것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더구나 아비삭은 밧세바와 달리 유부녀도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율법에 의해서도 전혀 흠 잡힐만한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다윗은 아비삭과 잠자리를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노년의 다윗이 그가 점차 죽음에 가까운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은 아직 왕이 아니라 평생 주님 앞에서 왕이 되어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바로 그것이 지난 날 사무엘을 통하여 자신을 왕으로 부르시고 기름 부으신 하나님의 참된 뜻임을 분명히 마음 깊이 새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난 화요일에,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저를 보고 ‘정 목사’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까지 저를 신실하게 이끄신 주님의 섭리 가운데 절절히 깨닫고 있습니다. 저는 일평생 그저 목사가 되어가는 사람이지 결코 그 어떤 순간도 목사로 완성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 말입니다. 그리고 또한 제가 저 자신을 목사가 되어가는 사람이 아니라 이제 목사가 다 되었다고 착각하는 순간, 저를 목회자로 부르신 하나님의 뜻과 가장 멀어지는 길 임을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해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은총 아래 일평생 그리스도인으로 되어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땅에서 신앙의 완성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장 12절에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나는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며, 이미 목표점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새번역 성경)

그러므로 스스로에 대해 너무 교만하거나 안주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또한 지나치게 자신에 대해 실망하거나 포기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신실하신 주 하나님께서 당신의 나라를 향한 우리의 모든 삶의 여정 가운데 항상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주님의 눈길을 신뢰하며 날마다 주어진 일상을 보다 희망차게 일구어 나가시길 바랍니다. 

마침 오늘은 교회 전통에 따라 10월 마지막 주에 드리는 “종교 개혁주일”입니다. 우리가 속한 개혁교회의 가장 중요한 정신은 바로 “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고백입니다. 교회 개혁의 위대한 역사와 전통을 기억하며 그 어두운 시대, 복음과 진리를 회복하기 위해 목숨 다해 싸운 우리 신앙 조상들의 뜻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들이 이룬 개혁은 결코 쓸쓸히 이끼로 덮인 유물로 머물러서는 안 되고 바로 우리를 통해 지금도 계속 이어져 가는 과정에 있음을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를 참으로 살리고 바르게 세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들고 우리 주위의 약하고 가난한, 이 시대의 또 다른 어린 다윗들을 향해 주님의 눈길과 마음으로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그런 우리 모두를 향해 오늘도 하나님께서 단호하고도 따뜻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대학로에서, 미와십자가교회에서, 한 왕을 보았느니라.”


<설교 후 기도>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그 옛날, 거친 광야에서 외로이 눈물을 삼키는 어린 다윗을 향해 ‘내가 한 왕을 보았느니라.’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가 저마다의 삶의 자리에서 갖는 힘겨움과 아픔 또한 누구보다 잘 아시고 위로하시며 새로운 삶의 길로 이끄실 줄 믿습니다. 

주님을 신뢰하며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찬양과 기도의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이 땅위에서의 모든 믿음의 여정이 결코 완성이 아닌 과정임을 잊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열어 보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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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로서의 첫 번째 설교를 "미와 십자가교회"에서 했다는건 정말 감사한 일이다.

오동섭 목사님께 거듭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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