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2월 11일 토요일

룻기 1장 1~6절 "돌보시는 하나님"

부산진교회 청년부 수련회 둘째 날 저녁설교, 2017년 2월 5일, 정대진 목사
룻기 1장 1~6절 "돌보시는 하나님"

성경봉독 – 룻기 1장 1~6절
1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 2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의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의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더라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살더니 3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의 두 아들이 남았으며 4 그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그들의 아내를 맞이하였는데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요 하나의 이름은 룻이더라 그들이 거기에 거주한 지 십 년쯤에 5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 6 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이에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설교 - “돌보시는 하나님”

아마도 여러분 중에는 성경을 읽어야겠다는 생각과 부담감은 많이 있지만 막상 읽으려니까 어렵고 딱딱하게만 느껴지는 분이 있을 겁니다. 그런 분들에게 작은 조언을 드리자면 처음부터 굳이 성경 전체를 다 읽으려 하지 말고 그 안에서 쉽고 짧은 책 위주로 천천히 읽으면서 작은 성취감을 맛보길 권하고 싶습니다. 그러한 소소한 성경읽기에 매우 적합한 책이 바로 룻기입니다.

룻기는 비록 성경 전체에서 상대적으로 적은 분량의 책이지만 그 안에 매우 견고한 이야기 구조를 갖추고 하나님 나라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일상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깨우쳐 주기 때문에 그 중요성은 거듭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 말씀은 그러한 룻기의 가장 앞부분에서 서론의 역할을 하며 이후 펼쳐질 이야기의 핵심과 배경을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먼저 본문 1, 2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1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 2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의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의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더라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살더니 

우선 1, 2절 말씀은 룻기 이야기가 펼쳐진 무대를 알려줍니다. 이 때, 이스라엘에는 아직 왕이 세워지지 않고 사사들이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사사기를 통해 분명히 확인할 수 있듯이 이 시대 이스라엘은 정치적으로 무척 불안했을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외적의 침입에 시달렸던 혼란의 시기를 보냈습니다.

그 와중에 유다 베들레헴에 살던 한 사람, 엘리멜렉은 자신의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을 데리고 모압 지방으로 이주해서 거기 머물러 살 것을 결심했습니다. 이에 대해 1절 후반부에 “거류”하다로 옮긴 히브리어 단어는 더 정확히는 “외국인으로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즉, 모압 본토인들과 같은 동등한 권리와 대우를 받지 못한 채 그들이 제한적으로 허락한 권한과 신분 안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는 20대 중반에는 일본 동경에서, 몇 년 전에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각각 일 년 간 머물러 지내며 한인교회를 섬긴 적이 있었습니다. 그 기간 동안 해외 교포들의 삶을 가까이 지켜보며 새삼 실감했던 것은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삶의 고단함이었습니다. 한국에 비해 비교적 여유로운 생활을 하더라도 외국인으로서 어쩔 수 없는 손해와 불편을 감수하며 고국을 그리워하는 이들의 모습이 지금도 제 기억에 선명합니다. 하물며 엘리멜렉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을 떠나 저주 받은 죄인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여겼던 이방 모압으로의 이민을 선택 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결코 쉽지 않은, 매우 힘겹고 어려운 결심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어려운 결단의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땅에 찾아온 흉년입니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들이 굶주림으로 괴로워하는 것을 가장으로서 도저히 두고만 볼 수 없었습니다. 아이들의 뱃속으로부터 적막한 집안에 잔인하게 울려 퍼지는 꼬르륵 소리와 그네들의 여윈 얼굴 앞에 거창한 신념과 명분은 그저 사치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심 끝에 모압 이주를 결심하였습니다.

룻기 이야기는 이렇게 출발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대한 해석의 차이에서 룻기 전체에 대한 이해가 갈립니다. 즉, 엘리멜렉 가족의 모압 이주가 불신앙으로 말미암은 잘못된 행동이라고 생각하는 지, 혹은 충분히 납득 가능하며 타당하다고 판단하는지에 따라, 룻기에 나타난 하나님을 전혀 다르게 보도록 만듭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엘리멜렉의 결정을 부정적으로 이해합니다. 그가 흉년을 끝까지 이겨내지 못하고 고향 베들레헴을 떠나 이방 지역으로 이주한 것을 두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 타락한 것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베들레헴이란 이름 “빵의 집”이란 뜻을 가진데다 훗날 그곳에서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는 사실이 그러한 생각을 더 지지해 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물론 그렇게 해석할 여지가 충분히 있습니다. 구약에 담긴 고전적인 신앙은 하나님의 임재를 언약궤가 모셔진 지성소를 중심으로 한, 특정 장소인 예루살렘과 이스라엘 땅으로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약속의 땅을 벗어나 이방신을 섬기는 외국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는 것은 전통적인 유대교신앙 관점에서 보면 분명 죄악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구약성경 전체의 숲과 흐름을 놓친 아쉬운 해석입니다. 2절에서 엘리멜렉의 출신을 “유다 베들레헴”이라고 언급한 까닭은 단지 그가 나고 자란 특정 지역을 강조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곧바로 이어지는 내용대로 그가 유다지파 안에서도 ‘에브랏’ 가문에 속한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는 룻기를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출신 중 가장 유명한 “이새”를 연상시켜서 룻기 결말에 등장하는 이새의 아들, 다윗과의 관계를 암시하려는 의도입니다.

따라서 룻기는 엘리멜렉 가족이 고향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으로 이사 간 것을 결코 부정적으로 묘사하지 않았음을 꼭 유념해야 합니다. 그제야 우리는 하나님을 편협한 분이 아니라 사람들이 고단한 일상 가운데 흘리는 눈물을 돌아보시는 분임을 이 작고 소중한 책을 통해 더욱 분명히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룻기 연구의 권위자인 “프레드릭 부쉬” 교수의 글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거기에는 지극히 작은 암시도 없는데, 곧 모압으로 옮겨 간 데 대한 어떤 불명예스러움이나 또는 그 기근이 이스라엘의 죄로 인한 징벌이라는 암시도 없다. 

특히 엘리멜렉과 그의 아들들이 곤고한 때에 자신의 조국을 배반하고 갔다거나 아들들로 하여금 모압 여인들과 결혼하도록 한 그 모압 땅으로 간 결과 죽었다는 그 어떤 자그마한 힌트도 주고 있지 않다. 

후기 랍비 주석은 이러한 보응이나 징벌이라는 주제를 충분히 이용하여 해석했지만 그들은 그 본문을 해석한 것이 아니라 그 해석을 본문 속으로 집어넣은 것이다.” W.B.C. <룻기·에스더>

반드시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삶의 어려움으로 부득이 전통적인 신앙의 기준에서 벗어날 때 그것을 두고 성급하게 질책하지 않으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여러 힘겨운 사정으로 말미암아 휘청거리며 방황할 때, 창백한 저울을 내밀며 경건 상태를 평가하지 않으십니다.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주일예배를 드렸는지, 얼마나 많이 성경 읽고 기도했는지, 혹은 빠짐없이 헌금하고 열심히 봉사를 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결코 따져 묻지 않으십니다. 대신, 하나님께서는 낡은 신앙의 틀을 스스로 무너뜨리며 자녀들의 지친 어깨를 일으켜 세우는 분이심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처지와 아픔을 그 누구보다 가장 잘 아시기에 무심한 다른 이들처럼 함부로 비난하거나 다그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다함께 본문 3-5절 읽겠습니다.

3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의 두 아들이 남았으며 4 그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그들의 아내를 맞이하였는데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요 하나의 이름은 룻이더라 그들이 거기에 거주한 지 십 년쯤에 5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 

엘리멜렉 가족은 기대와 불안 가운데 모압 지방으로 이사했지만 그곳에서의 삶은 아픔과 눈물의 연속이었습니다. 먼저, 든든한 가장인 엘리멜렉이 숨을 거두었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이 그 가정에 주는 아픔과 상실은 분명 이루 말할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비극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이주한지 십 년 쯤 되는 해에, 두 아들이 모압의 여자 중에서 각각 아내를 맞이하였는데 그만 그 두 아들 말론과 기룐 역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지금 우리보다 훨씬 일찍 결혼하는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자녀가 언급되지 않은 것을 보면 상당히 젊은 나이에 숨을 거둔 것이 분명합니다.

오늘날도 여성이 남편과 아들 없이 거친 세상을 헤쳐 나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물며 여성을 엄연히 열등한 존재로 취급하며 공공연히 차별과 학대를 자행했던 고대 중동사회에서 과부로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상의 시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성경 안에서 고아와 과부들에게 관심을 가지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새 한 명도 아닌 세 명의 과부들만 덩그러니 남게 되었습니다. 그 때 나오미에게 덮쳐 왔을 크나큰 절망의 깊이가 상상이나 되십니까? 

그렇지만 저를 포함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다른 이들이 겪은 비극을 가리키며 함부로 그 원인을 따져드는 끔찍한 잘못을 저지르곤 합니다. 2003년도에 동해안을 강타하며 역대 최대 피해를 안긴 태풍 “매미”를 기억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때 대학생이었던 저는 총학생회에서 주관한 수해복구봉사에 참여하며 문득 바닷가에 위치한 마을들이 무속신앙에 열심히 매달리기 때문에 이런 심판을 받은 것이 아닐까? 라는 지극히 미숙한 생각을 무심결에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도 그 일을 떠올릴 때마다 제 어리석음에 얼굴이 화끈 거립니다.

그런데 이런 잘못된 태도를 주변에서 쉽게 발견하게 되는데 성추행을 당한 여성을 두고 그녀의 옷차림을 타박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명백한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원인을 제공했다는 식으로 함부로 말하며 당사자에게 더욱 깊은 상처를 안겨주는 안타까운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 힘들고 어려운 일을 겪는 교인을 향해 그가 신앙생활을 게을리 해서 벌 받는 거라고 마치 자기가 하나님인양 어쭙잖게 훈계하는 모습도 간혹 보게 됩니다.

많은 경우 룻기를 읽으며 나오미가 두 아들이 모압 여인과 결혼하는 것을 허용했기 때문에 그런 끔찍한 절망을 겪은 거라고 섣불리 단정 짓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앞서 간략히 설명 드렸듯이 룻기 전체의 풍경에서 보면 적절하지 못한 해석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누군가 현실에 적응하기 위해 부득이 사소한 율법을 어겼다는 이유로 그의 자녀들을 죽이는 잔인한 존재가 됩니다. 게다가 나오미의 아들들이 모압 여인과 결혼한 것이 정말 잘못된 일이라면 룻기 자체가 기록될 의미가 전혀 없는 감추어야할 역사가 됩니다. 그 며느리 중 한 명이 바로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룻”이고 그녀가 훗날 다윗의 증조할머니가 되었음을 명백히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본문 속, 남겨진 여인들의 비극을 대하는 올바른 마음가짐은 함부로 그들을 판단하거나 가르치려드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들과 함께 아파하며 공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한 사람이 지닌 인격의 깊이는 그가 다른 이들의 비극을 대하는 태도로 가늠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곁에 있는 고통 받는 이들에게 매우 조심히 신중하게 다가가야 합니다. 물론, 때때로 애정 어린 적절한 질책이 필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타인의 잘못을 무책임하게 방관하는 것 또한 분명 옳지 못한 행동입니다. 

그러나 때때로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절망이 찾아올 때 스스로를,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함부로 비난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살아가며 겪는 모든 고통의 원인을 당사자에게만 무책임하게 떠넘기며 하나님을 사람들의 모든 잘못에 대해 즉각 벌을 주는 것에 집착하는 고약한 신으로 오해하는 미련하고 어리석은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관련해서 시 한 편을 여러분에게 소개하고 싶습니다.

하느님의 가계(家系)

- 조수순

연분홍 화장지로 우스꽝스럽게 접어 만든
큼지막한 장미 두 송이를 머리에 꽂고
다소곳이 예배당 앞자리에 나와 앉아
울먹이는 목소리로 절절히 기도하고
찬송 부르고
설교자의 말끝마다 아멘으로 화답하는 그는
누가 뭐래도 당당한 하느님의 딸이다
그런데
집에서는 천덕꾸러기요
동네에서는 악귀 들린 년 혹은 미친년으로 통한다
빈농에서 자라나 이웃 마을 빈농의 총각에게
시집간 지 이레 만에 정신이상을 일으켜
새색시 품을 파고드는 신랑에게
갑자기 금침 밑에 감춰둔 식칼을 꺼내 위협하고
시모 밥그릇에 몰래 똥을 누어 조반상에 올려놓아
시집살이 보름도 못 채우고 소박맞은 후
친정 오라비 그늘에 들어 애옥살이하면서
정신병원 근처에도 못 가 본 채
살얼음 잡힌 동네 개천에서 가끔씩 벌거벗고 목욕하다
난폭한 오라비 매질에라도 걸리면
푸른 멍 두드러기 돋아난 얼굴 부끄러워
치렁대는 긴 머리단으로 살포시 가리고
인적드문 산모롱이를 돌아 예배당으로 오곤 하는데
누가 뭐래도 당당한 하느님의 딸이다
오늘 따라 홍조 띤 얼굴에
큼지막한 장미 두 송이를 머리에 꽂고
다른 하느님의 아들딸들과 같이
또랑또랑한 음성으로 주기도문을 읊조리는 그는

이 시에 묘사된 여인처럼, 불과 몇 십 년 전만 하더라도 시골 마을에는 적절한 정신건강치료를 받지 못한 채 방치된 이들이 참 많았습니다. 그들은 어김없이 천덕꾸러기 신세로 동네 사람들에게 멸시와 조롱의 대상이었습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녀에게 찾아온 가혹한 삶의 시련 따위는 사람들의 이해와 배려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겉으로 드러난 초라하고 흉한 모습만으로 도리어 억울한 죄인 신세가 되어 잦은 폭력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하지만 시인이 거듭 힘주어 말하듯이 그녀는, “누가 뭐래도 당당한 하느님의 딸”입니다.

이는 본문 속 나오미는 물론이고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해당되는 고백입니다. 적절한 자기반성, 그 자체는 분명히 우리의 인격을 성숙시키기 위해 꼭 필요한 덕목입니다. 항상 남 탓만 하며 자기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주변을 무척 피곤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강박적인, 지나친 자기 반성 또한 문제입니다. 어떤 일을 겪어도, 심지어 본인이 완벽히 피해자임에도 진지하게 참회하며 굳이 교훈을 찾는 것을 마치 미덕인양 포장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하지만 삶은 그리 단순하지 않습니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는 경우도 많습니다. 경악스러울 정도로 상황을 왜곡시켜서 사람들 사이를 분열시키고 약자를 따돌리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소름끼치도록 공감능력이 결여된 사람들도 주위에서 종종 발견하게 됩니다. 때문에 우리 모두는 때때로 피할 수 없는 삶의 재앙과 마주하곤 합니다. 어쩌면 지금 이 가운데에도 차마 말 못할 어려움을 힘겹게 이겨내고 있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그런 여러분께 오늘 본문에 의지하여 감히 말씀드립니다. 그건 여러분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저 이 세상이 끝없이 잔인하고 악독할 따름입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을 어떻게 바라보고 함부로 수군거리든 심지어 스스로조차 자신을 얼마나 미워하든 관계없이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당당한 아들, 딸임을 항상 잊지 마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우리는 도리어 이 힘겨운 상황 속에서 나오미를 향한 눈길이 눈부시도록 아름답게 변화한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 2절에 보면 주인공 가족을 가장인 엘리멜렉을 중심으로 이렇게 소개하였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의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의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 이는 남성 중심사회에서 너무나 흔한 기록 방식입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3절은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의 두 아들이 남았으며’라고 적고 있습니다. 동일한 구절을 ‘엘리멜렉이 죽고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이 남았으며’라고 기록해도 내용 전달에 전혀 무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 때 부터 나오미는 더 이상 룻기에서 “엘리멜렉의 아내”로 소개되지 않습니다. 이는 다분히 룻기 저자의 명백한 의도를 남은 표현입니다. 이를 통해 나오미가 가부장적인 사회의 낡은 가치관을 뒤 엎는, 당당한 삶의 주체라는 사실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가 상실을 경험하는 그 고통스런 순간이 곧 자신의 정체성을 더욱 새롭고 온전하게 이해하는 때임을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해 반드시 명심하시길 바라요. 우리는 본문 속 나오미와 꼭 같지는 않더라도 저마다 쓰라린 상실을 경험하곤 합니다. 아니, 더 정확히는 끊임없이 좌절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 삶의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라고 조심스럽게 말할 수 있습니다.

갑작스레 건강을 잃을 때도 있고, 가까운 가족과 친구를 떠나보낼 때도 있습니다. 오랜 시간 공들여 쌓아왔던 노력의 결과들을 허무하게 무너뜨릴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가 가진 어떤 무언가를 처절하게 빼앗길 때마다 그것과 맞닿아 있는 자신의 일부가 뜯겨져 가는 뼈아픈 고통을 느끼곤 합니다. 하지만 그 때, 그 모든 상실의 고통을 통해 여러분을 새롭게 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바라보시길 원합니다. 스스로를 더 이상 ‘누군가의 나’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나’, ‘가장 나다운 나’로 세워 가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신뢰하시길 바랍니다.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그러하듯 우리를 향한 그 모든 아픔과 절망들은 절대로 그 자체로 멈추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참 생명으로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6절 말씀 다함께 읽겠습니다.

6 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이에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절망에 빠져 있던 나오미에게 마침내 희망어린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것은 모압 이주의 원인이 된 베들레헴의 기근이 그치고 풍년이 찾아왔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이를 룻기 저자는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라는 따뜻한 문장으로 요약했습니다. 나오미는 이러한 기쁜 소식에 적극적으로 반응했습니다. 그녀는 그 이야기가 남의 일인양 무관심하며 절망의 자리에 가만히 주저앉아 있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살리는 그 복된 소식에 귀를 기울이며 그늘진 삶의 자리에서 과감히 박차고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그녀가 자신이 하나님께서 돌보시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 소중한 정체성을 그 어떤 시련과 고통 중에도 결코 잊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때, 본문에 기록된 단어 “돌보다”를 더욱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는 구절이 있습니다. 바로 창세기 21장 1절입니다. 화면에 있는 말씀 우리 다함께 읽겠습니다.

1 주님께서는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다. 사라에게 약속하신 것을 주님께서 그대로 이루시니, (창 21:1 새번역 성경)

창세기 이야기에서 가장 중심적인 갈등 중 하나는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불임(不姙)입니다. 원함에도 아기를 갖지 못하는 것은 오늘날에도 정말 가슴 아픈 일이지만 고대 중동에서는 훨씬 더 심각한 부정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 하나님께서 내리신 가장 중요하고 최종적인 재앙은 바로 파라오 왕궁을 비롯해서, 집집마다 큰 아들이 죽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더 이상 이집트 제국이 이 땅 위에 지속할 가치가 없는 저주받은 나라임을 드러내는 명백한 증거가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 시대 사람들은 누군가가 대를 이을 아기가 없다는 것은 그 가문이 더 이상 이 땅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기 때문에 신으로부터 받는 가장 끔찍한 저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께로부터 “큰 민족을 이루는 복의 근원”으로 분명히 부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아내 사라는 여전히 아기를 갖지 못했습니다. 이 역설적이고 모순적인 절망 가운데 사라의 마음을 예리하게 찌른 설움을 결코 이루 말로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다 하나님께서 마침내 당신의 약속대로 그 노부부에게 아들 이삭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 복되고 기쁜 장면을 여는 시작이 바로 방금 읽은 창세기 21장 1절 말씀입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후반부인 “사라에게 약속하신 것을 주님께서 그대로 이루시니”만 언급해도 2절로의 연결과 내용 이해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런데 굳이 그 앞에 “주님께서는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다.”라고 적었습니다. 그 이유는 아기 이삭은 사라를 향한 하나님의 위대하고 세밀한 돌보심을 드러내는 살아있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때, 창세기에 기록된 “돌보다”와 본문 6절의 “돌보다” 모두 같은 히브리어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오미의 귀에 들려온, 주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돌보신다는 소식은 막연히 우는 아이를 어르고 달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람들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움터있는 절망과 상실과 설움을 온전히 헤아리시고 몸소 함께 하시며 근원적인 생명과 희망을 이루심을 뜻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의 마지막 부분에서 두고두고 곱씹어야할 위대한 고백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래서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따스한 다스림 아래 있습니다. 그래서 간혹 여러 모양의 인생의 흉년이 찾아올 때, 저마다의 소중한 사람들을 아프게 떠나보낼 때, 억울하게 비난 당할 때에도 또한 차마 사람들 앞에 말 못할 온갖 상처 가운데에도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디에서 무얼 하든,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바라보고 비난하든 상관없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사랑하시며 항상 돌보신다는 이 놀라운 진리를 결코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위대한 돌보심이 우리의 평생에 늘 함께 하심을 언제나 신뢰하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나오미와 같이 기꺼이 주님의 부르심을 따르길 원합니다. 주님께서 당신이 돌보시는 백성들을 초청하는 쉼을 향하여 용기 있게 나아가시길 소망합니다. 그곳은 지금 우리가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 곳 교회 안이기도 하고 교회 밖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 각자를 향한 돌봄을 이어가시려 각기 삶의 자리에 가장 합당한 생명과 복음의 근원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그렇게 주님께서 부르실 때, 그동안 무작정 달리던 삶의 길에서 벗어나 하나님 나라의 돌보심 안으로 다시 돌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설교 후 기도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
주님께서는 엄격한 신앙의 잣대로 함부로 판단하고 평가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모든 실수와 연약함들을 끌어안으시는 드넓은 마음을 가지신 분이심을 말씀을 통해 확인하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겪고 있는 비극에 조심스럽게 다가가는 성숙한 마음을 주시고 시련과 좌절 가운데 쉽게 무릎 꿇지 않고 항상 우리를 돌보시는 주님의 품 안으로 달려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축도 
주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복을 주시고, 여러분을 지켜주십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얼굴을 여러분을 향해 비춰 주시고,
여러분을 은혜롭게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얼굴을 여러분을 향해 드시어, 
여러분에게 평화 주십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님의 사귐이 
돌보시는 하나님의 넓은 품에 안겨
인생의 주체로 살아가는 예담청년들과
항상 함께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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